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 니힐리즘의 극복 시도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하이데거④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 니힐리즘의 극복 시도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하이데거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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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서영화(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을 다시 묻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서구 사회 삶의 양식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소유의 양식’과 ‘존재의 양식’이 그것이다. 그에게 ‘존재의 삶의 양식’은 그리스도교의 순교자 인간개념이고 그 미덕은 ‘존재하기’, ‘주기’, ‘나눔’과 같은 가치들이다. 이와 대비되는 ‘소유의 삶의 양식’의 전형은 그리스 게르만 이교도의 영웅들이다. 이들의 미덕은 ‘소유’, ‘정복’, ‘승리’와 같은 ‘강함’의 가치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프롬이 얘기한 이교도의 영웅의 가치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철학이 지닌 가치가 서로 유사하다고 보았다. 호머(Homer)의 『일리아스(Ilias)』는 그리스와 게르만의 영웅이나 정복자의 도덕을 미화하고 아름답게 서술한 서사시인데 그리스 게르만 영웅들은 죽음이 도사리는 전장에 언제라도 나가 싸우다가 죽을 수 있는 명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한다.
프롬은 이교도의 삶의 방식이 서구 현대의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과 같다고 했고, 인간은 다시 그리스도교 순교자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순교자 삶은 ‘노예의 도덕’을 찬양하고 굴종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간 모델은 플라톤(Plato)적 인간, 기독교적 인간이다. 니체가 말하던,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을 고양시키는 인간’은 이른바 귀족적인 인간이고 자긍심과 품위를 지니는 인간이다. 니체에게 ‘선(善)’은 인간에게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서영화 교수는 오늘날에 ‘힘’이나 ‘강함’과 같은 개념이 우리 삶에 큰 가치를 줄 수는 있지만 반대로 ‘존재’, ‘주기’와 같은 개념은 주체적인 삶으로 기능하기에 어느 정도 부족하다고 인식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물론 이 가치를 판별하는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각 개인의 몫이기는 하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 1
하이데거는 프롬과 니체가 지향하는 가치의 다른 점을 지적하면서 결국 자신은 니체가 말하던 정복하고 승리하는 힘과 귀족적인 삶의 가치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니체를 바라본다. 프롬의 입장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이를 통해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니체와 하이데거 둘 사이의 대결로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전기에는 니체의 입장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니체를 해석하지만 후기로 가면서 자신의 사상과는 대척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서 니체의 철학을 해석한다. 특히 하이데거 이전에는 니체의 철학이 전통 형이상학을 극복하려 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하이데거는 니체 철학이 오히려 전통 형이상학을 완성하고 있으며 플라톤주의의 핵심개념을 그대로 남겨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니체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 이전의 해석을 전복하는 사유이다.
니체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 진리체계를 비판한다. 플라톤주의의 진리는 수학적 진리와 관계하고 수학적 진리에는 시간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는 무시간적으로 참된 것이다. 삶에 있어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확고한 것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편집증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생의 보존을 위한 지지대나 의지처로 보았고 나약한 자들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서영화 교수는 “만일 성경에서 말하는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는 구절은 니체에게는 맞지 않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니체는 플라톤의 이데아적 세계관이나 서구 기독교의 세계관은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힘에의 의지를 발산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주의와 서구 기독교는 죽음 이후 저편의 이데아계와 천국을 말하면서 지금 보이지 않는 평화롭고 안락한 세계를 통해 사기를 치는 것과 같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니힐리즘과 새로운 가치의 창출
니체는 서구 기독교의 가치를 전부 무의미한 것으로 바꾼 사람이다. 니체는 자신의 ‘우주론적 가치들의 붕괴’라는 제목이 달린 단편 2번(ⅩⅤ145쪽 이하)에서 니힐리즘에 대해 “그것은 ‘최고의 가치들(die obersten Werte)’이 무가치하게 된다는 것이다(sich entwerten).”라고 메모를 남겼다.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은 새로운 것의 개시를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가치가 허무해지고 살아야할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무기력의 대명사가 아니다. 니체 이전 플라톤적인 세계 속의 진리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었지만 니체는 이 ‘진리’를 ‘가치’의 개념으로 바꾸었고 인간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니체에게 있어 니힐리즘의 도래는 어떠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에 의해서 비로소 도래되어야 할 것이고 최고의 가치들은 결코 저절로 붕괴되지 않으며, 인간에 의해 투입된 가치들을 박탈하는 것은 새로운 인간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근거로 삼아 존재자 전체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니힐리즘의 극복을 주장했다. 무엇보다 가치가 박탈된 후, 세계가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결정적인 의지는 인간에게서 발원하는 것이다. 니힐리즘의 극복으로서 새로운 가치정립의 행위 주체는 인간이 된다.
서영화 교수는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조차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창조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고 평한다. 기존의 것을 통해 새로운 기호의 대상만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기업이나 산업시스템의 혁신이라는 것은 ‘기호의 창출’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가치의 창출’은 될 수 없다.
주체성의 형이상학의 완성 : 니체
전통 형이상학의 주지주의적 관점은 사물의 본질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니체는 모든 사물에게 공통적으로 내재하는 원리는 의지의 작용이거나 혹은 맹목적인 충동의 산물로 보는 입장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연장선에서 니체 사유의 고유성을 확인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는 무시간적인 이데아의 세계와 일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진리였지만 니체는 생성하는 세계와 일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생의 최상의 가치로 보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니체를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완전히 무너뜨린 사람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니체가 단지 플라톤주의를 전도하여 위아래를 바꾸어놨을 뿐, 플라톤주의의 핵심개념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바라본 니체의 한계점이다. 서영화 교수는 “기존의 것을 뒤집는 파격은 감행할 수 있지만 그 파격은 기존의 것에 한정되는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이데거 이전에는 니체를 형이상학자로 보지 않고 니체의 잠언들을 문학적 이해의 유산으로 보았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기존에 문학가로 알려져 왔던 니체를 서구 근대 형이상학의 완성자로 위치시킨다. 하이데거에게 서구 근대의 특징은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되는 시대이고 그것의 완성은 니체에게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를 플라톤적 형이상학과는 구별되는 ‘주체성의 형이상학자’로 보았다. 이후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니체 철학을 구분하는 큰 분기점이 된다.
니체의 초인에 대한 교설
니체에게 인간은 새롭게 가치를 정립하는 자이어야 한다. 니체가 말한 ‘초인(?bermensch)’은 세계 속에서 새로운 가치 정립의 주체로서 있으며,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고 명령하는 자라는 점에서 이제까지의 어떤 인간 종보다도 근본적인 힘을 획득한 자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이 초인에 대한 교설은 존재자 전체의 척도와 중심이라는 근대 형이상학적 인간상을 본질로 규정한다.
하이데거는 『니체와 니힐리즘』에서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는 인간이 존재자의 척도와 중심이 되는 것을 통해 규정된다.”고 하였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의 사유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근대적 사유가 칸트에서 라이프니츠로 이어지고 니체에게서 완성된다.
칸트는 표상되는 세계 이외의 것은 알 수 없어서, 물(物)자체는 알 수 없다고 했다. 표상된 세계가 곧 그냥 존재하는 세계이고 이 외부에 참된 세계를 설정할 수 없으며 설정해도 곧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 형이상학자들은 우리에게 표상되고 현상된 것을 참으로 인정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칸트의 ‘공적’이다. 서구 근대인들은 인간의 표상체계에 대한 나름의 확신이 빨랐고 세계를 구상하는데 있어 백지 위에 새로운 문명을 이룩한다는 신념을 이어나간다. 서영화 교수는 “고대와 중세의 인간이 만약 퍼즐판 위에 맞는 퍼즐조각을 끼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면 서구 근대인들에게는 퍼즐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계획 하는 대로 건물과 도시를 건축하고 산업사회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초인의 교설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최고의 승리를 구가한다”고 평했다. 그리고 니체에게서 발견되는 초인의 개념은 에른스트 윙어(Ernst J?nger, 1895~1998)에게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로서 노동자와 군인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현실적인 것 전체를 규정하는 형상을 노동자와 군인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이로써 인간 스스로가 만드는 자가 되었고 스스로 이데아와 신의 영역에 자리하게 되었다.
영원회귀와 소멸에의 복수의지
오늘날 니체는 누구보다 생성의 철학자이자 생에 대한 긍정의 철학자로서 간주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는 니체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결과물로서 ‘동일한 것’은 모든 존재자의 공통적인 본질인 ‘힘에의 의지’라는 존재의 표현이라고 한다. 동일한 것이 ‘영원하게 회귀한다는 것’은 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킨다.
니체는 생성과 소멸하는 것에 대해 감당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이 여기에 복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초시간적인 이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정립하여 시간적인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경멸했고 또 『파이돈(Phaidon)』에 보면 소크라테스(Socrates)가 자신이 왜 죽어야만 하는지 제자들에게 설명하는 구절이 나온다. 니체는 이것을 매우 비겁한 것으로 보았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소멸에 대한 복수 정신과 생에 대한 경멸의 태도인 것이다.
이러한 복수정신을 통해서 내세는 보장되겠지만 우리가 숨 쉬고 사는 이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니체에게서 시간에 대한 긍정은 ‘사라짐이 공허한 것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의욕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가 생성은 긍정하지만 함께 결합될 수밖에 없는 소멸은 긍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마치 소멸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영원하게 되돌아오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니체 해석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Dasein)’라는 삶의 방식을 분석하면서 ‘죽음’에 대한 해석에 기인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기본조건은 죽음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죽음을 앞에 두면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회상하게 된다고 한다. 회상은 과거 자기로의 복귀이다. 이는 통속적 인간으로서 본래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세인(世人;Das Mann)’의 삶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아직 경험하지 않은 미래인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면서 ‘일상의 공공의 세계’가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죽음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아무도 경험해줄 수 없는 것으로 철저히 단독화 되어 자신의 삶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게 죽음과 같은 의미인 소멸은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니체의 전통 형이상학의 전복은 생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전통 형이상학의 무시간적인 것, 이데아에 대한 것, 신에 대한 긍정이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니체의 생에 대한 긍정은 소멸을 영원히 회귀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하이데거에게 소멸은 영원히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이라 상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니체가 인간중심적인 철학을 전개했고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했음에도 하이데거에게는 여전히 형이상학자가 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니체에게서 소멸에 대한 적의가 고도의 정신화된 복수 정신으로 변형된 것일 뿐, 니체 자체도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 2 : 죽음, 나약함, 늙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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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즘은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근본입장, 즉 무(無)를 그의 본질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이상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 입장을 향해서 치닫는 형이상학의 역사일 것이다.” – 하이데거, 『니체와 니힐리즘』 中 –
하이데거는 니체가 사유의 무능력을 보여준다고 했다. 무와 소멸의 의미를 정신화된 영원한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참된 본질에 대해 사유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서 주요점은 니체의 생의 의지라는 것에서 늙음이나 나약함, 죽음과 같은 가치는 아예 빠져있다고 본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과 나약함, 늙음과 같은 가치조차 배제되지 않은 생성을 말한다. 들뢰즈(Deleuze)도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천개의 고원』에서 동일자의 영원회귀가 니체가 형이상학적인 원리로 받아들인다고 비판한다.
서영화 교수는 그 사회가 생의 약동만을 최고의 가치로 표상할 때, 그리고 생과 젊음과 같은 긍정적 힘이 최고의 가치로 간주되는 사회에서 죽음, 늙음과 나약함은 존재의 저편으로 내몰릴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니체 개인의 삶에서 죽음은 생에 부재하는 것이면서도 끊임없이 생을 전체화시켜 더 좋은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늙음과 나약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타자와 다른 여타의 존재자와 관계하면서 서로 빚을 지고 있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게 한다.
니체 철학의 대척점에서 하이데거는 죽음, 나약함, 늙음 등의 가치는 생을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을 지탱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즉 잘 사는 법에 대한 성찰을 선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자기에 대한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공동체 내에서의 삶에 대한 이해는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이교도의 영웅인가 아니면 존재하기, 주기, 서로 나눔의 세계관인가? 언뜻 보면 쉬워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아 깊이 생각해봐야할 이러한 질문을 끝으로 이번 강의는 마쳤지만 이 마지막 문제제기는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 전반을 통해 체득해야할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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