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13)
글: 이정호 (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2 : 아테네 민주정과 그 형성
3. 아테네 민중과 민회 그 빛과 그늘
30인 참주의 지배는 원칙에 있어서나 경과에 있어 폭압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들이 실각한 뒤 아테네인들의 생활 방식은 금방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참주들이 살아남아 이 광경을 보았다면 뤼시아스가 그랬듯이 누구나 다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생활방식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것이 다시 되살아나다니!”. 하기는 아테네 민중들의 부유층에 대한 탈취에 가까울 정도의 공적 기부의 강요는 민주정 회복 이후에도 크게 제제되는 일이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아테네는 더 이상 기부를 강요할 대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가난해져 판아테나이아(Panath?naia) 축제마저도 아주 간소하게 치룰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고 나라경제는 거류외인들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었다. 시민들이 이러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유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민주정 회복 이후 아테네 민중들은 노동을 통한 견실한 삶보다는 오랫동안 민회나 소송사건에 매달려 생계를 영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마치 게으른 사람들이 먹는 일만 생각하고 있듯이 완전히 상궤를 벗어난 터무니없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클레온(Kleon)이 배심원의 급여를 3배로 올린 이래, 한층 더 열심히 민중 최고재판소(heliaia) 일에 전념하면서 재물을 손에 넣는 일이라면 위증이나 술수는 물론 세금을 부정한 방식으로 회피하거나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뚜라미는 나뭇가지 위에서 1, 2개월 노래할 뿐이지만, 아테네인들은 일생 동안 소송으로 노래하며 먹고 살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 오른쪽 밑에 평의회 건물과 평의회 행정청 톨로스 그리고 선거로 뽑힌 배심원으로 구성된 민중 최고재판소가 나란히 위치해있다.이러한 정황은 여러 종류의 고대 자료를 인용할 것도 없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 등장하는 필로클레온의 말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벌(蜂)] 548f) 이 남자는 자신이 배심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 지를 아주 신이 나서 떠벌리고 있다. 이 작품의 정경들 중 어떤 장면을 취해도 모두 현실 그대로의 행태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아테네에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사람들은 피고인이나 그 가족들이 자신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신음하는 이러한 사람들이 재판정에서 그에게 아첨하며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마치 잘된 연극을 흥겹게 구경하듯, 모두를 두렵게 만드는 자신의 위세와 무분별한 방종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민중 최고재판소에서는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고 해서 반드시 승소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종 배심원들의 분노라든지 동정심이 판정의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하였고 혹은 피고인 자신이나 어떤 당파에 속한 자들의 웅변조 연설에 의해 판정이 뒤집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변호 연설의 초안을 작성해 주는 관습 덕분이었다. 특히, 경탄할만한 천재성을 가지고 연설 의뢰인과 마치 한 몸 한 마음이나 된 듯 연설문을 써주고 큰돈을 벌었던 뤼시아스는 이러한 재판의 모든 과정이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을 소진시키고 피폐하게 만드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앗티카의 정의심은 고갈되어 갔고, 진리는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으며 다만 수사술(rh?t?rik?)을 통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그럴듯하게 설득할 것인가(to pithanon)가 재판에서 이기기 위한 전부였다. 이런 까닭에 어떤 피고인 가족들은 비탄에 빠진 나머지 영향력 있는 당파와 잘 통하는 사람을 내세워 재판관을 찾아가서 선처를 청원하기도 했다. 크세노폰(Xenophon)이 전하는 헤르모게네스의 말은 간결하지만 당시의 정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테네의 재판관들은 연설에 의해 설복되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수없이 처형했고 또 많은 수의 범죄자들을 무죄로 판결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 VI, 8,5) 사실 고전기 내내 어쩌면 최고의 인재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뛰어난 사람들은 변론술의 수련을 통해 법정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길러졌다. 실제 이 기술은 시칠리아에서는 소송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고전기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끊임없이 발견되는 이 법정 변론술의 번성과 활약상에 비하면, 사실 정치적 변론술은 오히려 몇 가지 측면에서만 현저한 효과를 발휘했을 뿐이다.
아테네의 경우 정치적 변론술의 무대는 그 유명한 민회(ekkl?sia)였다. 민회는 모든 민주정에서 보여지듯이 원천적으로 5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Boul?)가 가지고 있었던 직무를 빼앗을 정도로 고도의 통치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 이 민회는 때로는 현실 국면에 대한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또 민중을 선동하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민회는 더 이상 기존의 다른 협의기구와 제대로 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데모스테네스(Demosthnes)는 곧바로 민회를 설득해 필립포스 2세와 단교하고 테바이와 연합하여 무모하게도 카이로네이아 전쟁(기원전 338년)을 일으켜 아테네를 멸망의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다. 민회에 대한 판단은 넓은 의미에서는 동시에 아테네 역사에 대한 판단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의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는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민회는 30인 참주정이 실각한 후 민주정이 부활하고 나서도, 비록 끝없이 변덕스럽기는 했지만 여전히 국가 조직으로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온 기관이었다. 여러 폴리스들에서 아주 피비린내 나는 갈등과 위기가 반복해서 일어났지만, 아테네는 어떤 사태를 맞이했건 간에 이 ‘민회를 통한 협의와 결의’라고 하는 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테네 역사에 대한 평균적인 견해를 대변하는 그리스 정신의 말기 상황을 파우사니아스(Pausnias)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민주정이 아테네인 이외의 사람들을 번영시켰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테네 사람들은 타고난 지적 능력에 있어서 다른 그리스 사람들보다 우수하고, 게다가 현존하는 법률에 불복종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스 안내기] IV, 35,3) 이 단합된 시민은 마치 하나의 생물과도 같아서 조형예술의 손에 의해 빚어지듯 이상적인 형태로까지 성장했다 물론 희극 작가들은 작품 속에서 이 시민을 정중하게 다루지도 않았고, 플라톤은 시민을 “크고 힘센 짐승(thremmatos megalou kai ischyrou)”으로 여겨 그 시민들의 기분과 욕망을 숙지하는 것이 국가를 다스리는 지혜로 간주하였다.([국가] 493b) 한편 플루타르코스는 옛날부터 알려져 있는 아테네 시민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욱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또 측은해하며 마음을 확 바꾸기도 한다. 시민은 차분히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예리하게 따지는 쪽을 좋아한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겸손한 사람들을 후원하기도 하고 또 유머는 물론 웃음을 동반하는 연설도 좋아한다. 자신을 칭찬해 주는 사람들을 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조소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화를 내지도 않는다. 시민은 그 통치자에게는 무서운 존재이지만,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조차 아량이 넓다.”(플루타르코스 [정치론 모음] ‘계율들’(rei p. ger. praecepta) 3)
집회에서 결정에 임하는 아테네인들의 모습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집회에서 무엇보다도 아주 엄숙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체 사안들에 관한 최고의 처분권과,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경우 그것을 이룰 권리를 가지는 우리 아테네 시민!“ 이라는 표현 또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평의회의 건물에는 평의회 위원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제우스와 아테네의 신전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건물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들러 엄숙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정의 안녕을 위해 기원을 드리면서 정성을 다해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신전에서의 맹세가 상습화되어 있었던 대중들도 그 효과 또한 상투적인 것 이상으로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최소한 아테네인이라면 누구라도 디오뉘소스 축제를 앞두고는 정례적으로 아주 진지하게 민주정의 적(敵)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맹세(psephisma: 인민결의)를 올리곤 했다.(안도키데스(Andokides) [비의에 관하여(de myst.)] 97) 이를테면 민주정을 반대하는 자는 처단하고야 말겠다는 것, 특히 비민주정 체제하에서 높은 지위를 누린 자들, 참주와 그 부역자들 모두는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처단한 자들은 무죄라는 것, 척결당한 자들의 재산을 처분하고 그 재산의 반을 그들을 처단한 자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사랑하는 상대를 탐한 참주를 함께 처단한 커플)의 자손처럼, 척결을 실천한 사람의 자손들에게는 급여를 주어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때마다 성실하게 신들에게 이러한 맹세를 드리는 사람에게는 늘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해주었고, 거짓맹세를 일삼는 자들에게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파멸이 닥치길 기원하였다. 그리고 폴리스는 시민 모두가 증오하고 폴리스를 위해 척결해야 마땅한 자를 누가 처단했을 경우, 그가 어떤 사람, 어떤 신분이었던 간에 상관없이 그 사람에게 격정넘치는 칭찬과 함께 화관을 하사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을 위해 거짓으로 작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그 유명한 헤르메스상 훼손사건(기원전 415년) 때에 디오클레이데스(Diokleides)는 이 사건은 시민들의 파멸을 도모하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즉각 주장하고 알키비아데스를 범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알키비아데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출정 중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를 구한 자로서 화관을 하사받고 마차에 태워져 회당으로 가서 향응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안도키데스 [비의에 관하여] 36.45.65f)
그런데 아테네가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하면서 여러 가지 목적상 민회를 통한 방법 외에 다양한 다른 방법을 취했다면,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일을 분명 보다 용이하게 달성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 민회에서 대외 정책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선전해야 했던 것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데모스테네스는 민회에서 당시의 정치적 관심사와 관련하여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국가에 유익한 것은 테바이 사람들과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강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테바이 사람들이 포키스(Phokis) 사람들을, 그리고 또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다시 포키스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들이 최강자로서 안심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크라테스 논박(adv. Aristokratem)] 654) 게다가 그는 무심코 입을 잘못 놀려 아테네인은 그 어떤 다른 사람들의 죽음보다 오히려 필립포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싶다고까지 말해 마케도니아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정체는 어쨌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생활방식이고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정열적인 전체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단의 목적 또한 생겨났고 또 전체의지를 통해 그 목적이 강하게 의식되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만 해도 민주정은 상당히 오래 전 부터 깊이 뿌리를 내려왔던 정치체제였으므로 현실에서 생동하는 모든 기억들은 이미 이 민주정체하의 인간이나 사물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토록 민주정은 실천적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압박에도 존속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쁜 경험들이 민주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민주정을 악용한 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내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가상도(기원전 431-404년)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의 소질, 의지 그리고 운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임에도 후세사람들은 끊임없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아테네라는 국가는 지나치게 격정에 휩쓸려 국가에 극히 유해한 어리석은 행동과 폭거를 결의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하고도 자질이 훌륭한 사람들을 급속히 소진해버렸고 게다가 그들을 협박하여 외국으로 추방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아테네에 있다면, 그것은 국가로서의 아테네가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적 잠재력(Kulturpotenz)을 갖춘, 정신의 원천(Quelle des Geistes)으로서의 아테네에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예를 들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인들이 보여주었던 민회에서의 열정과 전장에서의 헌신적인 용감성은 모두 맥동치는 국가성원으로서의 움직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 기간 동안 시민대중들 또한 의연하게 절제와 지혜를 발휘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엄청난 재앙으로 번졌을지도 모를 수많은 난관들이 고결한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미연에 저지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원전 406년 참혹했던 아르기누사이(Arginusai)의 해전에서 돌아온 장군들을 재판하면서 그들의 처형이 부당함을 외친 소크라테스 등 소수의 사람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기에 찬 군중들은 이렇게 외쳤다. “시민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음해, 아테네는 마침내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에게 완패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최종적 패배자로서 치욕스런 예속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30인 참주정 실각 후 민주정이 회복한 뒤에도 이전에 그랬듯이 하루가 멀다않고 민회 결의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방식으로, 5백명으로 구성된 평의회의 예비 협의마저 무시하고 모든 결정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이끌고 갔다. 인민(d?mos)이 결의한다는 것은 실로 인간임을 표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닭이나 다른 동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그것들은 민회에서 결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아리스토파네스 [구름] 1428)이었다. 그러나 영속적인 가치와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순간이나 그 때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지는 이러한 처사를 감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잊고 있었다.
이제 이 민주정이라는 공적인 제도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실제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고 어떤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야만 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그리고 30인 참주정이 실각하기 전까지는 과두정주의자들이 민심을 부추겨 악의적인 일을 저지르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민주정으로 회복이 된 후에는 거꾸로 오로지 민주정 지지자들만이 민회 및 민중 최고재판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 대표적인 두 부류가 변론술로 무장한 선동정치가(d?mag?g?s)들과 중상모략가(syk?phant?s)들이다. 물론 이 양자를 하나의 인물이 겸비하기도 했다. 그들은 민회건 법정에서건 그들이 원하는 결의를 얻어내기 위해 온갖 수사술을 다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선동 또는 매수하여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날리거나 위증을 하게 하는 등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행위도 서슴치않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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