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뱀파이어를 만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문성원(부산대)
구보씨는 비록 내세울 것 없는 철학자지만 그 나름의 줏대가 있어 세간의 유행이나 풍조 따위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지낸다. 생각 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건 정말 철학자가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요즘 말하는 트렌드에 하릴없이 뒤지기만 할 순 없다. 세태에 휩쓸리지는 않아도 그 물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무감해선 곤란한 까닭이다. 그래서 구보씨에게는 오늘날처럼 트렌드를 말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린 상황이 오히려 궁구의 대상이다.
다소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하긴 요샌 뱀파이어도 트렌드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혹자는 오늘날 뱀파이어 영화나 뱀파이어 드라마가 ‘뜨는’ 것과 세계적인 불황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그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초인간적인 영생의 힘을 갖춘 존재가 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뱀파이어는 <트와일라잇>에서처럼 꽃미남으로도 등장하지 않는가.
하지만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피상적인 연관만으로 뱀파이어에 눈을 돌릴 리는 없다.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주목한 건 꽃미남 뱀파이어나 검사 뱀파이어가 등장하기 전부터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정에는 이십세기 후반의 한 유명한 철학자가 관련되어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질 들뢰즈가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뱀파이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혹 구보씨는 들뢰즈가 사실은 뱀파이어였다는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들뢰즈의 인상이 뱀파이어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점을 새삼스레 지적하려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철학자 구보씨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주장을 할 사람도, 또 겉보기의 유사성에 그렇게 쉽게 현혹될 사람도 아니다. 비록 얄팍함과 꼼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아도 구보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구보씨가 들뢰즈와 뱀파이어를 관련짓는 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정확히 말하면 가타리와 함께 쓴 저작들)에서 뱀파이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지, 세간에 횡행하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의해서가 아니다. 들뢰즈는 뱀파이어를 철학적 논의에 끼워 넣은 보기 드문 철학자고, 구보씨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후대(後代)의 성실한 철학자일 뿐이다.
그런데 무릇 성실함은 혼자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뱀파이어와 들뢰즈가 구보씨와 엮이는 데는 페이스북으로 친구의 친구가 다시 친구가 되듯 매개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다. 사실 구보씨는 원래 뱀파이어나 들뢰즈에 별 관심이 없었고, 그닥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몇 년 전, K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카프카와 뱀파이어와 들뢰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걸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카프카와 들뢰즈와 K를 거치는 인연을 통해(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땅 속의 감자 줄기와 같은 리좀적 연결을 통해) 구보씨에게 이른 셈이다.
“카프카는 스물아홉에 펠리체를 처음 만났어. 친구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말이지.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야. 거의 매일 같이. 그리고 매번 답장을 요구했지. 당시 편지는 카프카가 살아나가는 힘이었어.”
“대단하군. 굉장한 여성이었나 보지?”
“글쎄… 사람은 보기에 따라선 누구나 다 굉장하지 않아? 펠리체 바우어의 사진이 남아 있긴 한데, 그 사진을 보면 미인이라고 하긴 어려워. 들뢰즈는 카프카가 오히려 펠리체의 근육질 팔과 육식동물 같은 큰 이빨에 매혹되었다고 하지. 카프카는 채식주의자였는데 말이야.”
“들뢰즈라면, 철학자 들뢰즈 말이야?”
“맞아, 그 들뢰즈가 가타리와 함께 <카프카>라는 책을 썼잖아. 거기 나오는 얘기야.”
“어, 그래? 나도 그 책은 대충 봤는데, 그런 건 기억이 안 나.”
“니네 철학자들은 워낙 감성적인 디테일에 약하잖아. 하지만 나 같은 문학쟁이들한테는 그런 게 먼저 다가온다구. 매력이나 감흥은 논리 이전이고 또 논리 이상의 것이거든. 그런데 들뢰즈에게는 그런 게 있어. 하긴 들뢰즈는 이런 디테일을 흡혈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지만 말이야.”
“흡혈이라구? 흡혈이 개념이야?”
K는 구보씨를 잠시 쳐다보다, 반쯤 남은 소주잔을 마저 들이켰다.
“때로는 음주도 개념인 거야. 그게 현실에 대한 어떤 관계를 얽어매준다면 말이야. 술 마신다는 건 현실을 대하고 현실과 접촉하는 한 방식이잖아. 그런 점에서 음주는 오히려 살아 있는 개념인 거지.”
“그래, 들뢰즈도 술에 대해 얘기하긴 하지. 정확히 말하면, 알콜 중독에 대해서… 근데, 그건 좋은 거라고 하긴 어려워… 그건 시간을 멈춰 자신을 딱딱한 껍질 안에 가두는 거고, 기껏 그 안에서 안온한 추억의 반복에 빠지는 것이거든. 들뢰즈 자신이 알콜 중독자였던 적이 있으니까 이런 상태를 그럴듯하게 표현하기도 했던 거지. 뭐, 그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하지만 흡혈이라…그게 어떻게 개념이 되지?”
“아니, 알콜 중독 말고 그냥 술 마시는 거 말야. 알콜 중독이야 일종의 도피지만, 일반적으로 술 마시는 건 그런 것만은 아니거든. 대개 우린 혼자 마시지 않고 이렇게 같이 마시잖아. 그건 세상을 담고 넘어서는 방편일 수 있어. 현실을 견디고 극복할 에너지를 주니까 말이야. 흡혈은 조금 더 처절하지. 에너지를 얻기 위한 공포가 더 커. 술 마시는 데도 두려움이 있잖아. 우리는 사실 크고 작은 두려움 때문에 술을 마신다구. 술과 술자리가 주는 쾌감은 확실히 두려움을 상쇄하는 효과가 있지.
그러나 흡혈은 극단적인 두려움을, 공포를 수반해. 사람들은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를 공포스럽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어서 공포스러워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공포심을 갖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있게 되는 거야. 그렇잖아? 이런 건 너희들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체험의 전형적인 효과거든. 아무튼 그래서 뱀파이어는 공포와 한 몸이야.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빛을, 십자가를, 마늘을 두려워 해. 현재의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를, 제도를, 처방을 두려워하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항상 비루먹었지. 살찐 뱀파이어를 본 적이 있어? 살찐다는 건 흡혈의 개념에 어긋나는 거야. 흡혈은 공포의 산물이니까 말이야.”
“뭐, 정말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면이 없진 않군. 문학적인 개념도 개념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들뢰즈가 이미지를 활용하는 데 능한 철학자라는 점도 쉽게 인정할 수 있어. 그런데 카프카는 뭘 두려워했다는 거야?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잖아. 하지만 실제로 카프카의 아버지가 억압적이었던 건 사실 아냐?”
“그건 그렇지. 하지만 펠리체와의 관계에서 카프카가 두려워 한 건 무엇보다 결혼이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육욕의 관계고.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천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어. 그러나 정작 만난 건 몇 번 뿐이라구. 그리고 두 번이나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하거든. 나는 들뢰즈가 카프카의 편지를 흡혈과 관련지은 건 탁월하다고 생각해. 육식 동물에 대한 채식주의자의 흡혈. 이건 세상에 대한 카프카의 관계를 잘 형상화하고 있거든. 카프카는 세상의 살을 뜯어 삼킬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기에는 이 현실이 너무 탐욕적이고 맹목적이며 공포스러웠던 거지. 그래서 그는 항상 출구를 꿈꾸면서 외설적 세상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흡혈을 하는 방식을 택했던 셈이지.
너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추송웅이 공연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기억해? 최근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 나온 추상미가 그 딸이라구. 뭐, 몰라? 하여튼 너는 디테일에 문제가 있어.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어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레메디오스 바로) 물론 구보씨가 그 때 안주삼아 들었던 K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구보씨는 나름 줏대 있는 인간이어서, 비록 술에는 취했어도 다른 사람의 견해에까지 쉽게 취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맨 정신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허다한 꼼수들이 판치는 세상에 산다고 해도, 구보씨는 절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K는 석 달이 멀다 하고 주종(酒種)과 화제와 애인을 바꾸는, 줏대 없는, 또는 줏대가 여럿인 친구가 아니던가.
그래도 그 이후로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관련된 사안을 그냥 흘려보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뱀파이어 영화도 기회가 닿으면 챙겨 보고, 자기도 모르게 흡혈이라는 틀로 세상사를 해석해 보다 혼자 멋쩍어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에 보지 못했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주변에 뱀파이어를 닮은 인간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 구보씨는 가끔 놀란다. 그들은 탐욕스런 현실에 대한 공포와 선망을 모순적으로 품고, 두려움이 배인 웃음을 때로 수줍게 흘리지만, 그 웃음 사이로 깊게 감춰진 갈구(渴求)의 송곳니를 일순 번뜩이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뱀파이어적 현상이 증식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것이 뱀파이어와 트렌드 사이의 중요한 관계다. 뱀파이어는 자연적이거나 계통적으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염에 의해 늘어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점을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뱀파이어는 부모가 뱀파이어라서 뱀파이어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수직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식을 낳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를 절멸시킬 수 없는 흡혈의 욕망은 수평적으로 번져나간다. 뱀파이어는 생식세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세포의 혈류를 타고 확산된다. 이들의 번식은 신경을 급속히 외장(外藏)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명을 배양액으로 삼는다.
고전적으로는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뱀파이어가 된다. 오늘날 뱀파이어의 이빨은 기술적으로 세련되어서, 사람들의 눈망울이 공포와 욕망으로 번뜩이는 순간 미세한 빨대처럼 그들의 목덜미에 파고든다. 인터넷은 그 좋은 매개체다. 카프카가 오늘에 살고 있다면, 그는 자못 심각한 <나꼼수>와 같은 이-메일을 매일 밤 수많은 펠리체의 목덜미에 박아 넣고 있을지 모른다. K, 그도 위험하다. 그는 능히 뱀파이어의 그런 방식에 전염됐음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구보씨는 다르다. 구보씨는 나름 줏대가 있는 철학자라서, 결코 그런 일에 휩쓸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알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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