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청춘의 서재]
박민철(건국대학교 강사)
개인적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재일조선인 3세와 몇 일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재일조선인을 나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사는 ‘같은 민족의 동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 끝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렸을 적에 일본인 학생들과 많이 싸웠겠네요?” 서경식의 책을 통해 이 질문이 무지했음을, 아니 참으로 무례했음을 깨달았다.
“옛날에 탄광의 갱부들은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위험을 알린다. 식민지배의 역사 때문에 일본 사회에 태어난 재일조선인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역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비유컨대 나의 저술은 질식해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서문에서-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은 그의 소개를 빌리자면 재일조선인론, 일본의 역사인식문제, 국가와 민족론 등에 대한, 한국인들이 읽었으면 싶은 평론 형식의 글을 모은 책이다. 서경식은 1951년 일본 쿄토시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라온, 자신의 규정대로 하면 ‘재일조선인 2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입장을 카나리아에 비유하며 재일조선인의 체험적 고통과 일본사회의 우경화에 대한 경고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경고는 공격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타자에 대한 동정과 공감, 성실한 내부 성찰과 자기비판을 뿌리로 삼아 진지하고 담담한 언어로 표현한다. 그래서 따뜻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카나리아의 비명처럼 애절하다. 그의 글에서 느껴진 깊은 아픔과 좌절에 비하면 당시의 내 질문은 진정 무례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그 중 두 편의 짤막한 글을 소개하면서,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 ‘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
이 책에서는 ‘재일조선인’이 경험한 민족적 차별, 생생한 억압과 핍박, 처참한 아픔 등이 ‘이야기’되고 있다. 담담하게 고백하듯 서술된 서경식의 글은, 말과 글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읽는 이로 하여금 가지게 만든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재일조선인이 겪었던 아픔과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과 더불어, 그들의 아픔을 잊고 있었다는 반성을 생겨나게 만든다. 어쩌면 그도 동일하게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철저하게 겪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조선에서는 19세기 말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 이어서 남북의 분단과 대립, 그리고 냉전의 와중에 디아스포라가 생겨났고 식민지배의 직접적 산물로서 재일조선인이 ‘반난민’의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을 ‘일제 식민지배의 역사적 결과로 구종주국인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뒤이어 그는 이 단순한 몇 마디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재일조선인의 규정을 개인적인 가족사를 통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일본의 패망 후 외국인등록령(조선인을 외국인으로 간주)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조선인의 일본국적 상실) 등과 함께 ‘조선’의 국적을 가지게 된 재일조선인의 국적취득 과정이 있었다. 당시 스스로를 국민으로서 귀속시킬 국가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은 ‘조선’이라는 민족적 태생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귀속될 수 있는 국가, 즉 조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재일조선인은 곧 ‘국가로부터 쫓겨난 경험이 있고 여전히 국가로부터 내몰릴 위협에 시달리는’ 난민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들은 취업과 같은 사회 여러 부문에서 차별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 여러 설문조사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일반적인 경향은 모국, 조국에 대한에 대한 애착이 희박해지고 일본 사회에 대한 애착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경식은 피차별자가 피차별의 체험을 표명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피차별자에게는 자기방어로 차별의 기억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반문한다. 나아가 누구나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 입에 맞는 음식, 친근한 벗에 대한 애착이 있기에 과연 이와 같은 것들이 ‘정말로’ 일본에 대한 애착일 수 있는지 묻는다.
그가 던진 질문, ‘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과 ‘일본 사회에 대한 애착’은 어쩌면 전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후자는 우리가 편하게 믿고 싶었던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재일조선인’은 단순히 ‘민단계 재일조선인’과 ‘총련계 재일조선인’이라는 남과 북의 구분선에서만 존재했던 것 같다. 아니 ‘우리’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특히 ‘나’에게는 그러했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규정에 따라 ‘재일조선인’을 ‘남한 쪽의 민단계’와 ‘북한 쪽의 총련계’로 구분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형식적 구분이 얼마나 우둔했으며 무례한 것이었던지를 서경식은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배를 통해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식민’이라 분류된 재일조선인을, 패망 후 일본은 재차 외국인으로 분류했다.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주었던 억압과 고통을 ‘외국인’이라는 규정과 함께 부정해버렸다. 이것에 대해선 굳이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역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을 단순히 남과 북으로 분류했으며, 그것과 함께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의식적으로 잊고자 했다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이 생생하게 경험한 일제 식민지의 고통과 일본에서의 억압과 차별을 국가라는 형식적이고 단순한 틀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일본이 재일조선인의 차별과 고통을 ‘외국인’이라는 규정으로 부정했다면, 우리 역시 ‘남한’과 ‘북한’이라는 구분 속에서 부정해버렸다. 설령 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러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재일조선인의 아픔은 단순히 탄광노동자, 징집병, 위안부 등과 같은 특수화된 이미지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현실의 아픔은 없어지고 고통의 이미지만 남았다.
현재 재일조선인은 연평균 5,500여명에 이르는 귀화로 꾸준히 그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 그리고 남북의 분단과 대립이라는 역사적 과정과 함께 생겨난 재일조선인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들은 단순한 ‘국가’라는 범주로 구분할 수 없는 생생한 역사적 존재이다. 특히나 역사 속에서 그들은 국가로부터 쫓겨난 경험이 있고, 여전히 국가가 보장하는 책임과 권리에서 차별과 외면을 당할 위협이 있는 존재인 셈이다. 재일조선인은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이다.
그렇다면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이 돌아갈 조국은 어떤 곳일까? ‘국민화’라는 구분 속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이들에게 돌아갈 ‘국가’를 다시금 묻는 다는 것이 어쩌면 가당치않은 질문이라고 할지라도, 무례를 무릅쓰고 묻고 싶은 질문이다. 서경식은 “‘조국’이란 어떤 영역, 토지, 혈통, 혹은 고유의 문화나 전통이라기보다 오히려 모든 정치적 조건들 아래서 선택되는, 미래를 향한 태도의 결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조선반도라는 토지, 혈통, 문화, 전통과 분리된 존재인 재일조선인에게 ‘조국’은, 과거 고통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선 안 되는 곳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조국은 ‘한국’, ‘북한’, ‘일본’, ‘기타’와 같이 현재적인 의미에서 어떤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미래 지향적인 조국의 모습으로 규정된다. 이건 어쩌면 재일조선인이 필연적으로 도착할 수밖에 없었던 조국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는 재일조선인의 조국을 어떻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었을까? 혹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들 마음대로 조국을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던가? 재일조선인들에게 국가라는 범주적 도식 속에서 조국을 부여하고, 어떤 억압적인 족쇄를 생각없이 채웠던 것은 아닐까? 잔인하게 반성하자면 ‘국민화’라는 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말이다.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현재 존재하고 있는 국가로의 범주화된 도식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미래의 모습으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
–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
제 1부 어느 편에 나오는 송신도 할머니는 1993년 일본에 거주하는 前 위안부로서는 처음으로 도쿄 지방법원에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송신도 할머니와 저자의 어머니는 동향同鄕에다가 동갑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또한 식민지배의 억압과 핍박 그리고 전후 일본에서의 민족차별과 성차별을 공통적으로 경험했다. 서경식은 송신도 할머니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고통을 가슴 시리게 보여준다. 활자를 뛰어넘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저자에게 송신도 할머니는 또 다른 어머니이다.
이 부분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는 눈물이 비쳐 나온다. 한편으론 그들이 겪었을 참혹한 고통에 대한 동정과 공감, 다른 한편으론 그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머리로만 알고 넘어갔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죄스러움 때문이다. 그녀들이 당한 행위에 대한 저자의 분노, 회한, 슬픔, 미안함 등은 그의 글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그녀들의 고통과 아픔을 비슷하게 경험한 재일조선인이기에, 서경식의 글은 그녀들의 감정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 70여명을 상대해야만 했던 열 여섯의 송신도 할머니에게 가해진 처참한 폭력과, 일본인 가정의 허드렛일을 맡아 하면서 여덟 살의 저자의 어머니에게 가해진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대한 서경식의 글은 단순히 ‘가슴아프다’라는 단편적 동정심을 넘어서게 해준다. 처참한 고통은 커다란 보편성,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동질감을 부여해준다. 같은 핏줄이어서, 같은 문화라서, 같은 언어를 씀으로서 갖는 동질감이 아니다. 아마도 극심한 고통에 대한 반발로서, 즉 고통받았던 이들에 대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될 보편적 연대감과 같은 말일 것이다. 같은 민족이란 “고통과 고뇌를 공유하면서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지향함으로써 서로 연대하는 집단”을 의미한다는 서경식의 말은 따라서, 송신도 할머니는 이 글을 쓰는 지금 나의 또 다른 어머니임을 자각하게 해준다.
우리가 쉽게 사용한 재일조선인이란 말을 일본인들은 가장 차별적으로 사용해왔다. 모욕당하고, 버림받고,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외면당해왔던 사람들을 ‘재일조선인’이란 공식적 명칭 속에서 은폐시켜버렸다. 아니 고통과 고뇌를 공유하기는커녕, 불편한 진실처럼 그리고 남의 일인 양 쉽사리 외면해왔다. 비단 일본의 우경화를 여기서 다시금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 역시 가장 차별적인 그 단어를 ‘같은 동포’라는 무감각적 언어와 등치시켰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그들로서 박제화시켜버렸다. 어쩌면 우리들은 차별적 언어를 사용한 그들의 논리에 나도 모르게 포섭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얘기한 “어렸을 적에 일본인 학생들과 많이 싸웠겠네요?”라는 질문은 정말 무례한 질문이었다. 특히 나 스스로에게 절대적으로 그러했다.
“어머니를 향해 던져진 돌멩이를 이 몸으로 받으면서 ‘공식적 역사’가 묵살하고 은폐해온 어머니들의 역사를 위해, 어머니들과 함께 또 어머니들을 대신해, 자식인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자식인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카나리아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이 책 3부의 제목처럼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스스로의 반성’이 필요하다. 서경식의 이 책은 나에게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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