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짊어진 어머니 이소선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강 지 은(건국대학교 강사)
“엄마 배고파”
열 두 살 우리 딸이 학교에 다녀와서 제일 먼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일 때문에 나가야 할 땐, 아이가 하교하는 시간이 되면 듣지 않아도 들리는 듯 귓가에 맴도는 소리이기도 하다. 가끔 바쁘거나 온 몸이 귀차니즘으로 가득한 마흔 한 살의 엄마는 천 원 짜리 한 두 장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런데 왜 맨날 나보고 배고프다고 하지? 그건 말하나 마나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영화 ‘어머니’ 포스터“엄마 배고프다 …” 이소선은 아들의 마지막 말을 듣고 기도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던지 이소선은 정신을 잃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아들 전태일이 열악한 노동현실을 바꿔야한다 외치며 불꽃으로 산화한 그 날, 병원에서 이소선은 배고픈 아들을 그렇게 보냈다. 마흔 한 살에 아들을 보내고, 마흔 한 해를 아들의 부탁과 함께 살아온 이소선은 2011년 9월 3일 영면하였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되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뜷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오도엽 씀, 후마니타스, 83-84) 그토록 자상한 아들, 그토록 어여쁜 아들이 불타 익어 숨이 넘어가면서 한 부탁을 이루어내려고 어머니는 평생 뒤도 안 돌아보고 살았다.
열 서너 살 시다들이 종일 굶고 일하는 것이 안타까워 버스비로 풀빵을 사먹이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마흔 한 해 동안 세상의 어머니이기를 자처했다. 중앙정보부와 평화시장 사업주들이 돈다발을 들이밀었어도 거절한 건 아들 때문이었다. 내 식구 배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아들이 바라는 세상은 아니었다. 모든 회유책에서 끈질기게 벗어난 이소선은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를 16인 이상 고용업체까지 확대할 것이며, 근로기준법을 위반할 때 내리는 벌칙도 강화하겠다는 약속과 전태일이 항거하며 요구한 사항을 들어주겠다는 합의서를 받고 아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배고픈 노동자들의 어머니
배고픈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기를 자처한 이소선은 시내에 빌딩을 살 수 있는 돈 대신 노동조합을 선택한다. 전태일이 분신 항거한 지 2주일 만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만들어졌지만 얼마 못가 사업주와 정부의 탄압에 온몸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형사들과 몸싸움도 해야했고 수없이 유치장 신세를 졌으며 징역을 살았다. 독재정권과 경찰들에겐 ‘빨갱이 년’이었다. 도대체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길을 어머니는 걸었다. 이소선은 헌옷 장사를 했다. 전태일이 죽기 전에는 전태일을 위해서, 아들이 죽고 나서는 새로 생긴 아들들을 위해서 헌옷을 모아 팔았다. 다른 이들은 재수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죽은 사람 옷도 영안실에서 구해왔다. 이렇게 돈이 생기면 이소선은 조합으로 달려가 끼니 거른 조합 간부들에게 줄 라면을 끓였다. 평화시장 옥상에다 큰 들통을 걸어 놓고 나무를 지폈다. 새벽 두시부터 국숫집에 가 줄을 서서 싸게 사온 ‘파지 국수’로 만든 우거지 죽으로 조합원들의 끼니를 챙겼다.
철거반이 부술 때마다 전태일이 다시 짓곤 했던 블록집 쌍문동 208번지에서 어머니와 함께 전태일을 닮은 청년들이 전태일의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 내려야 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는 결코 노동조합을 성장하게 두지 않았다. 박정희가 79년 10월 26일 죽고 새날이 올 줄 알았던 사람들은 얼굴만 바뀐 군사 독재에 또 다시 부딪혀야 했다. 전두환 정권 역시 노동조합을 수없이 탄압했다. 독재자들에 대한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던 시절을 이소선은 온몸으로 부딪혀 싸웠다. 때로는 수배자들을 보호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수배자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던 청계노동조합은 1984년 3월에 청계피복노동조합복구위원회의 이름을 다시 걸었다. 이는 다시금 노동조합과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 후로도 숫한 파업의 현장과 집회를 누비며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쳤던 이소선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에 분신항거하는 또 다른 전태일들을 가슴으로 묻었다. 1986년 3월 17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한 신흥정밀 박영진의 마지막 유언을 받으며, 1987년 8월 22일 경찰이 쏜 최루탄에 심장을 맞아 죽은 이석규의 시신을 지키며 이 땅에서 힘없고 배고픈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받아냈다.
억울한 죽음은 다시 없게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숱한 이들이 죽음으로 항거했지만 이들의 죽음이 제대로 밝혀지지는 못했다. 유족들은 자식들이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평범한 시민이 권력에 홀로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유가족들은 이소선을 찾아왔다. 노동조합의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이소선은 전태일과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출범시키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배운 것 없어 회장같은 일은 나서서 하지 않은 이소선이지만 전두환 정권에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거친 길을 떠안았다. 이소선은 쇠사슬에 묶인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민주주의의 어머니가 되었다. “독재의 똥개들아! 나도 잡아서 죽여라. 나도 방패로 찍어 죽여라!”(『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245) 서슬퍼런 군사 정권에 목숨걸고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는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어머니 뿐이다. 어머니의 외침에 유가협 부모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 글의 자료는 전적으로 오도엽이 꼬박 5백일 동안 이소선과 나눈 이야기를 담은 책『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2008년 12월에 출판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도엽은 이소선에게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하고 싶은 말을 묻는다. 『전태일 평전』의 인세를 고스란히 이소선의 활동에 쓰라고 준 조영래 변호사, 군홧발 무섭던 1980년 남산에 잡혀갔을 때 동상 걸린 발에 약을 사다 발라주던 젊은이, 수배당해 도망다니며 얻은 결핵을 제대로 치료도 못할 때 자기 집에 숨겨주고 주사 놔주었던 간호사, 자기보다 나이 어린 이소선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존경하고 도왔던 문익환 목사님, 전쟁 끝나고 오갈 데 없는 이소선의 식구들에게 처마밑을 내 주었던 집주인, 청계 조합원들… 그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했다. 그리고 아들의 원을 풀어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자식들, 독재 때보다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함을 전했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척박한 이 땅에 전태일이 노동조합의 씨를 뿌렸다면 이소선 어머니는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았다.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꿈을 따라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다. 어머니는 민주노총이 만들어질 때 제일 기뻤고 다음으로 기쁜 게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만든 것이라 했다. “잘난 척하지 말고 소외받은 사람 곁으로 내려가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차별 없는 세상 만드는 데 힘써야지.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국민 지지받아 국회도 많이 가고, 그래서 나중에는 대통령도 하면 좋지 않겠냐”『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283). 이론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마흔 한 해 아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 터득한 진리이다. 이런 어머니를 위한 훈장 추서가 기각되었다. 민주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이 훈장이 기각된 이유는 다른 민주인사들과 비교 검토할 수가 없어서란다.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예처럼 사는 현실을 두고 어머니는 국가가 주는 훈장을 가슴에 달지 않을 것 같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명예도 아니고 돈도 아니지 않았던가.
속. 상. 해. 하. 지. 마.
고령과 지병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어머니를 담으려고 했던 영화가 올해 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실 줄은 아마 제작진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없다. 한국의 아픈 근대사와 싸우고 보듬었던 시대의 어머니는 마흔 한 살에 아들을 보내고 마흔 한 해를 살다가 지난 달 잠들었다. 어머니의 영화도 참 힘든 길을 가고 있다. 상업영화가 아니니 후원도 필요하다(http://sosun.tistory.com/). 어머니의 길을 오롯이 남기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그를 기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속.상.해.하.지.마.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 같다. 속상해 하지 않으련다. 대신 꿈꿀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머니를 기리며 어머니의 꿈을 함께 그리는 것이 아닐까.
사족 한 마디
이제 곧 대한민국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시작으로 총선, 대선을 치러야 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여성 후보들이 등장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선거들에서도 여성 정치인의 약진이 펼쳐질 것이다. 정말 한 마디만 하자. 함부로 어머니의 마음가짐으로 정치에 나왔다는 말을 하지 말자. 채 한 줌도 안 되는 일부 고위층을 위하여 출마하는 여성정치인은 정말 어머니, 엄마를 입에 담지 말자. 우리에게 필요한 어머니, 엄마는 이 땅의 아픈 손가락들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로 챙기는 욕심이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 정말 한 마디만 더 하자. 이소선 어머니의 마음으로 정치할 수 있는 여성 정치인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우리가 손을 보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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