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꽃나무, 상처 그리고 치유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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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효 숙(연세대)

 

1. 소금꽃나무들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와서 그다지 덥지 않았던 2011년 여름. 요즘 9월 들어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제법 가을 냄새가 난다. 그러나 부산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에서 250여일을 지내며 아직도 내려오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좁은 크레인에서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얼마 전에는 위를 다쳐 죽으로 연명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 왔다.

김진숙,52세 비혼(非婚).2011년 들어서 더 유명해진 그녀! 그녀가 남자였다면 뒷바라지하는 아내나 가족들이 있었을 터인데, 그녀는 혼자이다. 물론 85호 크레인 바로 아래에는 그녀를 지키는 한진중공업 해직 동료 노동자들이 있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길고 끈질긴 투쟁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솔직히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1차 희망버스에 오를 희망자들을 구한다는 메일을 열어 보고서 그제서야 김진숙이 눈에 들어 왔다. 물론 그 전에도 그녀 이름은 들었지만 나는 모른 채 했었던 것 같다. 나를 위시한 우리 이웃들이 그녀에게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을 때조차, 그녀는 칼바람의 겨울부터 봄을 지낸 후,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요즘까지 85호 크레인에서 요지부동 내려오지 않고 있다.

희망버스가 4차까지 떠났다. 그래도 나는 이 희망버스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그저 뒷켠에서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아무런 응원도 격려도 희망의 메시지도 보내지 못하고, 그냥 살기 바빠서…. 라는 핑계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무기력과 자괴감이 슬며시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인에게서 들은 그녀가 쓴 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가 쓴 책, 『소금꽃나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응? 소금꽃나무라고? 세상에 그런 꽃나무가 있나? 뭐지? 궁금했다. 책을 봤다. 아! 소금꽃나무는 노동자들이 흘린 땀이 소금이 되어 등짝에 달라붙어 마치 허옇게 핀 소금꽃나무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소금꽃을 피워내는 노동자들이 바로 소금꽃나무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달밤에 하얀 소금을 뿌린 듯 피어 있는 메밀꽃의 서정보다 더 진한 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소금꽃을 피워내는 많은 소금꽃나무들이 있다. 이들이 땀흘려 배출한 소금 결정체인 소금꽃나무들이 여기저기에서 많은 피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2009년 봄 77일간의 기나긴 쌍용자동차 파업은 경찰의 잔인한 진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동안에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은 극한의 투쟁을 벌였고, 진압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치유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상처들이 이 후에 남겨진 것이다.

 

2. 상처받은 자들의 절규

 

김진숙, 그녀는 매우 강한 여성이다. 통일문제연구소장인 백기완 선생은 그녀를 80평생 만난 여자 중 최고의 여자라고 했다. 그만큼 속이 단단하고 인내심이 강한 여성이다. 고공 크레인에서 250여일을 넘겨가며 버티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아마 유래가 없을 것이다. 김진숙은 강한 여성이니 그정도 시련은 견뎌낼 것이다, 라고 그녀를 믿고 방치하는 것은 정말 괜찮은 일일까?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왜 그녀라고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철의 여인이라 잘 버텨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모질고 독한 년(?)이라고 이를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입었을 상처를 인간적으로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녀가 입은 상처와 상흔은 한진중공업 사태가 해결되고, 그녀가 크레인에서 내려 올 때 비로소 헤아려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지만, 그녀도 꽃을 보면 감동하고 마음이 설레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겠는가. 부디 상처를 덜 입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금꽃나무』에 보면 그녀의 가족사를 언급한 ‘상처’의 부분이 있다. 나도 읽다가 고통이 와 닿아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슬그머니 책을 덮어 버리게 된다. 노숙자로 전전하다가 10여년 만에 경찰서로부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소식이 날라 온 남동생의 비참한 죽음! 그 딸인 채 스무살이 안된 조카가 가출 2년 만에 몸이고 마음이고 간에 만신창이가 되어 미쳐 버린 채 돌아오고…… 그래도 애써 태연한 척 그녀는 그 상처들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어디 그녀의 피붙이 가족들만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으랴! 한진중공업에서 파업 철회 투쟁을 하다, 불의의 객이 되어버린 적지 않은 가장들, 그 소금꽃나무들의 죽음이 새긴 상처. 그 상처가 분노가 되어 한여름엔 지글지글 끓는 크레인의 철골 위에서, 한겨울엔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의 서슬 속에서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지금껏 250여일 가까이 김진숙은 내려오지 않고 있다. 85호 거대한 크레인보다도 더 강한 그녀이지만, 예쁜 꽃과 같은 감성을 지닌 그녀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 상처는 누가 언제 어떻게 보듬어 줄 것인가.

얼마 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상처를 보여준, KBS스페셜, “심리치유, 8주의 기록, 함께 살자!”를 시청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마인드프리즘 팀에서 이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짧은 8주 동안 치료하면서 살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진다. 베란다에 서면 자살 충동이 일어난다. 늘 가까이 있는 죽음의 유혹, 끝없는 무력감과 고통스러운 기억들의 반복, 시시때때로 솟구치는 분노와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불신. 그들의 삶과 마음은 바로 불지옥이었다.

정혜신 박사는 이들이 77일간 쌍용자동차 파업 기간에 겪은 고통, 폭압적인 진압, 경찰에 의한 체포 등에서 입은 상흔을 원자폭탄에 피폭된 상태에 비견했다. 그만큼 엄청난 영혼의 손상을 입은 것이다. 이 영혼의 손상은 한 개인의 영혼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후, 삶은 철저히 무너졌다. 자살과 심근경색 등으로 인한 사망률이 평균 3배 이상이 되었다.

한 정리해고자의 “내가 무슨 지독한 죄를 지었기에 이런 끔찍한 대우를 받는지…..”라는 가슴을 후펴파는 절망스러운 목소리가 귀전에 남아 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쌍용자동차에 취업했고, 또 정리해고 후에도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생존의 투쟁을 했을 뿐인데, 그들에게 돌아왔던 건 무자비한 폭력과 상처 뿐이었다.

이러한 상처들에 겹쳐지는 얼굴들, 청년 실업의 문제!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의 얼굴들이 대체로 어둡다. 기운이 없고 패기가 없다. 무슨 죄를 지은 양, 어깨가 축 처져 있고 눈동자에 슬픔과 암울함이 비친다. 기운이 하늘을 찌른다 해도 모자랄 20대 청춘들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언제 폭발할지 모를 상처들이 가슴 속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왜 우리 세대만 이런가? 우리는 왜 이렇게 저주받고 있는가? 청춘들의 좌절과 분노와 절망에 대해 우리 사회는 냉담으로 초지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이러한 상처 내기를 되풀이할 것인가? 국민을 위한 국가는 진정 없는 것인가? 이 국가는 도대체 어떤 국가라는 말인가? 그래, 이 국가는 특권층을 위한, 강한 자를 위한 국가가 아니었던가? 힘과 권력으로 상징화된 강한 남성의, 강한 아버지의 국가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화된, 폭력과 압제의 코드가 교묘하게 숨겨진 아버지의 국가, 상징계의 국가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그 위력에 우리는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약한 아버지, 약한 남성, 약한 여성, 약한 청소년들은 극한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 상처받은 영혼들을 언제까지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3. 트라우마는 치유 가능할까?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고 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왜 그 생채기가 났는가를 아는 것인데,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저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바꿔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니냐 하는 패배의식이 우리를 더 병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응급처치하고 대증적인 요법만으로 땜질해서는 곤란하다. 상처의 원인을 찾아 그 병원균을 없애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병원균이 무엇인지는 암묵적으로 다 알고 있다. 병원균이 천하무적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고, 그저 그 속에서 꼼짝없이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도 모르게 체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는 계속 나고 곪아 터져 우리의 삶을 파괴시킨다. 그래서 상처를 직시하고 그 병원균을 처치할 새로운 치료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버지의 이름에 맞서는 여성주의가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그 중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보살핌의 윤리’다. 보살핌의 윤리를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변형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 윤리를 그저 여성들의 자애롭고 따뜻한, 자칫 한가한 덕목으로만 쓸 것이 아니라, 진짜 상처 치유를 위한 적극적인 방식으로 활용할 때가 왔다. 우리 사회와 같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에게는 ‘보살핌의 윤리’가 ‘치유의 윤리’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적 보살핌의 윤리가 치유의 윤리로 버전업되어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닌가.

그런데 치유의 방법과 길은 그다지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치유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정신과 전문의나 상담 치료소 등이 그 몫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방향을, 어떤 대안을, 어떤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여성주의자들이 이 치유에 동참하고 연대할 수 있는 부분적인 몫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와는 상당히 다른 환경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테바가 『시적 언어의 혁명』에서 말한 기호계가 떠오른다. 기호계란 무엇인가? 폭력적인 아버지의 이름인 상징계를 거부하고 맞서면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질서이다. 이 기호계가 상징계의 폭력으로부터 입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상징계가 유일하다고 믿는 그 맹신을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세상은 다양한 질서로 짜여 있으며, 우리도 새로운 질서를 다양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상처투성이의 삶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롭게 횡단하고 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주체가 되려면, 먼저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할 것이다. 그 치유의 길은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하드한 혁명보다 마음 속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소프트한 혁명이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 여성주의자들도 이들의 치유에 발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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