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6
김남우 (정암학당)
애초 연재를 시작하며 출판사 <열린책들>과 맺은 약정에 따라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우신예찬의 연재를 마친다. 연재를 진행하며 우신예찬의 번역을 마무리하였으며, 출간을 며칠 앞두고 있다. 성원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출간될 책에 대하여 따끔한 지적과 비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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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년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 화답하는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혜에 대한 칭송이라 하겠다. 매우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는 인문주의 운동에 앞장 선 인물들로서, 이들은 <우신예찬>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 <유토피아>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였다.]
오늘날 교황들은 수고가 가는 것들은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맡겨 두고 자신들은 넘쳐 나는 여가를 즐기며, 빛나고 즐거운 일은 자신들이 맡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나 우신 덕분에 인간 종족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여유롭게 살아가며 근심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다만 신비적인 흡사 무대 의상을 걸치고 예배를 거행하며 복된 자, 존경스러운 자, 신성한 자라는 칭호를 휘두르며 축복과 저주로 파수꾼의 일을 수행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충족시킬 것이라 믿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낡고 진부하며 오늘날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며, 대중을 교화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며, 성서를 해석하는 일은 학교에서나 할 일이며, 기도를 올리는 일은 한가한 일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은 미욱한 여인들의 일이며, 가난을 실천하는 것은 역겨운 일이며,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위대한 왕들에게조차 지복의 발바닥에 입 맞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자신들로서는 치욕스럽고 가당치 않은 일이며, 죽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만부당한 치욕이라 교황들은 생각합니다.
이들의 유일한 무기는 바오로가 경계하였던바 달콤하고 비위에 맞는 말이며 또한 이들이 후하기 이를 데 없이 베푸는 성무 면직, 성무 집행 정지, 제 1차 제명 및 제 2차 제명, 파문, 사람들의 영혼을 고갯짓 한번으로 지옥에 보내 버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벼락같은 파문자들의 초상 전시 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성스러운 사제들과 대리자들이 할 본분은 악마에게 충동받아 베드로의 유산을 들어먹고 탕진하는 자들을 무엇보다 매섭게 나무라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복음에 따르면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하였거늘, 교황들은 이와 달리 토지와 도시와 세금과 통행료와 권력을 베드로의 유산이라 부릅니다. 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며 교황들은 칼과 불로써 기독교인들의 엄청난 유혈사태를 불사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도들이 하였던 것처럼 용감하게 소위 타락한 적들을 척결하여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된 교회를 지키는 것이라 믿으며, 이것들을 지켜 냅니다. 하지만 사실 교회의 가장 무섭고 지독한 적은, 침묵으로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잊히도록 방치하며, 장사치의 법률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며, 억지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역병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불경한 교황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으며, 그 피로 굳건해졌으며, 그 피로 성장하였으나, 이렇게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마치 칼을 들어야 할 것처럼 교황들은 전쟁을 불사합니다. 전쟁은 끔찍하기가 짐승이 아닌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며, 시인들이 말하는바 복수의 여신들이 보낸 것이라 할 만큼 미친 짓이며, 세상을 한꺼번에 휩쓸어 가는 역병처럼 치명적이며, 흉악무도한 날강도들이 제일 잘 수행하곤 하는 무법한 일이며, 그리스도와는 무관하여 다만 불경한 일인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다른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다만 오로지 전쟁을 수행합니다. 이 가운데 여러분은 백발이 성성한 교황들조차 청춘의 열정과 힘을 과시하는 것을, 엄청난 비용에 괘념치 않는 것을, 역경과 고난에 지치지 않는 것을, 국법과 종교와 평화와 인간 만사가 모조리 뒤죽박죽 엉망이 되는 것에도 굴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 옆에서 학식을 갖춘 아첨꾼들은 명백한 광기를 열정과 경건과 용기라고 부르며, 어떤 사람이 치명적인 칼을 뽑아 형제의 복부를 찌르면서도 그리스도의 크나큰 사랑과 기독교인이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놀라운 방법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에 있어 게르마니아의 주교들이 선례를 제공한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는 차라리 그들도 선례를 따른 것인지 아직까지 나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게르마니아의 주교들은 공공연히, 관복을 벗어 놓고 심지어 축도는 물론이고 그런 모든 종류의 예배 의식까지 생략한 채, 페르시아의 태수 노릇을 하는바, 이들은 전쟁터의 최전방 이외의 장소에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은 비겁함이며 주교의 직분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사제들의 무리도 자신들이 주교들의 성덕에 뒤처지는 것을 불경한 일이라 여겨, 십일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병사처럼 칼을 들고, 창을 잡고, 돌을 던지며 온갖 무기들로 참전합니다. 또한 게 중 눈 밝은 자들은 옛 문서를 뒤져 백성들을 위협하여 십일조 이상을 쟁취하기 위한 문구를 찾아냅니다. 반면 그 외에 여기저기서 발견되는바 그들이 백성들에게 제시해야만 하는 많은 다른 의무들은 그들의 안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깔끔하게 밀어 낸 머리카락도 이들에게, 모름지기 사제란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버려야 하며 오로지 천국의 일만을 명상해야 할 존재임을 알려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냥 즐거운 이 인간들은 박약한 기도를 중얼거리기는 것으로 스스로 해야 할 의무를 정당하게 다했노라 믿습니다. 그들의 귀에 대고 크게 소리쳐도 스스로도 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할 그런 기도를, 나 우신조차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바 어느 신도 듣거나 혹은 알아들을 수 없을 그런 기도를 말입니다.
사제들과 세속인들과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가 수익을 올리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와 관련된 법률에 정통하다는 것입니다. 또 커다란 부담을 져야 할 경우 이를, 마치 공을 다른 사람에게 받아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처럼 영리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세속 군주들은 흔히 국가를 다스릴 과업을 비서들에게 떠맡기고, 다시 비서들은 비서의 비서들에게 하청을 주는 것처럼, 긍휼의 과업을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발휘하여 모두 백성들에게 양보합니다. 그럼 백성들은 이를 다시, 자신들이 교회와 무관하고 세례 서언을 행하지 않은 듯 자신들과 구별하여 ‘교회 식구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교회 식구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속에 헌신하기로 맹세나 한 듯 자신들을 ‘재속 사제’라고 부르는 자들은 다시 이를 ‘수도회 사제’들에게 굴려 보냅니다. 수도회 사제들은 이를 다시 수도승들에게, 다시 유연 수도승은 강직 수도승에게, 다시 모두는 탁발 수도승에게, 다시 탁발 수도승은 이를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은수자들에게 맡깁니다. 하여 오로지 카르투시오 수도회 은수자들에게서 긍휼은 은밀히 간직되어 있는바, 어찌나 잘 감추어져 있는지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황들은 예배를 통해 금전을 부지런히 모으는 데 바빠 사도의 막중한 과업은 주교들에게 이양하며, 주교들은 사제들에게 이양하고, 사제들은 부사제들에게, 부사제들은 탁발하는 형제들에게 이양합니다. 그럼 탁발 수도승들은 이를 다시 양털을 깎는 목자들에게 전가합니다.
이상 내 연설의 목적은 칭송이라면 모를까, 교황들과 사제들의 삶을 들추어내어 풍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훌륭한 군주들을 욕보이거나 악한 군주들을 칭송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나 우신을 받아들이고 나 우신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인간들 가운데 누구도 행복하게 살 수 없을 밝혀내기 위해 이를 약간 살펴보았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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