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고통의 여정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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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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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내 안의 타자
요시코가 마쓰시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린 것은 그가 일본 순사 부장의 아들이라는 것과 대학 졸업반이라는 사실이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는 비밀이란 게 없었다. 어머니의 염려가 깊어지자 요시코는 마쓰시타를 피해 다녔지만, 마쓰시타는 일 년이라는 시간을 변함없이 그녀의 곁에서 맴돌았다.
마쓰시타의 관심이 싫지 않았지만,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더 움츠려 들게 했다. 이런 요시코의 마음은 아랑 곳 없이 마쓰시타는 틈만 나면 부산으로 왔다. 교문을 나서면 마쓰시타가 기다리고 있는 날이 많아지고, 어느 순간 그녀도 마쓰시타를 기다리게 되었다.
반복되던 일들이 어느 날 중단되면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듯이 마쓰시타가 보이지 않는 날은 발길을 쉽게 떼지 못하고 교문 앞에서 서성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요시코는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마음은 온통 마쓰시타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해운대에 갔다. 전철 안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붐볐지만, 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넓은 해운대 백사장에는 데이트를 나온 젊은이들이 간간이 눈에 띌 뿐, 그 어느 누구도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넓은 백사장은 마치 두 사람만을 위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힘이 외부의 장애는 장막으로 가려주지만, 세상의 잡다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요시코와 마쓰시타가 만난 시점은 일제 강점기가 마지막에 다다른 때이다. 일본의 힘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민족을 강제 점령하고 있는 국가의 국민을 사랑한다는 데 따른 심리적인 고통은 피하기 어려웠다.
마쓰시타에 대한 마음이 깊어갈수록 요시코의 고민도 깊어갔다.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겄노. 맨 날 마음은 지 멋대로인 기라. 만나고 온 날은 내가 미쳤제 싶다가도 자고 나면 보고 싶은 기라.” 자신의 마음을 자기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날들이 많아지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만남에 불안감도 커져갔다.
사랑, 고통의 시작
일본 본토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징용이 심해졌기 때문에 마쓰시타는 부모의 뜻에 따라 울산에 계속 머물렀다. 마쓰시타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고 있었기에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마을을 돌고 돌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요시코만 보고 요시코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한숨은 나날이 늘어 갔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벌어지는 전쟁 때문에 현실의 삶은 고단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적대감정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자신들의 삶 자체가 위협받는 한국인들의 분노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일본인들의 집념은 크고 작은 사건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요시코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단단해져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의식은 때때로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여 무모한 용기를 준다. 주변의 염려와 위협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매일 만나서 둘만의 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요시코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축하받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었지만, 드러낼 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을 만났을 때 초월적인 의지력으로 헤쳐 나가기도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당시의 요시코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 달마다 있던 것이 없자 어머니는 졸도할 지경에 이르고, 요시코는 아침만 되면 집을 나섰다. 신산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뒷산에 가면 언제나 마쓰시타가 있었다. 둘은 점점 말을 잃어갔고, 마쓰시타는 요시코가 안쓰러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오늘도 마쓰시타와 둘이서
남 모르는 고통을 안고
조용히 산과 들로 걸어가면
근심걱정에 싸여
눈에는 이슬이 맺혀
단풍잎만 바람에 휘날려도
눈물이 쏟아진다.
마쓰시타, 포켓에서
손수건 꺼내어 내 눈물을 닦아 주며
서로가 위로하고
정을 주며 정을 받고
둘이가 양손 굳게 잡고
우리의 따뜻한 깊은 사랑
변치 말자고 맹세하며 다짐하며
이 세상 끝까지 같이 가리라는
옛 추억이 다시금 떠오르네.
<첫사랑 2> 중에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60여 년을 가슴에 모아 둔 이야기를 시로 읊조리는 동안 병마가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지닌 얼굴이 회한으로 일그러졌다. 눈가에 맺히는 눈물이 지난 세월의 고통을 말해주고 있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기억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지난 60년의 세월 속에서 요시코는 마쓰시타에게 잊혀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할머니에게는 요시코가 그대로 살아 있어 그때의 고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잊지 못하기에 기억 속에 갇혀 있던 고통이 지금 내 앞에서 한 편의 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랑, 멈춰버린 시간
<이 여자 이숙의>의 이숙의는 남편 박종근이 빨치산 토벌군에 의해 사망했음을 알았고, 죽은 남편 때문에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미결수가 되기도 했으며, 경찰서로 불러 다니는 고초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의연했고, 말없이 그 고통을 삼켰다. 그녀가 의연할 수 있었고 교사로서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사망을 확인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와 달리 할머니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쓰시타가 자신을 잊었는지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지, 현해탄 너머 일본 땅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등 알아야 할 사실들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에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나올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할머니는 ‘시’라는 출구를 통해 요시코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과거의 시간에 사로잡혀 있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동화가 있다. <말하는 나무의자와 두 사람의 이이다>란 책에서 나무의자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날 “곧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침에 집을 나간 어린 이이다를 20년 동안 기다린다. 나무의자는 할아버지가 이이다를 위해 만들어준 이후 언제나 이이다와 함께 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나무의자는 우연히 오래 된 폐허 같은 집을 발견하고 들어간 4살의 유우꼬를 보고 이이다가 외출에서 돌아 왔다고 여긴다. 마치 아침에 나갔다가 오후에 돌아온 이이다를 맞이하듯이 나무의자는 유우꼬와 이야기를 나눈다. 어린 유우꼬는 예전의 이이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무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나무의자와 소꿉놀이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논다. 오후가 되면 마당의 분수가 있는 연못 가에 둘이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어느 날부터 유우꼬는 마치 자기가 이이다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유우꼬를 염려한 오빠 나오끼는 나무의자에게 유우고는 이이다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무의자는 나오끼에게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유우꼬를 깊이 감추려고 한다. 유우꼬를 위해 나오끼는 이이다를 찾다가 리쯔꼬를 만난다. 진짜 이이다가 분명한 리쯔꼬는 그러나 이이다란 어린 소녀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나오끼에 의해 유우꼬가 자신이 기다리던 이이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의자는 부서지고 만다. 의자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안고 할머니의 집을 떠나 온 어느 날, 나오끼와 유우꼬는 리쯔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리쯔꼬는 자기가 이이다였으며, 원폭에 의해 할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으로 기억을 상실한 상태에서 양부모에게 발견되어 리쯔꼬로 살고 있었으나 이제는 기억이 돌아왔노라고 했다.
리쯔꼬는 부서진 의자를 들고 와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던 그 의자로 다시 만들어 자신의 침대 옆에 놓아두고 “내가 이이다야. 알겠니? 너에게 조그만 엉덩이를 얹고 앉았던 이이다란 말이야.”라고 매일 말을 건네고 있지만 의자는 침묵만 지킨다고 편지로 알려 왔다. 아침에 나간 이이다가 곧 돌아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나무의자는 2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기억 속으로 홀로 묻혀버린 그 이름, 이숙자
기억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기억하는가’는 ‘내가 어떤 일을 경험했는가’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요시코는 마쓰시타와 연관될 때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지닌다. 할머니의 80여 년의 생애 중에서 요시코의 기억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한센병을 앓는 이숙자라는 여인만 남는 것이다.
이숙자, 할머니의 법적인 이름이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으니 봐 달라고 부탁하신 공과금 고지서에 찍힌 이름이다.
“이숙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기, 그기 그란께 해방되고 고칠 때 제대로 안 고쳐서…”
그날 이후 할머니는 한 번도 이숙자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 이름에는 마쓰시타를 처음 만났던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기억 속에만 간직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한센병 이전의 할머니의 고운 모습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이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이 이름 짓는 일이다. 이름을 단순히 한 사람을 호명하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애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작명소가 있으며,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학식이 있는 사람을 찾거나 돈을 들이는 데는 호명 이외의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존재를 의미한다. 내가 누군가를 부를 때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름을 쉽게 알려주지 않거나 타인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간혹 유명인들의 이름을 알더라도 그 사람 자체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이름은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상징적 호명의 도구일 뿐이다.
마쓰시타는 할머니를 ‘숙자’가 아닌 ‘요시코’로 불렀다. 마쓰시타가 알고 사랑했던 여인은 요시코였지 숙자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감추고자 하는 ‘이숙자’라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 경험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울산에서 부산으로 다녔던 고녀 시절, 마쓰시타와의 첫 만남 등 할머니의 생애에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시간들이 이숙자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숙자’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기 전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이름을 거부하고 요시코라고 스스로 부를 때 밝아지는 얼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채 2년이 되지 않는 사랑의 기억이 나머지 자신의 생애와 견주어서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일까. 그리고 나에게 말한 ‘이말란’이라는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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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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