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투스트라, 역사법칙에 내기를 걸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너 이놈, 자거라투스트라야, 감히 내기를 걸다니?
아, 니체 아부지, 어떻게 아셨어요?
이놈아, 니가 어제 밤 술 먹고 들어와서 중얼거리지 않았더냐? 박근혜가 대통령되면 니가 백만 원 따게 되었다고 히히닥거렸지.
아, 그랬나요? 맞아요. 어떤 후배의 농간(?)에 넘어가서 그만 내기를 걸고 말았죠? 박근혜 떨어지면 그 백만 원 가지고 잔치 벌리죠 뭐.
아이고, 이 멍청한 놈, 그런 내기는 일종의 패배주의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게 진짜 죄악이지. 근데 자거라투스트라야, 박근혜가 된다는 근거라도 확실하냐?
니체 아부지, 제가 철학을 했지 어디 점술을 배웠겠어요? 그러니 그걸 어찌 제가 알겠어요. 다만 거꾸로 생각한 거죠. 지금 박근혜의 대항마로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 한심해서 말이죠.
자거라투스트라, 너보다야 더 한심하겠니?
저야 공부하는 사람인데 비교가 되나요? 하지만 그들은 어떤 정치적 비전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그게 너무 한심해서 제가 그런 내기를 한 거죠.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도대체 정치란 무엇입니까?
야, 이놈, 내가 공자님이냐. 그리고 니가 무식한 자로(子路)이냐? 그런 식으로 묻게? 하지만 내가 생각해 본 것이 있는 데… 말하면 니가 알까?
제가 서자이지만 그래도 아부지 아들 아닙니까? 말씀 해보세요.
니도 알겠지만 다윈 선생한테 내가 배웠지만, 진화란 일종의 자연선택이 아니냐. 자연은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 상황이 변화하면 거기 맞는 변이를 선택해 지속하려 한다면서? 나머지 변이는 더 이상 쓸 데 없으니 진화의 시궁창이 속으로 내 던져지고 말지. 마찬가지 아닐까? 정치라는 것도? 정치가들도 다양한 변이를 미래의 프로그램으로 준비하고 있겠지. 그런데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그 중의 하나가 선택될 거야. 그러면 나머지는 정치인들은 전부 역사의 불구덩이에 내던져지고 말지. 정치가들은 자신이 선택될지를 모른 채 하나의 변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역사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불쏘시개에 불과한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겠지. 그게 정치가의 ‘운명’이 아닐까? 정치가는 그런 운명을 짊어지는 운명애적 존재가 아닐까? ‘아모르 파띠’, 그게 내가 늘 부르짖던 것이잖아.
아부지 말씀은 꼭 헤겔이 역사이성과 영웅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과 같네요. ‘이성의 간지’라는 말씀이죠? 하지만 정치와 자연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마르크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에 우여곡절과 전전반측이 있지만 어떤 큰 흐름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는 이런 큰 흐름을 미리 예측하고 바로 그 흐름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요? 소위 역사의 전위라는 말이죠. 그런 예측적인 선택을 정치가의 ‘모럴’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의 패배는 운명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니,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겠죠.
정치는 모럴이 아니야, 운명이라는 거지.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는 아직도 역사의 법칙이란 게 아직도 있다고 믿느냐? 마르크스의 법칙이란 19세기 역사를 통해 포착한 것이지. 그때는 소위 세계라는 것이 없었어. 그저 민족국가만이 있었지. 자본주의의 민족국가적인 발전 단계였던 거지. 그런데 오늘날 21세기,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있는 이 단계에서, 이제 그런 역사법칙이란 의미 없지 않을까?
세계사가 성립한다고 역사법칙에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네요.
거 봐라. 니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더냐.
아, 아부지, 저도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해 보았어요. 아부지 말이 이런 거죠? 제가 설명해 볼게요. 국제자본은 일국의 자본주의를 넘어선 국제적 차원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거죠. 이런 구조 속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지구적 차원에서 분산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한쪽이 문제되면 다른 쪽에서 문제를 풀어가면서 전체적으로는 국제자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킨다는 거죠?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에 가까운 주장이시죠?
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주장을 한 것은 아니고, 하여튼 그런 거야 IMF를 겪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냐? 그런 단계에서 역사법칙 운운하다니 자거라투스트라야, 어는 어느 시대 사람이냐? 나보고 19세기라 하는데, 니야 말로 19세기가 아니냐?
아부지, 곰이 롤러코스트를 타고 재주를 피운다더라도 언젠가 떨어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건 필연적인 사건이죠. 마찬가지로 국제자본이 두 손으로 5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을 하더라도 언젠가 하나는 놓치고 말죠. 5개 돌리다가 4개를 돌리더라도 국제자본이 돌아야 가겠지만, 한 개 떨어뜨린 공은 어떻게 되나요? 거기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저는 지난번 중동에서 일어난 자스민 혁명이 바로 그런 거라고 보아요. 그 중동이란 것이 국제 자본이 돌리던 공 중의 하나였는데, 그만 떨어뜨렸던 거죠. 그 사이에 혁명이 터졌구요.
글쎄다, 그게 무슨 혁명인지 모르겠는데, 자스민 혁명이 성공한 이집트에는 지금 군부가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사살한다 하더라.
아부지, 저는 그저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한 거지, 반드시 성공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잖아요.
자거라투스트라야, 역사법칙이란 구시대 유물을 고집하려고 너무 어려운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냐? 그냥 역사에 법칙이 없다고 보면 아주 단순하잖아. 그리고 모든 이론이란 것이 단순한 거구. 역사에 법칙이 없다면 나쁠 게 무엇이 있니? 니들 철학자들이 먹고 살게 없어서 좀 안 되긴 했지만, 니들 철학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우리가 머리가 아파야 하겠니?
아부지, 역사법칙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법칙이 없다면, 무엇이 역사를 지배하겠어요? 결국 힘이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힘이 정의죠.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요? 언젠가 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게 바로 종말론이라는 거야. 니들이 역사가 심판해 줄 거라는 거지. 이 세상의 부정의와 고통과 학살을 신 대신 역사가 심판한다는 주장이 바로 ‘역사법칙론’이라는 주장의 실질적인 의미가 아니냐? 역사에 종말은 없어. 그걸 모르겠니? 그건 기독교가 뿌려놓은 아편이지. 신이 아편이 아니야. 종말이 온다는 믿음이 아편이지.
아부지, 니체 아부지, 아부지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아편이 아닐까요? 아부지의 말씀은 절망이죠. 우리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망이라는 아편이죠. 아부지, 사르트르는 잠들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잠 든 척 하는 거라고 말했대요. 실제로 잠 든 척하다보면 잠 들 거라는 거죠. 우울증 환자는 세상을 우울하게 보기 때문에 더욱 더 우울하게 된다고 하죠. 실제로 그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 아닐까요? 역사에도 법칙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 다면 실제로 역사에 법칙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이 존재를 만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 놈아, 그런 놈이 왜 진다는 내기를 했단 말이냐? 진다고 믿는다면 결국 지게 될 거 아니냐? 그러니 니가 패배주의를 선동했다 하는 거야.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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