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3)[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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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장애의 벽을 허물다

일주일이 지나도 할머니의 두통은 지속되고 있었다. 대화 중간에 말을 끊고 침묵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침묵하는 동안의 할머니는 마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통의 실체를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두려워하는 듯했다. 60년 동안 할머니의 내면에만 머물렀던 고통의 실체는 크고 단단한 옹이가 되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옹이를 할머니는 ‘몸 안에 묵어 있던 이거’라고 표현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이거, 묵어 있던 거 몸 밖에 꺼내어 뭐할 낀고 싶다.”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몸 밖으로 꺼내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혼자 고통을 되새기며 보내는 동안 몸과 마음은 경계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몸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몸이 마음의 장애가 되어 자신을 속박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장애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나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을 때 고통은 시작된다.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속박했던 장애의 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과 이러한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마음 사이의 갈등은 할머니의 내면을 분열시키고 있었다. 갈등에 의해 할머니는 마음을 한 군데에 두지 못하고 계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자신의 삶의 행적을 차마 말로 옮기지 못하고 망설일 때에 시는 공감의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다.

“내 죽으모 그거는 인자 남가 놓고” 갈 수 있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면의 고통을 드러낸 시를 죽은 뒤에 남길 수 있는 자기의 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할머니에게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제 그 고통을 남겨 놓겠다는 말은 자기를 외면하고 소외시켰던 세계에 자기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하나의 징후이다.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회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취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할머니의 삶을 지배하던 고통의 근원은 몸의 질병과 그 질병으로 인한 삶의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고통의 실체를 시를 통해 드러내는 것은 삶의 장애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징후이지만, 그 징후는 망설임과 갈등도 동반하고 있음을 첫 번째 시에서 알 수 있었다.

고요한 이 밤

풀에 벌레들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심장을 울리네.

 

현해탄의 사랑이여

옛 추억의 첫사랑

– 내 전부를 바친 임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하염없는 눈물에

내 옷깃이 젖었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여름 밤> 전문

이 시에는 고통의 근원인 한센병에 대한 표현은 없고, 할머니의 고통이 단순하게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첫사랑 때문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연의 슬픔은 여름밤 풀벌레 울음소리와 초승달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전이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표현은 할머니의 내면세계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전이와 투사는 시를 쓰긴 했지만, 처음부터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다. 내면의 갈등은 가라앉지 않는 두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같은 한센병을 앓았던 한하운 시인의 시를 읽고 그의 삶을 궁금해 하는 것은 시가 할머니에게 단절되었던 과거의 세계로 다가가는 소통의 길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다가가다

할머니는 두 번째 시 <어머니>에서 60년의 세월 동안 결코 멈추지 않았던 사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한센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이듬해 큰병을 앓지도 않았고 시름시름 앓지도 않았지만 자리에 누운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는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입양시킨 후였다. 할머니는 “하늘과 땅 사이에 나만 남았지”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다섯 번째 시 <내 인생길>에서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노라고 했다.

어느 8월 15일

유난히도 밝은 달이었다

내 발걸음은 태화강을 걸어 가

강변에 우둑히 선

반구돌에 우뚝 서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

이것마저도 내 운명이 아니었는가

뱃놀이 나오는 사람들의

구제의 손길에 다시 살아났다.

<내 인생길> 부분

자신이 동네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채 물조차 마실 수 없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이자 태화강으로 몸을 던졌다. 자살은 세상과 단절되어 절대적인 밀폐의 상황에 놓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자기표현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과 한센병 발병이라는 현실에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이 불안이 극대화되자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관계를 통하여 전체를 구성한다.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전체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면 ‘자기’라고 할 수 없다.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은 하나의 종합이므로 관계가 없는 인간은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라는 정체성은 혼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있을 때 형성되는 것이다.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또 누군가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 주고 들어 주었더라면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극단적인 행동은 없었을 것이다. 자살은 할머니가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뱃놀이 나온 사람들에 의해 구조됨으로써 할머니는 또 다른 삶을 만나게 된다.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자기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며(<어머니>)” 살아야 하는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내 인생길>)” 인간이기에 “차라리 벼가 되었으면(<내 인생길>)”하는 자기 부정은 분노를 불러 온다. 그러나 분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의식 있는 자는 고뇌하며, 고뇌하는 자는 분노할 수 있으며, 분노는 절망과 달리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자신을 스스로 세우게 한다.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지워지고 싶지 않으며 인간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분노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분노에 의해 자기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마음의 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삶을 만나다

혼자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움막으로 찾아 왔다. 조금씩 이상 증후를 띠는 몸 때문에 할머니는 그 남자가 움막에 드나드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며칠을 계속 찾아와서 할머니로서는 구하기 힘든 ‘대풍유’같은 한센병 치료제를 건네주었다. 자신을 약장수라고 소개하면서 중매도 한다고 했다.

“이 동네 저 동네 소문이 난 기라. 한센병 걸린 젊은 처자가 혼자 산다고 옆 동네에서 들었다 카더라.” 끈질긴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지만, 혼자 움막에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더 컸다. 그 남자는 일본에서 한센병 전문의사가 와서 무료로 치료해주는 진료소를 차렸는데, 그 곳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제의도 했다.

할머니가 움막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도 아이도 떠났고, 할머니의 마음은 배고픔과 외로움과 불안감으로 지쳐갔다. 어쩌면 일본인 의사의 도움과 좋은 약을 먹으면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지금이라도 병이 나으면 마쓰시타와 아이를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에 그 남자를 따라 길을 떠났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 길을 잊을 수 없노라고 했다. “옷 보따리 하나 가슴에 안고 떠났제.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걷고 허름한 시골집 헛간에서 자고 또 걸었제.” 가도 가도 진료소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면 그 남자가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때만큼 자신이 한센병에 걸린 게 고마웠다. 겨울의 추위는 낡은 옷과 신발을 뚫고 할머니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할머니는 사흘째 되던 날, 문득 눈 속에 반쯤 묻힌 자신의 발가락이 더 이상 시리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내가 발가락이 동상에 걸렸다고 막 울었다. 그 놈은 삐죽이 웃더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가 밀려왔다. 더 이상 안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몸은 마음과 달리 그 남자를 따라갔다.

초가지붕이 서로 어깨를 맞댈 정도로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그 중 가장 큰 초가지붕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했다. 의사라고 소개하는 남자를 보는 순간 할머니는 눈이 쌓인 마당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의사의 엄지 발가락이 꺾어져 발이 몽탕했다. “속았제. 속은 기라. 그 놈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엉터리 약도 팔고, 나처럼 병이 얕은 처자나 없는 집 처자들을 속여서 집단촌에 넘기는 기라.”

의사라고 소개받은 사람은 자기는 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일본에서 학교 다니던 중 징집을 받았으며, 군 생활 중 잦은 구타 끝에 한센병을 얻었다고 했다. “김철수라카대. 핸섬하대. 친절하고, 예의도 바르고, 마이 배워서 이해심도 깊고….”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흔들며 오래 전의 상황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다.

할머니에게는 병을 고쳐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납덩이처럼 가슴을 누르는 아이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마쓰시타를 찾아가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할머니에게 그런 희망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집단촌이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각각 떨어져 다른 집에서 거처했다.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되었다. 그게 정부의 시책이었으며, 그 마을이 존재하기 위해선 모두가 말없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그 마을마저 없어지면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또 다시 산과 들을 헤매며 살아야 했다. 부부들은 낮에 일할 때만 서로 얼굴을 대하고 안부를 묻고 해가 지면 서로 다른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곳에서 할머니는 몇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잡혀 곤욕을 치루었다. 때로는 독방에 가두어 놓고 며칠씩 굶기기도 했다. 때로는 사는 게 싫어서 스스로 굶기도 했다. 마지막 탈출 시도 후, 갇혀 있는 방으로 김철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찾아왔다. “혼인하자카더라. 안 하면 인자 죽는 길 밖에 없다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하대. 거기서 사람 목숨 하나 사라지는 거는 장난이라.” 나라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그 곳의 법이 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할머니는 혼인했다. 혼인하고 나니 남편은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럴수록 할머니의 외로움은 깊어갔다. 병든 사람들과 마주 대하고 있으면 자신이 금방 무너질 것만 같았다. 눈 속에서 시린 줄 몰랐던 발가락이 하나씩 없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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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전호근 작 <회현동 계단>입니다.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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