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53-미적분은 정당한가(2)[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53-미적분은 정당한가(2)
1)
앞의 글에서 헤겔은 미적분을 정당화하는 개념으로 무한소나 무한진행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무한 개념 즉 진정한 무한을 설명했다. 진정한 무한은 두 정량 사이의 비례 관계이며, 타자를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며 질적인 크기라고 했다.
이런 무한량의 개념은 이미 양적 무한성을 다룰 때 헤겔이 설명한 것인데, 아직 이 무한량이 미적분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 설명은 주석 1의 후반부에 들어가서 구체적으로 소개되는데, 이에 앞서서 헤겔은 이런 진정한 무한성의 개념을 수적으로 표현하는 문제에 다시 골몰한다.
무한량은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헤겔에서 셈은 곧 새로운 수를 낳는데, 더하기 빼기는 정수에 머무른다. 곱하기에 이르면 이미 두 개 정량의 관계가 출현한다. 곱하기는 더하기로 환원될 수 있다. 3*4는 세 번씩 더하기를 네 차례 걸쳐 계속하면 얻어진다. 그러나 곱하기의 진정한 의미는 두 정량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3미터 길이를 폭으로 4미터 이동한 것일 수 있으며, 시간 당 3키로 속도로 네 시간째 달린 거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곱하기는 흔히 더하기로 환원되면서 두 정량의 관계는 감추어지고 마는데, 이 두 정량의 관계는 곱하기를 뒤집은 셈인 나누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누기는 두 개의 정량이 서로 관계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예를 들어 2/7이 그렇다. 두 개 정량의 차이와 동시에 관계가 빗금[/]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2)
나누기를 표현하는 분수는 두 개 정량의 관계라는 점에서 이미 무한량을 표현한다. 그러나 정수비로 환원될 수 있는 분수는 무한량을 은폐한다. 그것은 독자적인 하나의 정량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수비로 환원될 수 없는 분수가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무리수나 통약불가능한 수(예를 들어 원주율)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표현에 이르면 이런 분수가 무한량을 표현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무한량을 표현하는 두 개의 표현 형식을 비교한다. 이 두 표현 형식은 정수비가 되는 분수에서도 성립하지만, 여기서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정수비가 아닌 분수에서 그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후자의 측면에서 두 표현 형식의 차이를 살펴보자. 하나는 무한 계열[Reihe: 급수]의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분수 표현이다.
①: 2/7, 루트 2, 파이
②: 0.285714.., 1.141…, 3.14…
②의 표현 형식을 보면, 무한 계열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①을 개수[Anzahl]로 표현한 것인데, 이 경우는 정수비와 달리 결코 최종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다. 여기서 표현된 것은 진정한 전체에 비해 모자라며 항을 추가해서 필요한 만큼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항을 추가하더라도 모자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 규정은 당위에 불과하며 악-무한 또는 무한 진행을 표현한다.
헤겔은 이런 표현은 “질적인 규정성에 기초하는 것을 개수로 표현하려는 것”(논리학 재판, GW21, S. 244)이기 때문에 그런 모순은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라고 한다. 또는 표현하는 것은 정량이고 표현되는 것은 무한이니, 양사의 상이성 때문에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도달해야 하는 한계는 자기의 항 밖에 있다.
반면 ①의 표현 형식을 보면 이런 무한 계열로 표현되는 것이 일정한 합에 이미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합이 곧 분수며 루트며 파이다. 이런 표현 형식에서는 ②의 표현에서 드러났던 무한성이 다시 감추어진다. 그러나 ①의 표현 형식은 이 무한성이 사실은 두 개의 정량의 관계라는 점이 그것도 일정한 비례 지수 즉 질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런 표현은 무한량의 한계를 직접 표현한다.
“급수는 정립된 항 때문에 무한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즉 그 항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타자가 그 급수의 피안에 있기 때문에 무한하다.”(논리학 재판, GW21, S. 245)
“그러나 그 급수에 반해서 유한한 표현 또는 그런 급수의 합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결함이 없다. 그런 표현은 급수가 다만 추구하는 값을 완전하게 포함한다. 피안은 도주하는 것으로부터 소환되어서 그런 표현의 본질과 본질이어야 하는 것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동이한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45)
3)
헤겔은 여기서 스피노자의 무한 개념을 소환한다. 흔히 유한은 긍정이고 그 부정인 무한은 부정으로 규정되지만, 스피노자는 유한을 오히려 타자의 부정으로, 무한을 자기 긍정으로 규정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스피노자의 무한 개념이 진정한 무한성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이런 절대적 긍정성으로서 무한 개념을 예를 들어 두 개의 원을 통해 설명했다. 즉 서로 부등한 원이며 하나의 원이 다른 원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중심이 다르면서 서로 접촉하지 않을 때 두 개 원 사이의 공간은 일정한 크기를 지닌 것이지만, 그것을 수를 통해 표현하려 하자면 무한한 계열이 필요하니, 바로 이것이 현존하는 무한성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무한에 관한 무한을 급수나 집합으로 표상하는 것을 내버리고 무한히 현재적이고[gegenwaertig] 완전하다는[in sich vollendet] 사실을 위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스피노자는 전자를 상상의 무한으로 후자를 사유의 무한으로 부른다. 이 후자가 진정한 무한성[wirkliche Unendlichkeit]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서 자기 긍정으로서 무한성은 절대적 통일, 부동의 통일이며, 그런 점에서 타자를 매개로 해서 자기 내로 복귀한 자기 긍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고 한다.
4)
이상 헤겔은 진정한 무한성의 개념을 소개했다. 그 무한량은 두 개 정량의 관계로 이루어진다. 이는 수적으로는 분수로 표현된다. 이 분수적 표현을 곱하기의 표현 즉 함수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수적으로 같은 분수로 표현되더라도, 정수비로서 분수와 무리수와 같은 분수는 구분된다. 정수비는 곱하기로는 y=ax와 같은 함수로 표현된다. 여기서 정수비 a는 고정된 정량 즉 개수를 의미한다. 여기서 서로 함수 관계에 있는 두 정량은 “각자 고립적으로 독자적인 정량이며, 그 함수 관계는 그 수[정량]에 본질적이 아니다.” 즉 그 함수 관계는 두 정량에 대해 무차별하다.
물론 이 사이에도 관계가 있으며 그 관계는 곧 무한량이다. 그러나 그런 무한량은 무한성의 의미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관계 즉 비례가 그 정량에 외면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정수비에서 무한량은 운동에서는 등속운동과 같은 것이거나 비중(=무게/ 부피)인데, 여기서 미분은 제로라는 점을 생각하면 헤겔이 왜 무한량이 충분히 자기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말하는가가 이해된다.
반면, 등가속 운동 즉 Y=1/2at² 이나 포물선 운동 y²=x 는 이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함수의 양 측면은 특정한 정량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함수 자체가 고정된 정량이 아니라 가변적 크기다. 양자는 제곱 비례하며, 이런 제곱 비례는 비례를 이루는 두 정량과 외면적인 관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관계를 지닌다.
그러므로 여기서 관계하는 정량은 더는 독자적 정량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다른 정량과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고 따라서 타자에 대한 관계를 자기에 내재하는 것으로 함축하고 있다.
헤겔이 미적분을 정당화할 때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바로 정수비와 달리 제곱 비례는 관계하는 정량에 대해 내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함수 관계에 있는 x와 y는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즉 dy와 dx인데 이 표현은 사실 라이프니츠가 무한소, 미분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지만, 헤겔은 이를 y/x에서처럼 외면적 관계가 아니라 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dy, dx는 더는 정량이 아니며 단지 비례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논리학 재판, GW21, S. 251)는 것이다.
5)
무한량은 두 정량의 관계라 했다. 이 두 정량은 동일한 정량에서 서로 다른 정량일 수도 있고, 종류가 다른 정량일 수도 있다.
처음은 곱해진 것[또는 비례 관계에 있는 것]이 동일한 정량일 때다. 이때 두 정량의 사이는 무차별하며, 외면적이니, 이런 동일한 정량의 관계는 정수비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수비에서도 미적분이 성립하지만, 실상 여기서는 그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 미분은 0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정량이 다른 종류일 때 그 관계는 물질적 결합을 의미할 것이다. 예를 들어 원소의 상호침투적인 화학적인 결합이 이에 속한다. 이런 화학적 결합에서는 하나의 정량이 자기를 지양해서 완전히 다른 정량으로 이행하니, 이 역시 미분으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수학적 운동을 넘어선 물질의 구체적 운동에 속한다.
수학적인 미적분이 다루어지는 영역은 이 가운데 특히 동일 정량이 거듭제곱의 관계에 있는 경우다.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곧 거듭제곱 도는 자기 제곱이다. 이제 곱하기가 자기 제곱으로 발전하게 되면, 그 결과 새로운 정량이 출현할 때 이런 곱하기는 자기 자신을 제곱하는 것이니, 자기에 내면적인 것이며 이때 곱해진 것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비례가 아닌 제곱근의 관계에 있다. 이때 비례는 정수화할 수 없는 무한급수의 형태로 출현한다.
자기를 제곱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길이를 길이로 곱해 면적으로 구하거나 면적을 면적에 곱해 부피를 구하는 것과 같은 운동이다. 물질의 운동 가운데 속도와 가속도, 운동 에너지 사이의 관계도 이런 거듭제곱에 속한다.(여기서 시간은 공간적 길이의 하나로 여겨진다)
“무한은 이런저런 정량으로서 지양될 뿐만 아니라 양 일반으로서 지양된다. 그러나 양적 규정성은 남는다. 그것은 정량의 지반, 원리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데 최초의 개념에 도달한 양적 규정성이다.”(논리학 재판, GW21, S. 251)
미분이 이처럼 공간운동이나 역학적 운동에 한정된다는 사실은 헤겔이 철학의 방법론으로 수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기피하는 까닭이 된다. 하지만, 헤겔이 수학적 방법이 양을 다루는 역학의 영역에서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양적인 것의 영역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은 곧 이런 수학적 방법 즉 미적분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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