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② –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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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1]

Max Stirner’s Philosophy Is Actually Worth Reading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은 실제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 ② –

이 글은 헤르만 둔커(Hermann Duncker, 1874~1960)의 글을 2024년에 훔볼트 대학교 사회비판센터 연구원 야콥 블루멘펠트(Jacob Blumenfeld)가 영역하고 이것을 다시 우리 말로 옮기면서 옮긴이가 주석을 단 것입니다.

옮긴이 박종성(한철연 회원)

 

  •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철학

어떤 사람은 ―이론뿐만 아니라 민중을 위한 과학,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예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실천은 또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교육과 지식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는 작품을 사람들에게 제공했습니다. 디츠출판사(the Dietz publishing house)에서 나온 다양한 역사서, 노동자 도서관Workers’ Library의 과학 및 경제 서적은 프롤레타리아가 ―그 책들을 손에 넣기만 한다면―이미 이른바 “고등 교육”으로 세례를 받은 부르주아지보다 지적으로 우월해질 수 있는 지식의 보고(寶庫)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지적 산물의 다양성을 감안할 때, 한 영역이 거의 완전히 지나쳐 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은 놀랍습니다: 철학! 사회주의자의 세계관은 철학에 기반을 둘 것을 요구하지 않나요? 이러한 필요성에 대한 느낌 때문에 당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오이겐Eugen] 뒤링Dühring[1]에 대한 논쟁[2]을 더 광범위하고 대중적 방식으로 수행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과학 혁명(revolution of science)은 그의 작업의 비판적 성격이 수반하는 것처럼 철학적 파편들을 하나로 묶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일에서 체계을 뽑아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한 체계를 만들려는 시도는 레오폴트 야코비(Leopold Jacoby)[3]의 『발전의 이념』(Idea of Development)[4]에서 착수되었으며, 그 중 1-2부가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작가의 죽음으로 인해 작품을 하나의 전체(a whole)로 확장하고 완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코비가 발전시킨 것은 어느 정도 자연 철학(philosophy of nature)입니다. ―그 자신의 직업은 자연 과학자(natural scientist)였습니다. 자연 과학의 부산물인 철학은 수많은 대중적 철학 논문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가설(hypotheses)의 다소 심각한 모호함은 철학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루드비히] 뷔히너의 『힘과 물질』(Force and Matter)[5]에서 일어난 것처럼 오래 전에 쓸모없고 입증되지 않은 그들의 이론들이 값싼 대중 판의 경노(channels)을 통해 노동 대중에게 스며든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왜 현대의 인생관은 자연 과학을 통해(via) 장거리 우회를 통해서만 발전되고 촉진되어야 할까요?

칸트학파의 인식론적 철학(노동자 철학자인 [조제프Josef] 디츠겐Dietzgen[6]은 그의 저서 『철학의 긍정적 결과』(Positive Outcome of Philosophy)[7]에서 여전히 이 철학을 고수하고 있음)은 자연 철학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연 철학 역시 심리적 토대를 찾는 새로운 철학적 접근을 위한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지평의 변화와 함께 철학자의 대상도 바뀌었는데, 이전에는 철학자의 대상이 관념론의 영혼(idealistic soul)에서 유물론의 육체(materialistic body)으로 넘어갔다면, 이제는 두 대상이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in oneself) 이러한 결합을 인식했기 때문에, “현실의 나”(realistic I)는 철학적 성찰의 출발점이자 대상이 되었습니다.

[헨리크Henrik] 입센(Ibsen)[8], [표도르Fyodor] 도스토옙스키(Dostoyevsky)[9], [리하르트Richard] 데멜(Dehmel)[10] 등의 현대 예술 작품에서 격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프리드리히 니체에서 가장 젊고 눈부신 대표자를 찾기도 했던 “나 철학”(I-philosophy)은 개인에서만 출발합니다. 전제 조건이 없다는 점, 즉 자신의 자기 지식(self-knowledge)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이 철학은 특히 노동자에게 적합합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안전(hide)을 시장에 내놓게 만든 자본주의 체제는 대학에서 자신의 나(ego)에 화려한 모자를 씌우는 부르주아 소년보다 훨씬 더 쉽게 그의 인격(personality)을 일깨워줍니다. 노동자가 존재를 위한 투쟁에서 풍부하게 수집하는 삶의 경험은 곧바로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worth) 또는 가치(value)[11]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일은 자신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자기 인격의 가치 또는 유산 계급(propertied classes)의 세계와 관련하여 그 가치(worth) 부족에 대해 쉽게 숙고하게(to reflections) 됩니다. 사회주의자 운동을 지탱하는 것이 대중의 각성된 자기의식(awakened self-awareness)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여기서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과 자기확신(self-confidence)은 상호 연관되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보다 자신이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폭력, 국가와 법, 재산과 가족에 대한 생각은 상속받지 못하고 재산을 빼앗긴(dispossessed) 프롤레타리아의 머릿속에 쉽게 자리 잡습니다. 그의 생각은 현상 유지(status quo)[12]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라는 신성한(hallowed) 기관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지만, 승리할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13]

 

이 나-철학의 가장 명확하고 심오한 구축자는 막스 슈티르너이며,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모든 생각하는 노동자의 손에 있어야 하는 책입니다.”

 

이 모든 사고방식은 “개인의 철학”과 평행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후자는 이미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개념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훨씬 더 힘들고 불완전하게 시도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치료는 체계의 전체 구조를 통해 개인의 관찰을 일깨우고 지원하며, 철학적으로 사색하는(philosophizing) 개인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통찰력과 전체상(overview)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큰 이점이 있습니다. 이 나-철학의 가장 명확하고 심오한 구축자는 막스 슈티르너이며,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모든 생각하는 노동자의 손에 있어야 하는 책입니다.

니체는 종종 슈티르너의 후계자라고 불렸고, 연대기적으로 볼 때 이에 반대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슈티르너는 니체보다 약 40년 전에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내용에 따르면, 슈티르너는 니체의 파편들(fragments)을 완성하고 종합하기 때문에 관계를 뒤집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학적 교사로서 슈티르너를 우리에게 가장 추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둘 사이의 큰 대조를 언급해야합니다.

니체는 귀족, 슈티르너는 평민(올바른 의미에서 평민을 뜻함)입니다. 니체는 문화(culture)에 지친 교양인(cultured)을 위해 세련되고 예술적 문체로 글을 썼는데, 이는 무한한 여가 시간과 이해를 위한 긍정적(positive) 지식을 전제로 하며, ―노동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어렵게 획득할 수 있습니다.

슈티르너는 편견과 환상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과 착취(exploitation)라는 수 세기에 걸친 노예 상태의 멍에를 떨쳐내야 하는 자기중심적 사람(egoist)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언어는 꾸밈없고 거칩니다. 그리고 그는 자유로운 시선(free gaze)과 자유로운 마음만을 전제로 합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감정과 프롤레타리아의 힘에 호소합니다.[14]

먼저 슈티르너를 읽어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독교와 1840년대의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긴 논쟁의 일부는 건너뛰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인민”(people), “자유주의”, “공산주의” 같은 용어는 역사적 맥락(historical context)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이미 50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곧 잊어버릴 것입니다.

부르주아지 발전의 역사, 교회와 국가, 법 이론 등에 대한 그의 발언에는 광범위한 통찰력이 풍부하게 담겨 있습니다. 빈곤(pauperism) 문제, 즉 그 시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그가 말한 내용은 294페이지에 나와 있습니다(하지만 아마도 몇 가지 예가 가장 좋은 통찰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국가들이 집단 빈곤을 없애야만 한다고 요구하였다. 나한테 그것은 국가가 자기 자신의 머리를 베어서 자신의 발 앞에 놓아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15]

 

그리고 더 나아가 p. 296:

집단 빈곤은 나의 무가치성이고, 내가 나를 이용할 수 없다는 현상이다. [282] 그 때문에 국가와 집단 빈곤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국가는 나를 내 가치에 도달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내 무가치함을 통해서만 계속 존재한다. 비록 국가가 나로부터 얻은 그런 소비는 오로지 내가 자식(proles)414(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을 조달하는 데 있다 하더라도, 국가는 항상 나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에, 다시 말해 나를 착취하고 철저히 이용하며, 소비하는 것에 여념이 없다. 그러니까 국가는 내가 ‘국가의 창조물’이길 원한다.

나로서의 내가 나 자신을 가치 있게 사용할(verwerte) 때, 내가 자신의 가치(Wert)를 나 자신에게 줄 때, 그리고 나 자신의 값을 스스로 만들 때, 그때만 집단 빈곤은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um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16]

 

이 시점에서, 불행하게도 오늘날 종종 결정적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요점을 다룰 수 있습니다.

슈티르너가 ―“아나키즘의 철학자”로 의심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철학에 대한 이러한 의혹에 대해 누구도 충분히 호되게 반대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누구에게나 이용당할(be exploited by)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슈티르너가 현대 사회주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빌헬름Wilhelm] 바이틀링(Weitling)과 [Pierre-Joseph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의 공상적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사회정치적sociopolitical 체제의 좁은 틀 안에 전혀 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the I) ―와 연합(the union)이기 때문입니다! 슈티르너 자신(315~318쪽)이 가장 생생한 색채로 그런 어떤 연합(union)의 파업strike을 묘사한 것처럼, 연합(The union)은 현대의 투쟁 조직인 노동조합(the trade union)의 한 유형에 지나지 않습니다![17]

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군주(monarch)로서 남긴 책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우리가 군주를 떠나는 책(un livre qu’on quitte monarque)라고 부릅니다. 글쎄요, 프롤레타리아트는 한 번쯤 주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역할을 위해서는 주인 의식(consciousness)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슈티르너를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큰 교훈이자 결실입니다.

모든 자유는 본래—자기해방(Selbstbefreiung)이라는 말을, 다시 말해 내가 내 자신의 자기소유성(Eigenheit)을 통해 얻는 자유만큼만 나는 자유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한다. 아무도 사람들의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양같이 온순한 사람들한테 무슨 쓸모가 있는가? 그들은 계속 우는소리를 한다.[18]


[1] 카를 뒤링(독일어: Karl Eugen Dühring, 1833년 1월 12일 ~ 1921년 9월 21일)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학을 배운 다음 사법 실무를 수습하던 중에 실명하였다. 1864년에 베를린 대학의 철학, 경제학 사강사(私講師)가 되고 눈먼 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과거의 거의 모든 철학과 기독교에 반대하여 일종의 유물론인 ‘현실철학’을 제창하고 과학과 인류의 변혁자로 자처하였으며, 또한 반유대주의자였다. 1870년경부터 사회주의를 표방, 파리 코뮌을 찬미하는 진보파였으나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였다. 1877년에 사강사 직에서 쫓겨나자 대학 내외에서 강력한 뒤링 지지 운동이 일어났다.

[2] 엥겔스는 1870년대 후반 <반뒤링론>이라는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은 독일 사회주의노동자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오이겐 뒤링의 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뒤링이라는 이름 또한 엥겔스의 저작으로만 역사에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오이겐 뒤링의 사상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당대 독일의 주요 지식인조차 확고한 지지를 표방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뒤링은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표방한 사상가였다. 엥겔스의 <반뒤링론>은 공상주의적 사회주의가 만연한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을 과학적 사회주의를 통해 현실화하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도가 담긴 책이다. 지금은 이름조차 낯선 뒤링이라는 엉터리 사상가 한명을 저지하기 위해 엥겔스와 마르크스라는 두 대가는 친히 전장에 나섰다.

[3] 레오폴트 야코비(Leopold Jacoby, 1840- 1895)는 독일의 사회주의 시인이었습니다.

[4] 야코비가 쓴 Die Idee der Entwickelung, Teile 1-2는 라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진화와 발전Entwicklung의 개념을 다룬 철학적 논문이다. 저자는 생물학, 역사,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화론의 개념을 탐구한다. 그는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발된 다양한 이론과 접근 방식을 설명합니다. 야코비는 또한 이 과정에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과 인간의 행동을 통해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조명합니다. 이 책은 발전 철학Philosophie der Entwickelung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이 분야의 고전으로 간주됩니다.

[5] Kraft und Stoff는 인류에 대한 광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뷔히너는 물질의 불멸성과 물리적 힘의 최종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루트비히 뷔히너(Ludwig Büchner)의 유물론은 독일 자유사상 운동 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881년에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자유사상가 연맹 ”(Deutsche Freidenkerbund)을 창설했습니다.

[6] 페터 조제프 디츠겐 (Peter Josef Dietzgen, 1828- 1888)은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 마르크스주의자 , 언론인이었습니다.

[7] https://www.marxists.org/archive/dietzgen/1887/positive-outcome/index.htm, 이 책은 1887년 출간되었다.

[8] 헨리크 요한 입센(노르웨이어: Henrik Johan Ibsen, 1828년 3월 20일 ~ 1906년 5월 23일)은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극작가 중의 하나로, 근대 시민극 및 현대의 현실주의극을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따라서 그를 “현대극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9]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러시아어: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문자 개혁 이전: Ѳедоръ Михайловичъ Достоевскій, 영어: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옙스끼, 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는 러시아의 소설가이다.

[10] 리처드 페도르 레오폴트 데멜 (Richard Fedor Leopold Dehmel, 1863년 11월 18일 ~ 1920년 2월 8일)은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였습니다.

[11] worth는 value와 바꿔 쓸 수도 있지만 worth는 주로 인간의 정신으로 느낄 수 있는 가치를 말함: Few knew his true worth. 아무도 그의 참 가치를 몰랐다. value 효과상의 가치, 중요성, 또는 금액으로 환산되는 가치: the vɑlue of experience 경험의 가치〔중요성〕.

[12] 기존의 사회구조, 가치관, 체제 등을 현재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13] “그러나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어떤가? [126]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자신의 ‘아무것도 없음’을 위해 국가의 보호가 필요로 하지 않다. 국가의 보호는커녕, 피보호자에게서 저 국가의 보호를 빼앗는다면, 그는 이익을 얻을 것이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 180쪽.

[14] 『유일자와 그의 소유』, “노동자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언젠가 그들이 엄청난 힘을 철저히 자각하고 그 힘을 사용하게 되었다면, 아무도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 그들은 동맹 파업을 하고,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향유하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것이 여기저기에서 불쑥 나타나는 노동 불안의 의미이다.” 182쪽.

[15] 『유일자와 그의 소유』, 390쪽. 독일어본은 280쪽이다.

[16] 『유일자와 그의 소유』, 393쪽. 독일어를 병기한 것은 슈티르너의 글쓰기 특징을 살히고자 한 것이다. 그는 흔히 유사한 단어를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조롱하곤 한다.

[17] 『유일자와 그의 소유』, “노동자는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언젠가 그들이 엄청난 힘을 철저히 자각하고 그 힘을 사용하게 되었다면, 아무도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 그들은 동맹 파업을 하고,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향유하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것이 여기저기에서 불쑥 나타나는 노동 불안의 의미이다.” 182쪽. 이 밖에도 『슈티르너 비평가들』에서 그리는 연합도 참조하면 좋습니다.

[18] 『유일자와 그의 소유』,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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