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44-정량과 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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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44-정량과 수

1)

형이상학은 세계의 가장 일반적인 원리를 다룬다. 칸트의 선험철학을 원리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더욱 발전하겠다고 확고하게 선언했던 헤겔은 세계의 일반 원리를 사유의 근본 범주(또는 판단 형식)로부터 끌어내려 했다.

문제는 양적 범주다. 양적 판단 형식 즉 양적 범주가 세계를 일반적으로 구성하는 원리가 될 수 있는지, 요즈음 철학은 많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원초적인 세계는 질적 개별자의 세계가 아닌가? 양적 범주란, 세계 밖에서 사유하는 인간의 주관적 산물이 아닐까?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개별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지속적이어야 한다. 명멸하는 우연적인 것에는 이런 개별성조차 없고 그저 있었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할 뿐이기 때문이다. 찰나생 찰나멸, 이런 세계에서는 사유한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속하는 것이 있는 한, 이 지속성은 서로 대립하는 두 성질이 자기 관계하는 것 즉 대자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럴 때 대자 존재자들의 상호 관계는 양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양적인 세계의 존재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에서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원자론자의 원자와 공간의 개념을 기초로 한다. 원자와 원자의 관계가 곧 양적인 관계이며, 이 양적인 관계에서는 오직 연속성과 분산성이라는 두 가지 관계밖에 없다. 원자와 원자는 동일한 대자 존재의 관계이니 연속적이며 그러면서도 이 관계 맺는 것이 서로 독자적인[fuer sich] 것이니 분산적이다. 연속적이라는 점에서 물질적인 것이며, 분산적이라는 점에서 공허로서 공간적인 것이다. 물질과 공간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지만, 서로의 이면에 떼어낼 수 없이 붙어있다.

2)

양적인 관계야말로 수학적 관계의 토대가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이 양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피타고라스의 수의 세계도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양적인 것과 수적인 것은 다르지 않을까?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 정량이 나오고 정량에서 다시 수가 나온다고 한다. 양적인 것은 대자 존재의 연속과 분리라는 관계를 말할 뿐이다. 그것은 얼마나 큰가 하는 크기 규정을 갖지 않는다. 정량은 이런 양적인 것이 일정한 크기 규정을 지니게 된 것을 말한다.

이미 양적인 것은 크기 규정을 지닐 수 있다. 그것은 동일한 대자 존재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대자 존재는 반복하는 만큼의 크기를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양적인 것에서 크기 규정은 다만 가능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특정한 크기를 지니려면 다른 것과 비교되어야 한다. 즉 잣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길이는 미터를 잣대로 하고, 무게는 그램을 잣대로 한다. 그러나 미터나 그램과 같은 잣대는 주관적으로 선택된 임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든 임의적으로 선택된 잣대를 기준으로 반복을 통해 일정한 크기가 규정된다. 이렇게 규정된 특정한 크기가 곧 정량이다.

정량은 반복되면서 이미 수적인 체계를 갖지만, 아직 수는 아니다. 그것은 가능적인 수적 체계다. 이 정량이 수가 되려면, 일정한 잣대가 지닌 수적 관계가 추상돼야 한다. 그렇게 추상된 수적 관계가 곧 수를 이룬다.

“정량은 일단 규정성이나 한계 일반을 지닌 양적인 것인데, 그것이 완전하게 규정되면 수다.”(논리학 재판, GW21, S. 193)

정량과 수의 관계는 마치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과 화폐의 관계와 같다. 화폐는 상품의 하나다. 어느 상품이 화폐인가 하는 것은 주관적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역사적 발전을 통해 어떤 상품이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화폐로 선택되면서 화폐가 출현한다. 이 화폐는 상품이 지닌 교환가치의 비례 관계라는 수적 체계를 의미할 뿐이다.

정량과 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정량을 측정하는 잣대는 주관이 임의로 선택한 것이다.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선택된 대표적인 잣대가 곧 수다. 이 수는 정량의 비례 관계를 언표하는 수단이 된다.

3)

이제 수 개념에 관한 플라톤이나 러셀의 주장을 헤겔의 사유와 비교하여 살펴보자. 19세기 심리주의는 수를 더하거나 빼는 것과 같은 사유의 활동에서부터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런 사유의 심리적 활동은 경험적이고 우연적이지만, 수적 질서는 객관적이고 필연적이니, 이런 심리주의는 수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수를 플라톤적인 이데아에서 끌어내거나, 수를 논리로 환원하려는 논리주의가 등장했다.

우선 수에 관한 플라톤적 설명은 문제가 있다. 수는 자주 이데아와 같은 초월적 존재를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기하학적 크기도 일종의 수라고 할 수 있는데, 기하학적 질서야말로 플라톤이 이데아의 표본으로 설명해 왔던 것이 아닌가? 수가 이처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 자연의 질서 속에 수를 적용한다는 것은 이 자연이 수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데아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창조주 신은 일단 제쳐 두자. 창조주는 굳이 이데아의 모범에 따라 세계를 창조할 필요는 없다), 자연이 초월적 이데아를 따르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 데미우르고스를 인정할 수 없다면, 자연 속에 수적인 질서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만큼 자연적인 것에서부터 수적인 질서가 발생하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헤겔의 생각은 그런 점에서 수가 자연에서 발생하는 과정을 잘 이해시켜 준다. 헤겔에서 수적인 것은 양적인 것에서 나온다. 양적인 것은 일정한 크기를 지닌 정량으로, 정량에서 다시 정량을 대표하는 수로 전개된다. 정량이 이미 수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만 수일 뿐이다. 수도 하나의 정량으로서 다른 정량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선택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에서 상품에서 화폐가 나오는 과정과 같다.

4)

이번에는 현대 수 이론을 대표하는 러셀의 주장을 살펴보자. 러셀은 수를 집합의 집합으로 정의했다. 쌍으로 이루어진 것들의 집합, 예를 들어 {신발, 손, 발, 귀 등등}.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두 번째 손가락(검지, 둘)이다. 셋으로 이루어진 집합도 있다. {솥의 다리, 삼원색 등등.} 이것을 대표하는 것이 세 번째 손가락(중지, 셋)이다. 이처럼 어떤 집합을 대표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집합 즉 {둘, 셋, 넷… 등등}이 곧 수이다.

러셀의 수 개념은 간명하기는 하지만, 이 집합의 집합을 통해 수의 진정한 개념이 정립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러셀의 주장은 헤겔이 이미 말한 것처럼 수가 정량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말에 불과하다. 그는 수로 사용되는 언어가 어떻게 해서 수적 질서를 의미하게 됐는지를 말할 뿐이다. 이를 통해 수가 지닌 기본적인 속성 즉 수의 연속성과 분산성은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집합의 집합으로서 수 개념은 정의 속에 이미 수를 전제로 한다. 즉 ‘쌍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나 ‘셋으로 이루어진 집합’이라는 개념이 이미 쌍이나 셋이라는 수 개념을 포함하니, 정의될 것을 정의 속에 전제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더구나 이런 수 개념으로서는 수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연속성과 분산성이라는 속성을 끌어낼 수 없다. 쌍을 대표하는 수 검지(둘)와 다섯 개짜리를 대표하는 수 즉 약지(다섯) 가운데 어느 것이 큰가 또는 둘과 셋을 더하면 다섯이 나온다는 수적인 질서가 나오지는 않는다. 검지가 약지보다 작은가? 또는 검지로 찌르고 다시 중지로 찌른다고 해서 약지로 찌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러셀의 수 개념은 집합 개념에 기초하는 것인데 집합 개념은 그 자체 모순을 포함한다는 사실이 이른바 러셀의 역설을 통해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사실 잘 살펴보면, 러셀의 수 이론은 수의 개념을 설명한다기보다 수로 사용되는 언어가 어떻게 선택된 것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5)

플라톤이나 러셀은 수 개념을 이성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헤겔은 양적인 것에서부터 수 개념을 끌어냈는데, 양적인 것을 규정한 정량은 다양한 것들로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정량적 존재자들을 대표하는 것이 곧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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