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72)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72)
C.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4. 동굴의 비유(514a-521b) – (IV)
3)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내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왜 온갖 난관을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논의(519c-521c)
[519c-521b]
* 나라수립자οἰκιστής로서 우리가 할 일은 앞에서 가장 큰 배울 거리라고 이야기한 것에 도달하도록 ‘가장 훌륭한 자연적 성향들을’τάς τε βελτίστας φύσεις 강제하는 것, 즉 저 오르막길을 오르고 ‘좋음을 보도록’ἰδεῖν τὸ ἀγαθὸν 강제하는ἀναγκάσαι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가서 충분히 보고 나면 지금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그런 것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μὴ ἐπιτρέπειν. 즉 “거기에 머물며, 저 수감자들 곁으로 다시 내려가기καταβαίνειν를 원하지도 않고 변변치 않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그들과 수고πόνος와 명예τιμή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μηδὲ μετέχειν은 허용되어선 안 된다.(519c-d)
* 그러나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그렇게 할 경우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ἀδικήσομεν 것, 즉 그들이 더 나은ἀμείνων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데도 더 못한χείρων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지 반문한다.(519d)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법은 나라의 어떤 한 부류 γένος가 특별히διαφερόντως 잘 살게εὖ πράξει 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에 그런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즉 법νόμος은 설득πειθός과 강제ἀνάγκη를 통해서 시민πολίτης들을 화합시키고συναρμόττων, 각자가 공동체τὸ κοινὸν를 이롭게 할 수 있는 이로움ὠφελία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그것을 서로서로 나누어 주도록μεταδιδόναι 만든다.(519e) 법 자신이 나라 안에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향하도록 내 버려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법 자신이 나라의 결속σύνδεσμος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철학자가 된 사람들에게 다른 이들을 ‘돌보고 수호하도록’ἐπιμελεῖσθαί τε καὶ φυλάττειν 강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정의로운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다.(520a)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수호자를 양육하지 않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국가가 양육비를 들여 누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하게τέλειος 교육을 시켜 그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서 벌 떼들σμῆνος의 지도자들ἡγεμόνας이자 왕들βασιλέας처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520b) 그러니 각자가 차례로ἐν μέρε 나머지 시민들의 거처συνοίκησις로 내려가야 하고καταβατέον, ‘어두운 것들을 보는 데’τὰ σκοτεινὰ θεάσασθαι 익숙해져야 한다.συνεθιστέον. 익숙해지고 나면 그들은 아름다운καλός 것들과 정의로운δίκαιος 것들과 좋은ἀγαθός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τὸ τἀληθῆ을 본 까닭에 그곳 사람들보다 만 배나 더 잘 보게 될 테고, 각각의 영상들τὰ εἴδωλα이 어떤 것이며 무엇의 영상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깨어있는 상태οὐκ ὄναρ에서 다스려질 것이다. 오늘날 그림자를 두고 싸우는 사람들σκιαμαχούντων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나라가 그러하듯 결코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가 아니다.(520c) 그들은 마치 통치하는 일이 무슨 큰 좋은 일이라도 되는 양, 그와 관련해서 내분을 일으키고στασιαζόντων 있다.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즉 통치하려는 열망이 가장 적은 사람들’ᾗ ἥκιστα πρόθυμοι ἄρχειν이 통치하게 되는 나라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내분 없이’ἀστασιαστότατα 다스려질 것이 필연적이며, 그 반대의 통치자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그 반대이다.(520d) 그러므로 우리에게 양육 받은 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순수한 곳에서 서로 함께 살면서, 각자 차례가 되면ἐν μέρει 나라에서 ‘수고하는 일을 함께하길’συμπονεῖν 원할 것이다.(520d) 우리는 정의로운 자들에게 정의로운 것들을 명령하지만 그들 각각은 다른 나라의 통치자들과 달리 통치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불가피한ἀναγκαῖος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임할 것이다.(520e)
* 만약 통치할 사람들에게 통치하는 일보다 더 나은ἀμείνων 삶이 있다는 것을 자네가 찾아낸다면, 잘 다스려지는 나라가 실현가능ἔστι하게 될 것이다. 이 나라에서만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들’οἱ τῷ ὄντι πλούσιοι이 통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란 금으로 부유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부유해야 할 것으로 부유한 사람, 즉 ‘현명하고 좋은 삶으로’ζωῆς ἀγαθῆς τε καὶ ἔμφρονος 부유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만약 사적인 좋은 것들에 굶주린 거지πτωχός들이 공적인 일에서 좋은 것들을 낚아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일에 나서고 있다면, 그런 나라는 실현가능하지 않을οὐκ ἔστ 것이다. 그런 경우 통치하는 일이 싸움거리περιμάχητος가 될 것이고, 그러한 전쟁πόλεμος은 나라 안에서ἔνδον 벌어지는 내전이어서 그들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까지 모두 파괴할ἀπόλλυσι 것이다.(521a)
* 요컨대 ‘진정한 철학의 삶’τὸν τῆς ἀληθινῆς φιλοσοφίας 말고 정치권력을 낮춰 보는καταφρονοῦντα 삶은 없다. 통치하는 일에 나서는 사람은 그것에 대한 ‘사랑에 빠진 자’ἐραστής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애 경쟁자들οἵ ἀντερασταὶ끼리 싸움을 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해 가장 현명하고φρόνιμος, 또한 정치적인πολιτικός 명예τιμή와는 다른 명예를 누리며, 정치적인 삶보다 나은 삶을 사는 자들을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52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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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9c ‘변변치 않은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그들과 수고와 명예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은 허용되어선 안 된다.’ :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플라톤이 얼마나 사회 기득권자들의 수구적 행태를 혐오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수고와 명예를 절대 일반 시민 대중들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시민 대중의 힘을 알고 있기에 부와 권력, 언론과 교육 제도 등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자신들의 의식을 유포하는 방식으로 시민 대중들의 눈을 가리고 그들의 비판 정신을 마비시킨다. 제8권에서 플라톤은 피폐한 민주정 치하 일단의 대중들이 어떻게 소수 기득권자들의 선동에 의해 폭압적 참주정의 구현 주체로 이용당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행태는 20세기 나치즘, 파시즘의 등장을 거쳐 현재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대선을 앞두고 그 일단의 세력들이 단말마적 발악을 자행하고 있다. 불타협의 태세로, 시민들의 강건한 연대로 그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 참고로 여기서 철학자가 수감자로 언급된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수고’ponos뿐만이 아니라 ‘명예’도 포함되어 있고 그 명예의 그리스어 timē가 ‘존중’esteem과 ‘우러름’worship의 의미도 갖고 있다. 사소하지만 말 하나에서도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이 또한 단편적이지만 당대 일반 시민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 519e ‘환기시킨다.’ : 제5권 466a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가리킨다. 본 강해 참고
* 519e ‘설득peithos과 강제anagchē’ : 이 표현은 488c에도 나온다. 설득과 강제는 사람을 의도자의 목적에 따라 변화시키는 방편이다. 설득은 말logos을 통해 강제는 행위ergon를 통해 이루어진다. 행위는 제도와 법률의 집행은 물론 개인들의 폭력이나 거짓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설득으로 이루어지나 제도로서 강제의 측면이 있다. 도덕과 강제와 관련해서는 강해 본문 참고.
* 520a ‘강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게 부정의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 흥미롭게도 글라우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끌어들이고 있는 정의관은 제1권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제기한 정의관 즉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다. 그 정의관의 한계는 충분히 비판되었지만,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의 생각에 맞추어 설사 당대 상식적 정의관에 비추어보더라도 그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 520c ‘깨어있는 상태에서 다스려지는 나라’,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 : 전자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나라 후자는 타락한 정치가들이 다스리는 현실의 나라를 가리킨다. 현실의 나라임에도 ‘꿈속에서 다스려지는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실상이 아닌 영상들 즉 동굴 속 그림자 같은 것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520c-d 내분stasis(분쟁, 내란, 반목, 대립) : stasis는 <국가> 전편에 걸쳐 계층과 집단 또는 영혼의 상태로서 나라와 집단, 개인이 맞이하는 최악의 것으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351d-352a, 440b, 442d, 444b, 459e, 464e, 465b, 470b-d, 471a, 520c-d, 521a, 545d, 547a, 554d, 556e, 560a, 566a, 58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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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는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동굴 속 어둠을 빠져 나와 좋음의 형상을 본 후 그것이 얼마나 신적인 즐거움을 안겨 주는 일인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인간사에 마음 쓰고 싶지 않고 언제나 높은 곳에서 지내기를 열망한다.(517c-d) 그러나 철학자는 이제 수감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동굴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해있다. 나라수립자들은 철학자가 동굴 바깥 세계에서 동굴 속 수감자들과 수고와 명예를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만 고고하게 지내는 것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글라우콘은 ‘그들이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못하게 하는 것은 부정의한 일이 아닌지’ 반문한다. 그러면 이러한 반문에 대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어떤 대답을 제시하고 있을까?
* 519c ‘좋음을 보도록 강제하는anagkasai 것’ : ‘강제’와 관련한 표현은 짧은 이 문맥에서만 아래와 같이 네 차례나 나온다.[‘법은 설득과 강제anagchē를 통해서’(519e) ‘돌보고 수호하도록 강제anagchē’(520a). ‘통치하는 일을 불가피한anagkaios 것으로 여기고’(520e),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anagkazein(521b) 등]. 강제의 그리스 원어 anagchē는 ‘강제’의 뜻만이 아니라 ‘필연’, ‘불가피함’, ‘운명’의 뜻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때 anagchē가 포함하고 있는 강제의 범위는 도덕적 당위나 법률적 의무에서부터 형벌이나 처벌, 폭력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유념할 것은 플라톤이 철학자 또는 철학 교육과 관련하여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사회적 정당성에 기초한 도덕적 당위나 법률적 의무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 네 군데가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배의 비유(488b-489a)에서 ‘선원들(소피스트)이 선주(대중)에게 행하는 ‘강제’의 경우는 그와 다르게 바로 이어서 예시되고 있듯이 시민적 박탈과 벌금, 사형 등 외적인 강요와 폭압의 성격이 강하다. 위 두 경우는 같은 강제일지라도 자율과 타율의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정반대이다. 전자의 경우는 강제의 사회적 도덕적 정당성에 기초한 강제, 즉 내적인 동의에 따른 자율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는 내적인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당사자의 무조건적 수용, 즉 외적 강제에 따른 타율이 그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자율은 도덕적 실천의 기본 원리이다.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철학자가 동굴로 내려가는 일’이 본성에 따른 자발적인 것인지 강제에 의한 것인지가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자율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비록 동굴에 내려가는 일이 자신의 본성상 선뜻 반길 일은 아니지만 그것의 당위적 정당성을 배움에 따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고 그 강제를 내적인 동의, 즉 자발성과 강제를 공존시키는 자율의 방식으로 그 일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적 당위나 사회적 의무는 그 자체로 시민들 모두가 하나같이 선뜻 반기고 좋아하는 일은 아니다. 병든 부모를 모시는 일이나 나라를 지키려 군대를 가거나 세금을 내는 일 등을 즐거워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순순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까닭은 도덕적 본성에 따른 당위나 그것의 사회적 정당성을 인정하고 비록 힘들고 싫은 일이라도 그것을 자율적으로, 또는 최소한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원함(wollen)과 당위(sollen)는 분명 다르지만 최소한 공동체의 시민에게 그 둘은 도덕의 이름으로 법률의 이름으로 공존할 수 있다. 철학자에게 주어지는 강제도 이런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철학자는 그 공존을 누구보다도 기꺼이 그리고 쉽게 이루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 철학자가 동굴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 즉 통치 참여의 근거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본성과 배움 모두에 기초해 있지만 설명의 내용에서 보면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도덕적 당위성의 측면이 강조되고 어떤 경우에는 본성과 자질의 측면이 강조된다. 우선 전자의 측면에서 그 근거는 철학자도 시민 공동체의 일원인 한 법 준수의 의무 차원에서 제시된다. 법은 나라의 어떤 한 부류가 특별하게 잘 살게 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화합시키고 그들에게 이로움을 나누어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사실 플라톤은 이곳뿐만이 아니라 이미 제4권(420b)과 제5권(466a)에서도 “아름다운 나라가 지향하는 것은 나라에 있어서 어느 한 부류가 잘 지내도록 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데 관심을 갖는 것”임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름 아닌 시민을 돌보고 나라를 수호하는 일인 한, 그들은 법에 따라 통치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이상 국가가 지향하는 법의 정신뿐만 아니라 제1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라는 전통적 정의관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나라가 양육비를 들여 누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하게 교육을 시켜 그 자신과 나라의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나라의 수호자로 일하도록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에 대한 나라의 처사는 부정의한 것이 아니다.
* 플라톤은 이같이 사회적 법적 당위성 측면만이 아니라 본성과 자질의 측면에서도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해야 할 근거를 제시한다. 즉 이상 국가의 구성원들은 누구든 간에 자신의 본성과 자질에 적합한 일을 수행함으로써 나라의 안녕은 물론 자신의 행복을 구현한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아름다운 것들과 정의로운 것들과 좋은 것들에 관해 참된 것들을 본 까닭에 그 누구보다도 또 다른 나라의 그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만 배나 더 잘 볼 수 있다. 배의 비유에서도 플라톤은 배를 지휘하기에 적절한 참된 키잡이라면 ‘한 해와 계절들 하늘과 별들 바람들 그리고 그 기술에 합당한 온갖 것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게 필연적’이라고 말한다.(488d) 배를 거짓된 선원들에게만 맡기면 결국 배도 파도에 쓸려 난파하고 키잡이를 포함해 모두가 파멸한다. 요컨대 철학자들은 나랏일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이 나라 공동체를 살리는 길인지 무엇이 실상이자 진실이고 무엇이 영상이자 거짓인지를 탁월하게 분별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를 늘 깨어있는 상태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자신의 본성과 자질에 맞는 일을 가장 잘 해냄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타자들의 이익 즉 나라와 시민들의 행복도 함께 가져다준다. 이처럼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하는 것 즉 동굴로 내려가는 것은 수감자들을 무지와 불행으로부터 구출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자신의 행복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는 배움을 통해 통치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긴 하지만 좋음의 형상을 관조하는 삶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행복임을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훌륭한 사람들에게 통치는 부득이 감수해야 할 일이자 수고로운 일이기도 하다.(347c) 그래서 플라톤은 이들에게 통치를 맡기려면 벌로서라도 강제해야 한다고 말한다.(347a) 그리고 이때 벌zemia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통치를 당하는 것’(347c)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철학자에게 주어지는 벌의 성격이 비록 강제이기는 하지만 앞서 살폈듯이 수치를 두려워하는 철학자의 본성상 그들의 자율적 동의를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플라톤이 이 벌이 철학자들로 하여금 수치를 면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그것을 보상misthos의 부류에 넣는 것도 그 때문이다.(347a) 참고로 이 벌은 오늘날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자신보다 저열한 자들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경고하는 플라톤의 금언으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실제 <국가> 텍스트에서 플라톤이 경고하는 대상은 시민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그 인용이 비록 적확하지는 않더라도 플라톤의 현대적 적용 차원에서 민주주의 현실을 사는 오늘날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아무려나 통치하는 일은 분명 수고로운 일인지라 통치를 맡는 자들에게 보상이 있어야 하듯 철학자에게도 보상이 있어야 한다. 훌륭한 사람들조차 보상을 원하기 마련이다.(347a) 그러므로 나라는 철학자들에게 나랏일을 맡기되 그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통치 의무를 번갈아 가며 수행토록 해야 하고 통치자로서 의무를 마친 후에는 이들을 위한 기념물도 만들고 신과도 같은 분들로 모시고 철학자로서 복된 삶을 하나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540b-c)
* 그러나 통치자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더라도 ‘인간사를 떠나 고고하게 철학자로서 좋음의 형상을 관조하는 삶’ 이상의 것은 없다. 관조의 삶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 철학자들이 원하는 가장 행복한 삶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부득이하게 통치업무를 수행하지만 어떻게든 빨리 그 권력을 내려놓고 싶어 한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상 국가에서 철학자 왕은 나랏일에 가장 유능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원천적으로 권력에 대한 욕구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플라톤의 철학자들은 신적인 능력이라 할 만큼 정치권력에 초연할 수 있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인간의 권력의지와 관련하여 최소한 철학자의 경우 근본 전제부터 달리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통치자에 대한 가히 비현실적이라 할 정도의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은 그만큼 당대 현실 통치자에 대한 절망이 컸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목도한 당대 현실 국가의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모두 진실보다는 거짓에 매몰된 채 권력욕에 젖어있었고 그에 따라 통치 권력을 잡는 순간부터 나라와 시민들의 이익보다는 오로지 권력의 유지와 자기 이익의 보전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들에게 통치 권력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는 최대 방편에 불과했던 까닭에 그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은 비일비재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나라와 나라, 계층과 계층이 분열하고 개인과 개인이 반목하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통치하려는 열망이 가장 적으면서 동시에 깨어있는 상태의 사람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다. 통치자는 결단코 권력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달리 길이 없다. 그런데 제대로 길러진 진정한 철학자의 경우 그러한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관조의 삶이 진정 더 나은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정치권력을 능히 낮춰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권력보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들을 길러내서 그들로 하여금 나라를 수호하는 일에 나서도록 강제해야 한다.(521b) 그래야 나라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내분 없이’ 다스려질 수 있다. 현실국가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목표로서 그 이상의 것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정치체제가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 조건이자 원칙이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통치 권력자에 대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권력자들이 초래할 위험성에 대한 의심에 기초해 있다. 이점을 고려하여 굳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플라톤의 주장을 사람이 아닌 정치 원리로 바꾸어 말하자면 플라톤 <국가>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기초한 ‘지성의 정치’, ‘정치의 지성화’라 할 것이다. 플라톤이 오늘날 다시 살아나 시민 대중들의 집단 지성을 목도하였다면 <국가>의 목표를 대중들에 대한 철학 교육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 플라톤은 이곳에서 철학자가 통치에 참여해야 하는 근거를 다각적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철학자들의 관조의 삶과 통치자로서의 삶이 비록 대비적일지라도 훌륭한 삶으로서 상호 조화를 이루고 일치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제6권에서도 좋음의 형상을 인식한 철학자들은 단순히 실재들에 대한 인식과 관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본받고 삶에 구현하려고 하는 자(500c)이다. 지성이 좋음의 형상을 알고 있는 한, 다른 이들의 나쁨과 고통에 무관심하기는 불가능하다. 만약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좋음의 형상을 모르는 것이다. 좋음의 형상을 인식하는 지성은 그 자체로 부정의에 대한 고도의 분별력과 함께 타자의 고통에 대한 섬세할 정도의 감수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좋음의 형상을 인식한 철학자들은 그들 자신 자신을 형성함은 물론 공적으로도 타자 즉 대중의 덕을 구현하는 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다.(500d) 물론 배의 비유에서 보듯 철학자들이 다중의 광기에 둘러싸여 나랏일은커녕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 그들은 ‘폭풍우 속에서 바람에 밀려오는 먼지와 비를 피해 벽 아래에 대피한’ 것처럼 조용히 지내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비록 작지 않은 성취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철학자에게 최대의 성취가 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496e) 그곳에서 플라톤이 밝히고 있는 ‘철학자가 이룩하는 최대의 성취’란 다름 아니라 ‘철학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정체를 만나 자신도 성장하고 개인적인 것들과 함께 공동의 것들도 보전하는 것’(497a)이다. 요컨대 철학자는 나라에서 통치자로 참여하면서 자신들과 공동체의 보전을 위해서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그곳에서 철학자로서 자신의 개인적 삶도 더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이처럼 철학자가 동굴에 다시 내려가는 것은 자신의 본성과 배움에 부합하는 혼의 행복을 담보하는 일이자 공적으로는 나라를 수호하고 시민들의 이익과 행복을 돌보는 이른바 개인과 나라에서 상호상승의 덕을 실현하는 일이다.
* 철학자로서 관조의 삶과 통치자로서의 삶이 노정하는 갈등적 측면은 어쩌면 플라톤 자기 삶의 여정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곱 번째 편지>(324b-326b)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이 겪은 그와 같은 갈등들을 직접 토로하고 있다. 물론 플라톤은 종국적으로 좋음의 형상에 대한 깨달음을 토대로 그 두 측면의 조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지만, <파이돈>에서는 논의 주제의 특성상 ‘몸의 어리석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해짐으로써’(67a) ‘영혼 자체를 그것 자체로 가지기를 열망하는’(67e) 순수 관조의 삶이 크게 부각되어 있고 그와 달리 <국가>에서는 부정의한 나라를 정의로운 나라로 이끌어가는 실천적 삶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조차 배의 비유에서 선주와 선원들에게 무시 받는 참된 키잡이에 대한 소회를 통해 플라톤 그 자신 얼마나 관조의 삶을 소망하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496d)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철학자로서 결코 작은 성취는 아닐지라도 결코 최대의 성취는 아닌 것이다.(497a)
* 끝으로 철학자가 동굴로 내려가는 근거들과 관련한 논의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논의를 시작하며 철학자 자신은 자신의 변화 때문에 행복하다 여기지만 수감자들을 ‘불쌍히 여기는’eleein 장면(516c)이 그것이다. 이것은 동굴로 내려가는 근거에 본성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심정이 그 출발점으로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후에 제기되는 논거들이 대체로 그것을 뒷받침하거나 그로부터 연역되는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이곳에서 피력하고 있는 수감자에 대한 불쌍함은 그러한 논거들의 원천적인 배경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물론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대중(수감자)을 불쌍하게 여기는 표현은 이곳 외에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대중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크게 돋보이는 <국가>499e-500b)의 내용을 포함하여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을 부성주의(paternalim)적 관점에서 또는 기독교 신학적 관점에서 평가하는 입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사실 동굴의 비유가 동굴 속 어둠에 갇혀있는 죄수들을 구출하는 이야기를 골조로 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동굴에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그러하듯이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이나 존재론, 정치철학과 도덕론 차원의 문제의식은 물론이고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확장, 음미,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포함하고 있다. 사실 일상의 측은지심(惻隱之心) 너머 삶의 근원적 불쌍함에 대한 깨달음은 도덕이나 정치의 영역을 넘어 일종의 종교적 거룩함의 경지에 다가설 때 비로소 얻어지는 삶의 진실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플라톤이 보여주고 있는 동굴 속 삶의 근원적 비참성 또한 비록 그 배경과 성격은 다르긴 하지만 기독교 은총 신학만이 아니라 불교의 심우도(尋牛圖) 입전수수(入廛垂手)도 보여주듯이 인간 구원의 단초를 구성한다. 불교의 수행자는 세계의 실상으로서 불성을 깨닫고 고고하게 산사에만 머물며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깨달음을 토대로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 미망에 빠진 중생을 구제해야만 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세상 죄인들의 대속을 위해 구주로서 이 땅에 내려 왔다가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소크라테스도 아테네 시민의 무지를 일깨우려 시장과 거리에서 거침없이 진리를 설파하다 그 역시 세상 권력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예수가 종교적 대속자로 부활하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대속자로 오늘날 되살아나 여전히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있다.
* 동굴의 비유는 위와 같이 철학자가 동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와 정황을 논하는 것으로 모두 마무리된다. 이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는 그런 일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훌륭한 철학자들이 이 나라에 어떤 방식으로 생겨날 것인가의 문제로 이행한다. 즉 어떤 이들이 지하세계로부터 신들에게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듯이 이 철학자들을 어떻게 광명으로 인도할 것인가의 문제, 즉 철학자의 교육과정에 관한 논의가 다음 주제로 다루어진다. -끝-
다음 강해 :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527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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