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천 하룻밤 이야기]
상부상조 대 이기주의 – 자연권과 생태계 시대로
2025년 4월 20일 곡우(穀雨), 비가 올라오더니 빌라 밑 처마에 제비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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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의 뜻이 하늘이라 했었다. 공동체에서 각각이 고유 권리로서 사회권과 자연권이 있다는 이야기는 유일신앙의 첫 화두인 하늘이 무한하다는 하는 브루노의 무한 개념이 열리고 난 뒤이다. 하늘이 열리는 것에 대한 놀라움은 망원경을 통해 하늘에 뚜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뚜껑위에 옥황상제나 유일신, 선녀나 천사가 머물고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나라 이야기가 하늘에 대해 경외심을 심었던 것은 여섯 살 꼬마에게 삶에서 도덕과 은덕을 가르치는 도덕론이었다. 서양사에서 하늘과 땅 다음으로 ‘인간이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심사숙고하면서 인간이 황제의 신민도 아니고 신앙의 예속자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종속하다는 뜻이 바뀌어 인간이 주체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들어선다. 화두는 하늘과 땅에서 인간으로 바뀌는 것이 근대의 시작인 셈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하늘의 완전성과 땅의 불완전성의 대비는 고대로부터 요즘의 AI시대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화두로 남아있다. 하늘의 무한성도 땅의 개연성도 인간의 오성 또는 지성이 만든 체계이거나 배치에 따른 질서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가 만든 원리와 공리를 알고, 법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를 안전하고 원활하게 이끌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 안전과 편리를 기준으로 도덕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구의 발달에서 인간이 눈과 귀로 익히는 것 이상으로 순서에 맞게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도덕교육을 넘어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의 최소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1750년대 증기기관과 1830년대 모터의 발명이후 배, 자동차 등에서 도구를 다루는 것은 과정의 순서와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 공동체에서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면 질서를 따라야 한다. 이런 배치와 질서의 존중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는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그런데 삶의 터전이 넓어지고, 같은 배치와 질서 속에서 있지 않은 공동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도 통일적인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면 그 통일성의 기원과 원천은 언제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편리와 선후 문제에 앞서 있어야 하는 화두가 다시 불려 나온다. 절차와 순서들은 선문답들로서 파라독사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멋이 중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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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여기 지금 하나의 사물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이외에 다른 사물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법칙과 질서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터전에서도 동일한 질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동일한 질서는 무엇인가? 이 질서 이외에 다른 질서에 따라 행동하는 이들은 질서를 어기는 것으로 여긴다. 동일성에 벗어나는 것은 이탈자 또는 반대자로 생각한다. 동일성 속에 산다는 것이 통일성 속에 사는 것이고, 하나의 법칙과 질서로 사는 것이다. 이 법칙과 질서는 어디서 오는가? 하나의 원리와 공리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원리와 공리는 어디서 오는가? 이것을 신앙자들은 신에게서 온다고 믿었다. 적어도 크리스토스를 내세우기 이전에는 현자들은 논리의 원리와 기하학의 공리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원리와 공리가 매우 정합적이고 체계적이라 이를 잘 아는 것이, 천체의 운행에도 지구 위에서 삶의 이동에서도 잘(bien) 실행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 원리와 공리가 누가 만들었는지를 모르지만 두 가지 방향에서 인간들 사이에 전승되었다. 땅위의 10진법과 하늘의 60진법을 은연중체 체계화 세웠듯이, 터전에서 인간이 서로 소통하면서 말하는 데도 언어(입말)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원리와 공리에 걸 맞는 논리의 법칙이 동일률의 규칙이다. 이 동일률의 성립은 자연(땅)에도 하늘(신)에도 성립하는 통일성을 갖추었다고 여겼다. 말로 표현하여 하늘(신)은 하늘(신)이고, 땅은 땅이다, ‘사람은 사람이다’를 부정하는 이는 없다. 이것은 하나는 맞다 이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하는 경우에, 동일률에 맞으면 맞고, 아니면 틀렸다고 한다. 동일률이라는 것이 먼저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같은 것과 다른 것은 항상 같이 있어왔다. 하나를 질서 또는 순서로 정하게 되면, 다른 질서는 틀린(다른, 맞지 않은, 나쁜) 질서인 것처럼 여긴다. 게다가 공동체에서 달리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에 입말의 논리학이 성립하는 시기에 동일률과 더불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는 논리도 생긴다. 간단히 A는 A아닌 것이 아니다(A=~A)이다.
배중률의 편리는 공동체 안에서 편가르기를 한다. 이런 편가르기는 터전(땅)의 논리에서 이곳은 내꺼 라는 소유의 방식에서 온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삶에서 터전과 하늘은 공유의 것인데, 이런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경계를 만든다. 농경이나 목축에서 토지와 하늘(기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들 덕분에(음덕으로 은총으로) 생산된 것은 생산하는 자의 소유가 된다. 그 시대에 생산자는 그 덕분에게 감사한다. 생산물을 수확하면 첫물의 곡식으로, 첫물의 새끼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 자연(하늘과 땅)의 덕분임을 감사한다. 이 생산물을 전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는 전유의 생각은 단지 “덕분”에게만 감사하고, 주변의 이외에 사람들에게 나눈다는 것을 배제하는 방식이 도래한다. 사적 소유의 생각에서 배제의 방식이, 즉 이로서 배중률이 생활 속에서 젖어든다. 이를 좀 더 사유의 외골수로(공상으로)가면, 나 이외에 다른 이를 믿지 말라 이며, 더욱 추상화의 길로(망상으로)가면 나외의 다른 신을 믿지 말라가 나온다. 배중률이 사유규칙으로 나오기 전에 이 ‘나이외’라는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회의 사적 소유가 생기고, 도적질 하지 말하는 규약은 어느 초기 공동체에도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너도 노동하고 노력해서 먹고 살려고 해야지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당연히 개인이 노동력이 있을 경우인데, 어린 시절과 늙은 시절에 노동력이 없는 경우를 생각하여, 가족과 씨족 공동체 안에서 능력있을 때 일하며 노동력없는 이들을 먹여 살리고, 스스로 노동력 없을 때 도움을 받아서 산다. 사적 소유가 없는 작은 공동체에서 남의 것을 훔친다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도와서 살아가고 또한 삶의 과정 전체에서 노동과 필요가 상부상조로 배치되고 분배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배중률은 언어 소통에서, 이 말투와 판단(명제)은 맞기에 이에 맞게 행동해야 하고, 저 말투와 저 판단은 논리적 과정에서 위반되기에 행동을 하거나 함께 일하게 되면 어긋나거나 질서 파괴가 이루어 질 수 있기에 수정 또는 교정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배중률이 공동체 삶의 확장에서 하늘과 땅을 소유할 수 없듯이, 많은 철학자들이 말하듯이, 소유 없는 공동체와 달리, 공동체가 확장되고 생산력(분업)도 생산량도 많아지면서 자연의 위험에 대비하고 외부의 적들에 공격에 대응한 군사들도 필요하게 되면서 공동체 안에서 체계를 갖추고, 이를 총괄하는 우두머리를 세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공동체의 체계는 중한 것과 먼저인 것(중경과 선후)에 따라 실행하는 방식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중경과 선후를 공동체에서는 평의를 거쳐서 평결을 내리고 합의하여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급박한 천재지변과 또는 외적의 급습에 대비하는 군사조직과 행정조직의 필요에 따라 배치의 질서가 위계적 질서로 가는 것이 편리하고 안정적이라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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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상부상조 하는 방식으로 함께 산다는 점에서, 또한 타인의 또는 기술의 전승의 덕분으로 산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이기심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냈다. 이런 공동체의 사유에 말 그대로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를 걸쳐서 몸에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기시대의 도구발달은 전혀 다른 공동체 상황을 만들었다. 동일생산물의 다량제작이라는 거푸집의 발달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금속들을 다룬다는 것은 생산력 뿐만 아니라 도구/무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도구의 소유를 개인의 능력으로 착가하는 이들이 배중률을 심는다. 나 이외 다른 이를 믿지 않는다. 이 이기심은 자기와 달리 생각하고 다른 발명과 창안을 배제한다. 이런 관계들 두 질서 사이에 모순이라고 하며 모순률을 들이 민다. 그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승된 지식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배제하고 자기의 것으로 여긴다. 이 배제를 믿게 만든 신앙이 유일신앙이다. 다른 질서가 있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스스로 체계와 통치에서 상층에 있다고 여긴다. 인간위에 인간, 인간 밑에 인간을 만드는 사고가 고착되어간다. 그럼에도 모순을 해소하고 변증법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어 간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공동체에서는 배중률이라는 것이 착각과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우주라는 세계에서 자연의 발생은 언제나 여러 갈래였고, 각각의 길들은 터전에서 여러 삶의 방식들을 표현한다.
질서는 하나의 질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질서가 있다. 한 질서에 비해 다른 질서가 배제되거나 모순된다고 하면서 자기 동일성만이 진리이고 덕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속에 탐욕과 오만이 스며들어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들을 만들어가면서, 타인의 삶과도 함께하면서 배치와 배열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회이고 국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동일률과 배중률에 세뇌된 상층은 다른 질서를 나쁜 것으로 또는 악마로 몰아갔다. 이런 놀이에서 가장 나쁜 사례가 브루노를 산채로 화형 시킨 것이다. 이 치졸한 부류는 1889년에도 브루노를 단죄하였으며, 반성과 사과는 없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화두는 여전히 유일 신앙자들에게는 배중률에 속한다. 인간의 스스로 아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동일률과 배중률이 삶에서 필요인가 또는 다른 인간을 도구로서 개돼지 취급의 지식인가? 인간이 자연과 하늘의 이법을 정립할 것인가는 선문답처럼 남아있다. 나 이외 다른 것(똥짝대기)을 믿지 말하는 화두는 불교에서 이미 오래 전에 불성이 똥짝대기에도 있다고 여겼고, 그리고 서양사상사에서 12세기에 유명론에 의해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으며, 의식과 인식의 주인이 신이 아니라 인간일 수 있다는 이신론이 등장하기도 하였고, 인민이 주체화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시대에서는 유일신앙의 화두를 아편쯤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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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배우는 하나 더하기 하나, 한 점과 다른 점을 잇는 가장 바른 선은 하나다 라고 하는 상식은 오관을 통한 지식이다. 오관을 넘어서 의식이 다루는 지식은 근대 이래로 여러 갈래이다. 동일률과 배중률을 기반으로 하는 지식은 상층의 원리와 공리가 지구(터전)에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 그 믿음은 그리스어로 플라톤이 쓴 피스티스(억측)이었으며, 번역 상으로 견해이며, 영미 철학에서 믿음이라 한다. 이런 믿음은 더 이상 묻지 않은 선천성으로 진리는 통일성을 갖고 동일률에 근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였다. 경험론의 믿음에는 삶의 공동체에서 감정과 감화가 있고도 한다. 이 시대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 서양이 중국을 알면서 놀란 사실이 있다. 종교개혁이후로 카톨릭이 자신의 내부에서 불화와 반대에 부딪히면서 이방지역(다른 문화지역)에 종교전파를 위해 군대식으로 만든 제수이트들이 중국의 문화를 보았다. 그들이 놀란 것은 유일신앙 없이도 도덕과 사회를 잘 건설하였던 역사와 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구 안에서 문화들이 통일성을 갖는가? 서구는 원리와 공리의 학문이 전지구적이라는 문명을 들이대며, 다양한 문화에 대해 문명의 통일성이란 측면에서 서구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전지구적으로 유일신앙 밑에다가 식민지들을 만들어 가려했다. 이 탐욕과 오만에는 철학사적으로 사적 소유의 인정과 위계질서에서 공동체의 질서 위에 유일신앙의 질서가 있다고 한다. 이 무지몽매한 질서가 하나이며, 다른 질서는 모순이며 배제이며, 불온세력이라며 악마화하고, 자신들의 망상을 감추려 빨갱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20세기에 두 번의 전쟁에서 유일신앙에 반대하여 생긴 소비에트와 중국에 대해 우월권을 행사하기 위해, 미국의 패권 제국이 20세기 후반 내내 해왔던 수법이다. 21세기에 뭔가 달라지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을 미국이 굴복시키려고 하다가, 제국주의 붕괴처럼 미국의 제국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부상조로서 터전을 가꾸어가는 방식(공유질서)과 하나의 질서 아래 다른 문화를 배척하고 한 문명 속에 굴종시키려는 방식(패권질서) 사이에 차히를 보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배제의 원리로서 윤석열이 계엄을 하듯이,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겠다고 한다. 달리 사유하고 상부상조하는 공동체는 윤석열에 항쟁하는 반정권세력인 셈이다. 다양성은 전지구적으로 퍼지고 있다.
여전히 문화의 다양성을 만든 것은 지구라는 터전이 통일성이라기보다 다양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가 먼저가 아니라, 자연과 생태계가 먼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찍이 벩송은 한 질서의 규정과는 다른 질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 질서가 다른 질서들을 거짓 또는 나쁜 질서라고 보는 것이, 벩송의 부드러운 어법으로 유일신앙이 정태적 종교로서 착각이라고 한 것이다. 착각은 자기 탐욕과 오만한 자식 그리고 배중률의 신에 예속되어 망상에 빠지는 것이고, 그 망상을 피스티스 또는 신앙으로 받아들여 착란에 빠진다. 이러한 일들은 지구에서 밀농사를 짓는 문화과 쌀농사를 짓는 문화의 차이에서만이 아니고, 날씨에서 더운 열대 그리고 온대와 난대 사이에서 문화의 차히는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우선이라는 것이 생태계의 섭리이다. 벩송이 말한다. 사는 것이 먼저이고(primum vivere) 그리고 철학적으로 사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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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말했지만, 유일신앙의 권세, 국가주의의 권력, 앵글로색슨 철학의 권위의 세 패거리를 만들어 세상사를 지배하려하며, 로마제국이 식민지들 다스리듯이, 제국을 형성하려 했다. 그게 쉽지 않아서,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금본위를 그 다음 기축통화로,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지역 전쟁으로 그리고 21세기에는 무역으로 지배하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제국이 여전히 자연에서 인간이 주체로서, 패권으로서 하늘과 땅을 인간의 지배하에 둘 수 있다는 신앙에 갖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그런 오만한 인간중심주의 신앙과 차히를 생성하고 발산하고 있다. 신앙에 체계화든, 사회의 조직화든, 지식의 통일화이든, 인간이 만든 것이지 신의 계시나 은총이 아니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터전에 맞게, 사건들의 연관에 평의와 평결에 의해 제도화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솔하게 타자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 주체화이다. 아직 인간의 우주 안에서 지구의 터전에서 주체화가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중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체화는 지구의 터전에 따라 다르다. 어쩌면 20세기에 소련과 중국을 통하여 실험과정을 겪으면서, 미국 패권의 제국과 다른(차히)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성립에서, 이기심을 주장하는 문명의 도구 사용에 대한 지식이 49퍼센트쯤, 상부상조와 더불어 자연의 섭리와 함께 생태계를 따르면서 살아가는 의식이 51퍼센트가 되어 갈 것 같다. 이런 사회의 건설에서 전자의 카르텔에 젖어서 김건희와 윤석열 집단은 자기들만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망상과 착란에 젖었다. 인민은 그렇지 않다고 광장에서 불빛을 들고 함성을 질렀다. 소수의 분파적 지식 인간이 아니라, 인민이 주체화를 만든다. 상층이 아무리 인민을 개돼지 취급한다고 해도, 인민이 합의하는 평의와 평결은 인민의 최종심급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단지 국회, 정부, 사법의 고위직위자들이 자신들이 판단과 심판이 최종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의 누리소통은 인민의 최종판결 없이는 어떠한 질서, 법칙, 원리, 공리도 현상화에서 사건들에 그들의 뜻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체화는 우선 같은 입말을 쓰는 8천만의 방식에서 공통감각으로서 상식과 생명의식으로서 공통 감정과 공감이 세 패거리의 야합보다 먼저 기본으로 깔려 있다(밑에 있는 것이 실체 sub-stance 라는 개념이다)는 것이다.
패거리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들의 지배가 당연하고 필연적이라고 여기며, 불온세력이니 중국추종자니, 반국가적 빨갱이니 하면서 배중률에 의한 자기 동일성에 논의 또는 문답을 하면서도, 그 말을 하는 그네들이 파라독사에 빠졌다는 것을 젊은이들은 잘 안다. 젊은이는 과거의 어떤 시대와 달리 상층의 지배 사고와 차히나는 주체화 과정의 흐름에서 트래픽 덩어리의 연관들을 보고 있다. 젊은 세대는 이미 새로운 시대에, 달리 사유하고 문명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의 차히를 생산하고 창안하는 시대 속에 있다. 과거에는 상층이 인민에 반란이란 표현을 섰지만, 거꾸로 누리소통 시대에는 김건희와 윤석열이 반란세력이라는 것을 안다.
세계사에서 공동체사회를 만들려는 국가들이 반세계적이 아니라, 전쟁의 위협과 공포를 만드는 미국 제국의 패권이 반세계적이라는 것을 안다. 일부사상가들은 18세기를 계몽의 시대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층이 백성과 대중을 교화하는 것으로 여겼으나, 프랑스 18세기는 “빛들 시대”라고 하는데, 빛은 중심에서 밖으로 무한히 다양하게 발산한다. 그 세기의 사상가들은 탈종교의 시대였으며, 계몽이 아니라 인민이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시기였다. 게다가 그 시대에 똑같은 단어(pitié)가, 상층은 민중에게 동정을 배푼다고 하였고, 빛들의 사상가들은 인민이 인민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고 한다. 동정과 연민의 용어 사용의 변화가 있듯이, 인간이 사회를 조직화하면서 위계를 모방 속에 사는 백성들은 서로간에 전쟁으로 보았던 홉스 같은 사회권(자연권)을 주장하는가 하면, 루소는 인민들 사이에 연민이 있어서 자연권을 지니고 그 권리를 국가권력에 양도하지 않고서, 권력이 인민의 의사에 벗어나면 언제든지 그를 소환하거나 파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공화국은 동정이 연민으로 사회권이 자연권으로, 반란이 항쟁(발현)으로, 같은 입말이라도 사용방식이 바뀌는 시절에 대혁명이 도래했으며, 국가권력인 왕을, 교회권력인 일부 성직자를 단두대에 보내면서 공화국을 세워보았고, 반동들에 의해 왕정으로 되돌아갔더라도 인민의 의식화와 주체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공화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민의 저항에 대해 권력의 반란이라는 12월 3일 이후, 사법권에서도 반란수괴를 파면시키는 4월4일을 거쳤다. 동학혁명으로 한글이 전면에 나온 1895년 이래로 그리고 1987년 가로쓰기와 순 우리말쓰기는 인민의 주체화 과정이었다. 젊은이들의 손바닥에 놓인, 부처님 손바닥처럼, 누리소통의 도구 속에서 입말만이 아니라 그림과 노래까지도 리좀이 흐르고 있다. 고착적이고 고정된 유일신앙의 사고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새로운 소통도구와 입말이 그 소임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는 새로이 조직화(3.3.3,3)의 발현과 창안과 흐름으로 새로운 시대를 만들 것이다. 영웅, 호걸, 성인, 군자가 세상을 만드는 시대가 아니라, 인민이 주체화로 등장하면서 스스로 인물과 덕후 만들기(생성, 되기)의 시대에 있다. 이 만들기에는 노력과 내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노력과 내공을 이루려는 젊은이들 조직을 창안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자발성으로 주체화를 이루는 시대가 왔다.
삶이 먼저이며, 혁명은 여전히 흐른다. 흐름에서 즐겁게 잘 흐르는 트래픽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 젊은이의 멋있는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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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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