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 – 22회|7. 철학과 대학원 (3) [이종철의 에세이 철학]
22회
- 철학과 대학원 (3)
철학과를 드나들면서 개성 있고 좋은 친구들을 여럿 만났다. 그중 삐쩍 말라 키가 껑충한 이상한 군은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친하게 지내고 자극도 많이 받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4학년 칸트 수업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서 그가 나중에 신과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한 학생과 칸트 철학에 대해 열심히 논쟁하고 있었다.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면서 논쟁하는 데 이제 갓 철학과 수업에 들어온 법대생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렇게 진지하게 논쟁하는 모습 자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법대에서는 결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도 수시로 질문을 하면서 따졌다. 독일에서 학위를 하고 나서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선생은 이런 질문에 대해 상당히 곤혹해했다. 그럴 때면 선생은 상한군에게 한 번 답변해보라고 하면서 질문을 떠넘겨 버리기도 했다. 상한군은 당시 비트겐슈타인을 가지고 석사 논문을 쓰겠다고 했다.
그는 지방 소도시의 깡촌 출신이었다. 머리가 비상해서 Y대 철학과로 진학했는데, 당시 나는 그야말로 그가 철학의 화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농담을 많이 하고 사회 문제 등도 이야기하곤 하는 데 이 친구는 그런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나 깨나 철학이고, 어떤 이야기를 하든 다시 철학으로 대화를 끌어갔다. 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논쟁을 즐기며 사람들을 낭패하게 만드는 소크라테스를 연상할 정도였다. 소크라테스의 별명이 소 잔등에 달라붙어서 아무리 쫓아도 사라지지 않는 ‘등애’였다. 이런 그의 태도는 처음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나에게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 나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그와 대화하면서 깨우쳤다. 우리는 주로 중앙도서관 3층의 계단에 앉아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당시는 도서관 내에서 담배도 피우던 시절이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틈에서도 철학을 이야기하는 친구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머리가 비상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을 만큼 비판적이었고, 또 절대로 비약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논리적이었다. 그가 오른쪽 목에 난 자그만 혹을 만지면서 차분하게 논리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마치 비수로 가슴을 후비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태도는 강의실이건 도서관이건 가리지 않았고, 술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술을 마셔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이야기했다. 술자리는 사실 논리 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자리다. 그런 곳에서 논리적으로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덕분에 그는 술자리에서 여러 차례 얻어맞은 경험이 있다. 그의 키가 180 센티를 넘겼지만 그는 혼자 자취하느라 제대로 영양 섭취하지 못하고 술 담배를 많이 한 탓에 삐쩍 말라 있었다. 그의 모습이 만만하게 보였는지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나는 가장 가까운 데서 그런 폭력이 자행되던 모습을 보았다.
언젠가 철학과 대학원생들끼리 1차로 술을 마시고 나와 이모군, 그리고 동양 철학을 하던 독고탁과 김수철이 함께 자주 다니던 논지당 카페에 들어갔다. 이곳은 신촌에서 유명한 카페이다. 주인 마담과도 친해서 늘 술을 마시면 들르던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커피를 마시다가 일이 터졌다. 원인은 나였다. 나는 그 당시 술과 담배를 엄청 하던 관계로 기관지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는 칵칵거리면서 목에 낀 가래를 그냥 바닥에 몇 차례 뱉었다. 사실 정말 매너 없이 행동한 것인데 만취한 상태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 모습을 보고 동양 철학을 하던 김수철씨가 아주 보기 좋지 않은 듯 눈을 흘겼다. 그는 연극반 출신이고 수경사 출신으로 몸도 건장하고 술도 잘 마시던 낭만파 호인이었다. 주인 마담과도 친해서 논지당을 많이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환이 이 모습을 보면서 특유의 시니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니까 김 선배가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바로 옆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팼다. 얼굴이 피떡이 된 상태로 카페에 들어온 이모 군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경악을 했다. 상처가 심해서 바로 근처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나에게 향해야 할 주먹을 그가 대신 맞은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그의 동기인 김봉한이 때린 김 선배를 당장 고발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하지만 고발까지는 가지 않고 병원 치료비와 소정의 보상비 정도로 마감했다. 아무튼 이 친구는 너무 약해 보이는 데다가 냉소적이어서 그렇게 많이 맞고 살았다.
이종철(철학박사)은 『철학과 비판』(도서출판 수류화개)과 『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그리고 『문명의 위기를 넘어』(공저, 학지원)를 썼다. 그는 『헤겔의 정신현상학』(J. Hyppolite, 1권 공역/2권, 문예출판사), 『사회적 존재론』(G, Lukacs, 2권/4권(공역), 아카넷), 『나의 노년의 기록들』(A, Einstein, 커큐니케이션스북스)등 다수의 번역서들을 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소 전문 연구원이자 인터넷 신문 ‘브레이크뉴스’와 ‘내외신문’의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NGO 환경단체인‘푸른 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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