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슈티르너: 에고이즘의 위대한 철학자-5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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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의 에고이즘>

 

박종성

 

    – 차 례 –

  • 서론
  • 헤겔 좌파
  • 헤겔 좌파에 대한 슈티르너의 비판
  • 정치적 슈티르너
  • 슈티르너의 에고이즘
  • 슈티르너 이후
  • 역사적 결론
  • 페미니즘에 관한 후기

Svein Olav Nyberg [노르웨이 아그데르 대학교(노르웨이어: Universitetet i Agder) 부교수]의 글, Max Stirner: The Great Philosopher Of Egoism(2021)을 번역한 글입니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즘(egoism) 개념은 지금까지 부정적 기능을 가진 것, 즉, 상대방을 높은 지위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철학적 또는 정치적 주장을 끼워 넣을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됐습니다. 그러나 슈티르너는 또한 우리에게 긍정적 예로 에고이즘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내가 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이 원하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랜드의 에고이즘과 달리,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규범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신-주의(new -ism)의 기초가 되는 용어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구체적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철학입니다. 슈티르너의 비판을 넘어 그의 철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생각은 “유일자”, “개인”, “유일한 한 사람”을 의미하는 Der Einzige입니다.

슈티르너는 각 개인이 유일하다고 지적합니다.[1] 한스 트리그베(Hans Trygve)[2]와 나는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다른 두 개인입니다. 물론, 우리는 둘 다 인간이지만, “인간”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지, 우리가 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은 개인의 특성[3]이 아니라 개념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나는 많은 것들과 공통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것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공통성이 나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개념이었다면, 당신도 나를 철자할 수 없었을까요?

이것은 간단한 일상의 관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일격이 큰 철학의 오크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사들도 유일합니다. 즉, 우리의 관심사들이 유일자를 표현합니다.[4] 슈티르너가 에고이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유일한 사람의 유일한 관심사들(unique person’s unique interests)입니다. 에고이즘은 신, 인간 그리고 당신의 국가와 같은 이상들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관심을 위해 당신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입니다.

슈티르너는 또한 우리가 이상을 위한 투쟁과 우리의 관심을 동일시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여전히 – 에고이즘에서 비롯된 우리의 자기-관심에 기초하여 그 일을 수행할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즉, 그는 심리적 에고이즘을 제안합니다.[5]

이 일은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기본적으로 유일한 관심사, 즉 우리가 유일한 개인이듯이, 우리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라는 점에서 정확하고 동어 반복적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심리적 에고이즘이라는 생각이 다소 번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테레사 수녀(Mother Theresa)와 같은 “무의식적” 에고이스트와 나 자신 같은 “의식적” 에고이스트를 분리하는 문턱을 높이기 때문입니다.[6]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슈티르너는 나에게 주입된 생각 및 감정과 내 안에서 일어났던 생각과 감정을 결정적으로 구분합니다.[7] 그의 논설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리(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에서, 그는 교육의 큰 문제를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채워 넣는 것 중 하나로 보는 이론을 공격합니다. 슈티르너는 교육자들이 교육 수단에 관해 서로 격렬하게 의견이 다르지만, 목표가 아이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채워 넣는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슈티르너는 아이들이 그들 자신의 학습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들의 함양은 그들 자신의 관심에 기초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지식은 아이들 자신의 이 되고, 떠넘긴 사실들과 이론들의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슈티르너 이후 150년 후의 뇌 연구에서 나온 흥미로운 관찰은, 학습의 화학 작용은 틀림없이 학습자가 관심을 가지고 학습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배움처럼 무언가가 자기 자신의 이라는 생각은 슈티르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이자 필수적 생각입니다. 슈티르너에 따르면, 당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은 당신의 소유입니다. 이는 법적 의미가 아니라, 유일자로서의 당신이 접촉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 밖에 누군가가, 어떤 이상 등등이 규정한 관계가 아닌 자기 자신의 관계에 따라 당신이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소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특이한 방법임이 틀림없으므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겠습니다. 고전적 의미에서 “소유”는 당신이 통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통제를 명확히 사용하는 방법은 당신과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권리”로서의 “소유”는 슈티르너가 방금 거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리”는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리는 “인간”(Man)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지배적이고 규범적 이상이 없다면, “소유”는 당신이 접촉하게 되는 모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상과 권위가 규정한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자기소유성(ownness)으로 그것과 관계를 맺을 때 그것이 “소유”입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당신의 통제력은 당신의 힘, 즉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슈티르너의 마지막 두 번째 생각이 바로 Eigenheit, 즉 “자기소유성”입니다. 이 발상은 당신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평가를 – 당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는 설명입니다. 자기소유성은 슈티르너의 마지막 생각인 “소유자”를 의미하는 Eigner와 관련이 있습니다.[8]

슈티르너는 “자기소유성”과 “자유”를 대조합니다.[9] 슈티르너는 “자유” 자체가 공허하고[10] 헛된 개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자유”라는 단어)는 “자유”라는 단어와 함께 “부재”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라이트 맥주(Light beer)에는 알코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신다고 해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유”를 추구할 때, 정확히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원하시나요? 단어 자체는 아무런 답을 제공하지 않으며, 당신은 지칠 때까지 단어에 대한 권리에 대해 “인간적 자유주의자”와 논쟁을 벌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당신은 단순히 이 자유에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자기 자신을 위해 결정할 수 있고, 당신의 자유를 전혀 원하지 않는 군중이 아니라, 아마도 당신의 자유와 모순되는 다른 종류의 자유를 원하는 군중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슈티르너는 “자유”보다 “자기소유성”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부재하는 자유는 당신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당신의 자유를 좋아하는 영역에서 존재감 드러냈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승인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신은 공짜로 자유를 가질 수 없다”라는 악명 높은 문구에 반영되었습니다.

자유와 자기소유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는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 어린이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괴롭힘을 가하는 사람이 한동안 그 어린이를 괴롭히는 데 지치면, 괴롭힘은 한동안 없어집니다. 그 어린이는 괴롭힘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다른 사람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쉽게 드러납니다. 반면에, 그 어린이가 가라데[태권도;옮긴이;우리 정서에 맞게]를 배우기 시작하거나 운동선수 친구를 사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런 다음 그 어린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자기 자신의 을 사용합니다. 그 어린이는 자신의 의지로 그들에게 저항합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가해자들이 그 어린이를 다시 괴롭히기로 결정하고, 그 어린이가 자신의 자유를 호소한다면, 이 헛된 호소는 가해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소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소원은 그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괴롭히는 사람들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랜드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고 있습니다. 랜드는 “피해자의 제재”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이 반격하고 거절하지 않는 한,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힘은 무제한입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슈티르너는 어떤 이상의 매개[11]를 통해 서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특히 그는 그가 그들의 이상을 무너뜨릴 때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줄 이상이 없으면, 우리는 완전히 멸망한다고요, 우리는 악행자들에 맞서 싸울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요!” 여기서 슈티르너는 십자가나 마늘과 마찬가지로 “권리”도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은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12]당신은 무엇을 위해 거기 서 있습니까?” 그는 묻습니다. “당신은 저항할 힘이 없습니까?”

게다가, 슈티르너는 힘과 능력이 크고 건장한 남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합치면, 나의 힘은 몇 배로 배가되기 때문입니다.[13] 그리고 역사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모든 변화는 이상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든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졌든, 항상 구체적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상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은 기껏해야 구체적 사람들의 마음속에 밀항자나 무용지물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은 환상과 이상을 잃어도 사라지지 않으며, 잃어버린 이상이 “권리”와 “자유”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내가 얻은 것을 누군가가 나에게 더 이상 허락하지 않더라도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얻은 것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괴롭힘을 당한 남학생이 얻은 “자유”는 자유를 위한 청원보다는[14]이고 그 자신의 자기소유성에 더 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주류 판매 면허를 상실했다고 해서, 내가 자동으로 음료 판매를 중단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나는 특정 한도를 초과하는 수입이 거부되어, 고전적인 정치적 의미에서 나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기소유성으로 -밀수입합니다.


옮긴이 박종성: 건국대학교에서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유일자와 그의 소유』(2023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데올로기와 문화정체성』(공역)이 있다. 논문으로는 「유일한 사람의 사랑」, 「슈티르너의 ‘변신’ 비판의 의미」, 「식민지 조선에서 슈티르너 철학의 변용과 그 의미 및 한계-염상섭의 「지상선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이고 건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1] “나의 관심은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유일한 나이듯이,—유일한(einzig) 것이다.” 12쪽, “나는 나 자신을 어떤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로 여긴다. 확실히 나는 남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견주어 보거나 돌이켜보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실제로 나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유일한 사람이다.”, 218쪽, “하지만 이제부터 더 이상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 아니외다. 오히려 유일한 것이외다.” 231쪽, “자유주의자는 그대에게서 그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개념을 보고, 또는 철수나 영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보며, 현실적인 사람 혹은 유일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의 본질이나 그대의 개념을 보고, 뼈와 살을 갖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본다.” 268-9쪽, “그러면 그 인류의 무덤 위에서 내 유일한 주인인 나,” 『유일자와 그의 소유』(부북스, 2023), 338쪽.

[2] 원주 5, 번역자.[이 글을 노르웨이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옮긴이]

[3] 그래서 나는 에고이즘을 자기중심성으로 옮겼다. 나아가 개인의 특성이 자기중심성이고 그런 개인을 자기중심적 사람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4] 같은 책, “나의 관심은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유일한 나이듯이,—유일한(einzig) 것이다.” 12쪽.

[5] 같은 책, “비록 인간 본질의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아르놀트 루게와 같은 “정치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질이 ‘시민권’과 동일시되고, 모제스 헤스와 같은 “사회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성이 ‘노동’과 동일시되며, 브루노 바우어와 같은 “인간적 자유주의자”에게는 인간 본질이 ‘비판적 활동’과 동일시됩니다.” 575쪽, 옮긴이 해제.

[6] 같은 책,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슈티르너는 물질적 부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탐욕스러운 개인의 중요한 예를 논의합니다. 그러한 개인은 분명히 자기유용을 갖고 있지만(그는 단지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만 행동합니다), 그 일은 슈티르너가 일방적이고 편협하다고 거부하는 자기중심성이며 정신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579쪽. 옮긴이 해제 참조.

[7] 같은 책, “자신의 것(Eigene)이 고취된 것(Eingegebenen)과 대조될 때,” 102쪽, “그 밖의 어떤 것들을 통해 내 안에서 일어났던 감정이나 생각과 나에게 주어진(gegeben) 감정이나 생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03쪽, “그렇다면 차이는 나에게 불어 넣어진(eingegeben) 감정인지 혹은 단지 나를 마음 내키게 했던 감정인지이다. 나를 마음 내키게 했던 감정들은 나 자신의, 자기중심적 감정들이다.” 104쪽.

[8] 같은 책, “이와는 반대로 자기소유성, 그것은 내 온전한 존재이자 현존을 의미한다. 자기소유성은 나 자신이다. 나는 내가 벗어난 것에서부터 자유롭다. 나는 나의 힘 속에 가지고 있는 것 혹은 내가 마음대로 제어하는 것의 소유자이다.”, 246쪽, “그러한 기독교적 희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자기소유성’은 어떤 현실성이다.”, 256쪽, “자기소유성은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인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자기소유성은 기독교의 언어가 명예롭지 않게 만든 것을 다시 명예롭게 만든다. 그러나 또한 자기소유성은 타자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소유성은 자유, 도덕, 인간다움 따위와 같은 이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소유성은—소유자의 묘사일 뿐이다.”, 267쪽.

[9] 같은 책, “자유와 자기소유성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큰가!” 246쪽, “자유와 자기소유성 사이에, 그저 말 사이의 차이에 불과한 것보다 더 깊고 심한 대립이 여전히 있다.”, 248쪽.

[10] 같은 책, “왜냐하면 자유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이용할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쓸모없는 허용은 어떤 가치도 없다. [172] 하지만 내가 자유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나 자신의 자기소유성에 달려있다.”244, “나의 자유가 나의—힘일 때에만, 나의 자유는 완성된다.”, 261쪽.

[11] 같은 책, “사람은 다른 사람과 즐거운 방식으로 교류해서는 안 되고, ‘더 높은 감독과 중재’ 없이 교류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행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허락한 것만큼만 실행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생각, 나 자신의 노동, 또는 대체로 나 자신의 어떤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351쪽.

[12] 원주 6, 노르웨이의 저명한 자유주의자인 Bjørn Borg Kjølseth는 “누군가가 당신의 권리를 상하게 한다면”, “권리가 이에 대응하여 그의 다리를 물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그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13] 같은 책, “이러한 결속[상호 의존; 3쇄 교정할 때]에서 나는 내 힘의 상승만을 본다. 그리고 오로지 결속이 내 증가된 힘인 한에서만, 나는 결속을 유지한다. 하지만 이렇게 결속은 어떤—연합이다.”, 483쪽.

[14] 같은 책, “전자는 국가에 대한 청원이고, 후자는 국가에 맞선 반란이다. ‘권리에 대한 청원’, 심지어 언론 자유의 권리에 대한 진지한 요구는 국가를 주는 사람(Geber)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직 선물(Geschenk)과 허가, 승낙을 기대할 수 있다.”, 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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