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 20 -형이상학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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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 20 -형이상학의 매력

1)

계엄이다, 탄핵이다. 등 세상은 어수선하다. 옛날 같으면 이런 시기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지 못했다. 워낙 황당한 일이라 그런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지고, 마음은 자꾸 형이상학의 세계로 기울어진다. 늙은 것인가?

헤겔은 논리학 서문에서 형이상학이 없는 독일 민족을 한탄했다. 한때 세계사를 이끌었던 민족치고 형이상학이 없는 민족은 없었다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민족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헤겔의 한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한다. 형이상학은 시대를 극복하는 창끝이라고. 그런 창끝이 있었기에 각 민족은 그 시대 세계사의 앞을 가로막는 바위 덩어리를 부수고 세계사를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위안하면서 다시 형이상학의 책상 앞에 앉았다.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어떤 선배님은 고대철학을 하였다. 그러면서 존재와 무라는 개념을 평생 규명하려 고투에 고투를 거듭하였다. 그는 대학교수를 일찍 그만두고 변산반도에서 자연학교를 열고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필자도 그의 활동에 관심이 있어서 부산에 변산반도로 한국을 가로질러 몇몇 후배들과 더불어 찾아뵌 적이 있었다.

하도 오래전이라 그때 누구와 갔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두 가지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하나는 피 이야기이다. 선배님이 가꾸는 논인지 밭인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곳에는 벼인지 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자라났다. 선배님은 그것을 가리켜 보이면서 동네 사람들이 나보고 맨날 게으르다고 하며 웃지만, 피도 생명이고 나름대로 가치를 지닌 것이기에 자기는 이 피를 제거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지다. 선배님의 자연주의적 인생관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보다 충격적인 기억은 그 날 밤의 일이었다. 한 두잔 술잔이 돌고, 이런저런 세상사를 간단하게(마치 플라톤의 대화편 앞부분에서 나오는 쓸데없는 말 정도의 분량에 그친다) 말한 다음, 대뜸 정말 오래간만에 말하는 것처럼 존재와 무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칠 줄 모르고 몇 시간에 걸쳐 존재와 무에 관한 알쏭달쏭한 궤변(?)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저 말이 하고 싶었으면 저렇게 미친 듯 이야기하는 것일까? 역시 철학자는 그 피를 속이지 못하는 걸까. 더구나 변산이라는 그 시골구석에서, 밤새 풀벌레 울음이 그치지 않고 오줌을 누러 문밖으로 나가면 하늘의 별이 맑게 빛나는데, 방안에서 존재는 존재고 무는 무라는 말을 들으니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십여 년 더 지난 다음, 선배님이 그동안 쓴 책을 가운데 두고 몇 회에 걸쳐서 후배들과 대화의 장을 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선배님이 쓴 글을 전체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는데, 도처에 내가 옛날에 들었던 존재와 무에 관한 소위 궤변이 흩어져 있었다. 그게 그렇게도 재미있는 것일까?

궤변이라니, 선배님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남들이 보면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말이다. 선배님이나 우리는 이를 궤변이라 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게 형이상학이다. 하긴 나도 사람들과 더불어 철학에 관해 떠들 때는 이상한 행복감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제 어느덧 형이상학에 빠지는 것 같다. 이 어수선한 시국에 형이상학적인 글을 쓰고 앉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은 정말 해보지 않은 사람이면 모를 것이다.

2)

오래간만에 다시 형이상학 산책을 쓰면서 변명이 길어졌다. 헤겔 논리학은 독특하게 구성된 책이다. 1부는 객관 논리학과 2부 주관 논리학이 구분되는 것도 흥미롭다. 우리가 흔히 아는 논리학은 2부에서 주로 서술된다. 1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논리학이라기보다 오히려 존재론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 같다. 1부는 다시 1권 존재론과 2권 본질론이 구분된다.

대체 헤겔이 논리학의 구성을 왜 이렇게 했는가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나름대로 이해해 보자. 일단 이 자리에서 2부 주관 논리학은 제쳐놓자. 이 부분에 관해서는 헤겔이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면서 2부 앞부분에서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을 서술해 주고 있으니, 그때 가서 논하기로 하자.

1부만 제한해서 논하자면, 1부의 구성은 칸트가 판단론에서 제시한 12개 범주표 즉 판단형식의 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권 존재론은 그 가운데 질의 범주와 양의 범주를 다룬다. 2부 본질론은 관계의 범주와 양상의 범주가 다루어진다는 것은 금방 눈에 뜨인다.

물론 칸트의 범주표는 헤겔 나름의 논리적 체계 속에 재구성된다. 여기서 그 가운데 1권만 우선 보자. 칸트는 양의 범주를 앞에서 내세웠으나 헤겔은 질의 범주를 우선시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헤겔 자신이 ‘존재론의 일반 구분에 관하여’라는 존재론 서문 격 글에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양은 “질이 부정된 것” 이니, 질의 범주가 양의 범주보다 우선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질의 범주와 양의 범주가 균형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1권의 1편은 질을 다룬다. 반면 2편은 양을 다루고, 3편은 척도(양적 무한성)를 다룬다. 칸트 판단표와 비교해 보자면, 질의 범주가 1편에 한정된다면, 양의 범주는 2-3편에 걸쳐서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이점은 차차 다루기로 하자. 여기서는 1편 1장에 집중하자. 여기서 1장은 존재를 다루고 2장은 현존을 다룬다. 3장은 대자 존재이다. 2장 현존을 다루는 부분이 실재성 개념을 다룬다는 것을 본다면, 이것이 칸트 범주표에서는 실재성의 범주 즉 긍정 판단형식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장 대자 존재라는 개념은 곧 질적 무한 판단형식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대자 존재는 ‘무한성의 자기 내 복귀’로 규정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2장 B절 끝에 부정성 개념이 나오니, 이게 부정 판단형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편 1장 존재론은 칸트 범주표에서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 단적으로 말해서 칸트 범주표에서 그런 판단형식은 없다. 대체 왜 헤겔은 현존이라는 범주 앞에 존재론을 따로 집어넣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게 헤겔의 존재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단서가 되지 않는가 한다. 필자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제 설명하고자 한다.

3)

존재란 무엇인가? 필자에게 이 문제가 가슴으로 다가왔던 것은 대학 시절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들어가자마자 대뜸 내세웠던 말이다. 즉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이다. 그러면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를 묻기 위해서 존재 물음이 걸어지는 고리를 찾았는데, 그게 바로 현존재라고 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 속에서 존재는 의식의 시간성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이제 시간성의 개념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하이데거에서 현존재[Dasein]는 헤겔이 1권 2편에서 말하는 현존[Dasein] 일반과 단어는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하이데거에서 현존재는 존재[Sein]가 자기를 드러내는 장소[da]로서 인간 존재를 의미한다. 반면 헤겔에서 현존[Dasein]는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존재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규정성 예를 들어 ‘빨갛다’라든가 ‘둥글다’라는 것과 같은 규정성이다.)

존재와 존재자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존재는 ‘있음’이고, 존재자는 ‘있는 것’이니, 있음과 있는 것은 일반 명상과 개별 대상 정도의 차이 예를 들어 노랑과 노란 것들의 차이 정도이지, 그게 무슨 큰 차이인가? 설혹 플라톤적으로 생각해서 존재는 존재자의 이데아이고 존재자는 그런 이데아가 실현된 개별적 대상이라고 보더라도, 그 의미가 별로 다른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런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하이데거가 이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그토록 역설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막히니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데서 앞으로 더 나갈 수 없었다.

하이데거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필자는 헤겔의 논리학 1편 1장 존재론을 읽었을 때이다. 헤겔이 1장 존재론에서 전개한 핵심적인 주장, 어떻게 보면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주장했던 것이 바로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이다. 그러면서 그는 존재와 존재자를 왜 구분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헤겔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하이데거가 헤겔의 철학에 지고 있는 빚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하이데거나 존재자와 존재를 구별은 헤겔의 논리학에 나오는 착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4)

헤겔에게서 1장 존재론은 본문 내용만 본다면, 아주 짧아서 특별히 무엇을 소개할 말도 찾지 못할 정도다. 더구나 그 내용도 일종의 말장난처럼 보인다. 시원으로서 순수 존재는 아무 규정이 없으니, 무이다. 무 역시 사유에는 직관의 대상이 되니, 하나의 존재이다. 그러니 존재는 무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헤겔의 주장을 들어보라.

“존재는 이러한 무규정적인 직접성 속에서는 오직 자기 자신과 동등할 뿐이며, 또한 타자에 대해서 부등한 것이 아니므로 … 순수 존재는 무규정적인 직접적인 것으로서 존재는 사실상 무이며 무 이상도 그리고 그 이하도 아니다.”(논리학, GW21, 68-69)

“우리는 직관이나 사유 속에는 무가 있다고도 하겠으며, 또는 차라리 무는 순수 존재와 마찬가지로 공허한 직관이나 사유라고 하겠다.”(논리학, GW21, 69)

헤겔의 말은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아주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저 말의 의미만 이해하면, 전체 의미가 이해된다. 너무 쉬워서 오히려 이상하다.

언제가 존재론을 이해하려면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대화편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영어본이지만 대화편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의 논변을 잃다가 마치 최면술 걸 때 보는 중첩된 동그라미를 보는 듯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결국 다시 책을 덮고 말았다.

누구라도 그 책을 읽어보면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헤겔의 말도 그런 말장난과 같게 들리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규정적이니까 무이고, 무는 이미 우리의 생각의 대상이니, 존재다. 여기에 존재나 무라는 말의 의미를 분석하여 자기와 반대되는 것을 끌어내는 것 외에 다른 게 있는 것일까? 이런 식의 의미분석이라면 존재나 무라는 말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끌어내 수 있다. 이런 의미분석을 통해 헤겔적인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끌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존재는 존재고 무는 무다”라는 주장을 끌어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헤겔이 존재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하고자 하는 근본적 주장은 오히려 본문에서라기보다 주석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주석을 중심으로 헤겔의 이야기를 설명해 보자. 그 설명의 한 가운데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와 존재자의 구분이 들어 있다.

헤겔은 1812년 존재론을 1827년 대폭 수정했다. 특히 주석 부분이 많이 고쳐졌는데,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는 않다. 1판과 2판의 내용은 서로 대조하면 서로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하니, 1판과 2판을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참고로 임석진 교수의 번역본은 1판을 번역한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2권 본질론과 3권 개념론은 헤겔이 수정하지 못한 채, 죽었다. 그 결과 이 부분에 관한 2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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