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11-논리학 서론의 이해(전반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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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11-논리학 서론의 이해(1)

1)

앞에서 설명한 것을 통해 헤겔 논리학 이해를 위한 기본 발판이 마련되었다고 본다. 이런 발판에 기초하여 지금부터 논리학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오늘부터 우리가 읽을 부분은 2판의 서론[Einleitung]에 해당하는 부분 즉 ‘논리학의 일반 개념’이다. 1판 서론은 그냥 ‘서론’으로 되어 있지만, 약간의 언어 표현상 차이나 부분적 첨삭을 제외하고는 내용은 같다.

헤겔은 서론에 들어가자마자 우선 학문의 방법이나 개념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다른 학문과 달리 논리학은 자기의 개념이나 방법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통 서론에서 말하는 개념이나 방법은 논리학의 경우에는 논리학이 실제로 전개된 다음에야 얻는 것이니, 지금 서론에서 해명하는 것은 “설왕설래하는 역사적인 의미”(S. 27) 정도에 그친다고 하면서 양해를 구한다.

(앞으로 인용문은 헤겔, 논리학, 재판본, GW 21, 펠릭스 마이너, 1985에 의거하겠다)

2)

그러면서 헤겔은 형식논리학의 문제점부터 제기한다. 형식논리학에서 판단의 형식과 내용은 서로 무관하며, 그 내용은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며, 논리학은 다만 “독자적으로 보면 공허한”(S. 28) 사유의 형식을 다룰 뿐이라 한다.

그러므로 양자의 관계는 “역학적이거나 기껏해야 화학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S. 28) 있어서는 “사유는 소재를 수용하고 이를 형상화한다 할지라도 결코 자기를 넘어서지 않으며” 사유는 “자기를 저버리고 대상에게로 다가서는 일은 없다.” 그러니 “대상은 오직 물 자체로서 단적으로 말해 사유의 피안에 놓인 것으로 머무른다.”(S. 29)

논리학의 형식은 각기 고립되어 있어서 “고정된 규정을 이루면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유기적 통일체를 이루지 못한다”라고 한다. 헤겔은 이런 형식을 “죽은 형식”이라 하니, “그 속에는 생동적인 구체적 통일성을 의미하는 정신이 거주하지 못한다고”(S. 32) 비판한다.

즉 형식논리학은 죽은 자연이나 파악할 때 사용되지만, 자연조차 죽은 것은 아니니 그조차 파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동적 통일성을 전개하는 정신에 관해서야 전혀 무의미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논리학은 진리의 인식과 무관하니 논리학은 “실재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사유의 규칙을 가르친다”(S. 28)라고 말하는 것조차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공허한 형식적 규칙을 배워 무엇하겠느냐는 말투다.

형식논리학의 토대는 의식과 대상을 분리면서 대상을 진리의 소재로 파악하는 흔히 일상적 의식 또는 현상적 의식에 있다. 헤겔은 이런 일상적 의식은 항상 진리를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S. 34)으로 보는데, 이런 입장은 심지어 플라톤의 이데아에도 남아 있어 플라톤은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다만 그것은 감각 세계의 피안에 있는 것이기에 이데아는 ‘감성적 탈자존재’일 뿐이다.

3)

헤겔은 의식과 대상을 구분하는 이런 입장보다는 차라리 지난날의 형이상학이 더 탁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난날의 형이상학은 적어도 “사물을 결코 그 직접태 속에서가 아니라 사유의 형식으로 고양되었을 때만 비로소 진리일 수 있다고”(S. 29) 믿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언어의 범주가 사물의 본질이 된다고 믿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의 범주를 마치 대상으로부터 주어져서 추상된 일반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즉 언어의 범주가 “대상의 가장 본질적이며 가장 고유한 본성을 구성하는 것”(S. 34)이라 한다.

‘근대의 반성적 사유’(여기서는 헤겔 이전의 의미에서)는 “추상하고 분리하며 그런 분리에 체류하는 지성”(S. 29)을 말하는데, 이런 추상적 사유는 지난날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출현했다. 여기서 사유의 범주는 이제 주관적인 것으로 되고, 이는 사물과는 무관한 외면적인 것, 낯선 것으로 되고 말았다. 헤겔은 근대의 반성적 사유가 이성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상식으로 행동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형식논리학의 기본입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헤겔은 의식과 대상을 분리하고 대상을 진리로 보는 “오류를 정신적 우주나 자연적 우주를 망라한 전 영역에 걸쳐서 철저하게 반박하는 것”(S. 29)이야 말로 철학이 할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오류를 제거하는 것은 철학(논리학을 포함한 전체 철학)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이루어야 한다고 하면서 논리학에 앞선 정신현상학의 역할을 제시한다.

4)

그런데도 헤겔은 지난날의 형이상학에서 추상적 사유로의 이행은 불가결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추상적 사유야말로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을 위한 통과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이성 개념에 다다르기 위한 위대한 부정의 발걸음”(S. 30)이라는 것이다.

추상적 사유는 분리하는 가운데 서로 모순된 주장(경험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이르게 되며, “이 모순이야말로 이성을 지성의 제한 너머로 고양하며, 그 제한을 해소하게 하는 것”(S. 30)이라는 사실이 마침내 통찰되었으니, 그것이 칸트 철학이 이룬 업적이다.

칸트가 놓았던 그 단초란 무엇인가? 앞에서 우리가 이미 말했지만, 그것은 곧 판단형식 즉 범주에 고유한 자체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판단형식의 자체적 의미를 칸트는 범주의 도식을 통해 제시했다. 칸트는 이런 판단형식 즉 범주를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선험적 인식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멈추었기에, 헤겔은 칸트 철학의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한다.

“비판철학은 이성이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신의 규정을 서술하게 하는 단초를 마련하게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러한 시도에 깃든 주관적 태도가 그런 단초를 완성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S. 31)

이 구절에서 헤겔이 주관적 태도라고 비판한 측면이 칸트의 어떤 측면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가 범주를 하나의 좌표축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범주를 좌표축으로 보면, 주관적인 좌표축은 불가피하게 물 자체에 부딪히게 된다.

5)

헤겔은 칸트가 비록 물 자체의 문제를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현상에 관한 보편적 지식에 도달했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 인식이 진정하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S. 30)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칸트에서 좌표축을 이용한 인식은 심지어 현상계에 대한 인식조차도 불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지적했다. 경험을 판단형식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직관적으로 통찰하던가 아니면, 영원히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말과 연관하여 헤겔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점은 의미심장하다. “유한과 무한의 규정이 세계 표상에 동시에 적용될 경우 우리의 세계 표상이 해소되어 버린다면, 정신 자체도 두 규정을 자체 내에 포함하는 경우 자기 모순적인 것이며 또 자기 해소되는 것으로 된다.”(S. 31)

그의 말은 비단 물 자체에 대해서만 모순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일상적 경험에서도 모순이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6)

이상과 같이 헤겔은 칸트의 업적과 그 한계를 지적한 다음, 마침내 칸트가 제시한 단초를 발전시킴으로써 마침내 물 자체의 유령을 극복하려 한다. 우선 S. 31에서 S. 35에 걸쳐 전개된 그의 주장을 들어 보자.

“이성이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규정을 서술한다.”(S. 31) 그것은 사유의 형식을 “그 자체에서 연역하는 것”이며, “변증법적으로 고찰하는 것”(S. 31)이다.

사유의 형식은 질료라고 불리는 것을 “어디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이” 자기 자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런 형식은 “실질적이고도 절대적 구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S. 32)

“순수학문은 오직 사상이 못지않게 그 자체에서 사태인 한에서만 사상을 포함하거나 사태가 못지않게 순수 사상인 한에 있어서만 그 자체에서 사태를 내포한다. 학문에서 본다면 진리는 순수하게 자기를 전개하는 자기의식이다”(S. 33)

“사유의 필연적 형식과 고유한 규정이 내용이면서 최고의 진리 자체이다”(S. 34)

“이들이 자기의식적 사유의 단순한 형식일 뿐만 아니라 대상의 지성에 속하는 형식이기도 하다.”(S. 35)

위에서 제시된 헤겔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①사유의 형식은 그 자체에서 구체적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②이 사유 형식은 자기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③사상과 사태가 일치하게 된다.

①과 관련해, 우리는 칸트가 판단형식 즉 범주의 의미를 도식을 통해 규정했다는 것을 말했다. 이 도식은 판단형식이 그 자체로 지니는 의미이며, 판단형식을 통해 규정되는 경험의 내용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②과 관련해 우리는 헤겔에서 하나의 판단형식이 모순의 경험과 반성 개념을 통해 새로운 판단형식으로 이행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③은 앞의 ①과 ②에서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헤겔은, 사유의 자기 운동 개념을 통해 헤겔은 칸트가 부딪혔던 “물 자체의 유령” 또는 “그 어떤 내용으로부터도 절연된 추상적 환영의 허망함”(S. 31)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헤겔은 자신이 칸트의 철학을 계승해서 그 단초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철학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규정한다.

7)

논리학의 이상 기본 개념은 그저 전제된 것이 아니라, 논리학에 앞서서 인식론을 전개한 정신현상학을 통해서 입증된 결과이다. 정신현상학은 대상과 대립하는 의식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절대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의식과 대상, 확신과 진리 사이의 분리가 제거됨으로써 의식과 대상이 합치하며, 확신은 진리가 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사유 형식 자체가 곧 구체적 내용과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이 절대지가 학문 즉 그 가운데서도 형식적 학문인 논리학의 출발점인데, 우리는 칸트의 판단형식이 지닌 고유한 의미 즉 도식을 통해 주어지는 의미를 통하여 이미 설명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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