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싱[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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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싱

1)

‘패싱’이란 말은 흑인이 백인 행세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가 넬라 라슨의 동명 소설 패싱을 영화화한 것이다. 넬라 라슨은 1929년 이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 시기는 미국 산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흑인 중산층이 형성된 시기다. 넬라 라슨은 어머니가 백인이고 아버지가 흑인인데, 백인 어머니가 백인과 재혼하여 백인 가정에서 살았다. 그녀의 경험이 이 소설의 바탕이 되었다.

영화 감독은 레베카 홀인데, 이 작품이 그녀의 첫 작품이라 한다. 넷플렉스 오리지날로 발표됐다. 영화는 소설을 각색하면서 구성을 약간 바꾸었지만, 그 흐름이나 중요 장면은 변함이 없이 소설에 충실한 편이다. 다만 소설에서는 결말을 모호하게 처리했지만, 영화는 결말을 명백하게 함으로써 감독의 입장을 드러낸다.

영화 패싱은 빛에 관한 영화다. 두 명의 여인 아이린과 클레어가 등장한다. 둘 다 흑인이지만 피부가 희다. 클레어는 패싱을 통해 부유한 백인 남자 존과 결혼했다. 존은 남아프리카 출신이며 흑인을 혐오하며 즐겨 검둥이라는 모욕적 언어를 사용한다. 아이린은 비록 패싱에 성공했지만 백인 세계 속에서 외롭고 또 외롭다.  

아이린은 흑인 남자 브라이언과 결혼해 두 아이가 있다. 브라이언은 성공한 의사이고 아이린은 중산층의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다만 브라이언은 흑인이 구타당하는 현실에 분노하면서 미국을 탈출해 브라질로 가고 싶어 하지만, 아이린은 브라이언을 가로막아 왔으며 미국 중산층 백인이 누리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분노한 브라이언이 언제 안온한 삶을 파괴할지 내심 두려워한다.

2)

아이린은 어릴 때 뉴욕 할렘가에서 클레어와 같이 자라나 가까웠으나, 클레어가 백인 아버지가 죽은 다음 백인 고모의 집으로 간 이후 만나지 못했다. 어느 여름날 햇볕이 뜨거워 숨 막히던 아이린은 백인이 드나드는 호텔의 찻집으로 도피한다. 거기서 12년 만에 클레어를 만난다.

영화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색깔을 제거하고 흑백 장면으로 일관한다. 전체 장면에서 빛과 어둠이 강하게 대조된다. 한편으로 빛과 어둠은 삶의 밝은 측면과 어두운 측면을 의미한다. 백인이 드나드는 호텔 찻집은 아주 밝은 색이고 반면 아이린이 사는 집은 어둠이 깔려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백색의 빛은 너무나 밝아서 사람을 강박하는 것 같다. 뜨거운 여름 햇볕은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 정도다. 영화에서는 검은색도 빛을 낸다. 흑인의 재즈 파티에서 감독은 검은색을 많이 쓰는데, 이때 검은색은 자유로운 생명의 리듬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마치 아프리카의 검은 숲을 의미한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패싱에 대해 비판적이며 심지어 경멸적이다. 패싱에 관해 아이린은 자기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아이린은 늘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있다. 그녀는 흰색의 드레스와 모자를 쓰고 다니며, 집안의 가구나 장식 등은 백인 중산층의 집안의 모습과 다름없다. 아이린의 내면에는 백인 중산층의 삶에 대한 선망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반면 클레어는 “위험의 모서리에 올라서 있는, 언제나 위험을 알고 있으면서도 뒤로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는” 성격이다. 가난한 백인의 딸로 자라나고 백인 고모들의 하녀처럼 산 클레어는 적극적으로 패싱을 통해 흑인의 세계와 단절하고 백인과 결혼하여 백인의 삶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클레어는 행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백인의 백색의 빛 속에 가두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3)

클레어는 다시 흑인의 삶을 되찾고자 한다. 그 때문에 어릴 때 친구인 아이린을 통해 할렘의 세계로 들어오고자 한다.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클레어에게 흑인의 삶은 자신의 고향이며, 그것에 대한 향수는 “통증과 같이 절대로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클레어에게는 흑인의 눈이 있다. 그 눈은 “신비스럽고도 무엇인가를 감추는” 눈이다.

내가 이 영화를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클레어의 내면에 있는 욕망이 단순히 흑인적인 정체성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인간의 삶에 있는 자유로운 생명의 힘이 아닐까 한다.

영화는 비극적으로 끝난다. 클레어가 흑인 세계로 들어오자, 아이린은 위험을 느낀다. 아이린은 브라이언이 클레어에게 매혹당할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자신이 지키조하 했던 중산층의 삶이 깨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아이린은 클레어에게 흑인을 혐오하는 그녀의 남편이 클레어의 정체를 알면 어떻게 하냐면서 클레어를 막으려 했으나, 클레어는 이미 결심한 게 있다.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그러면 남편을 떠나 흑인의 세계로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아이린은 그게 더 두렵다. 그러면 자기는 브라이언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아이린이 남편인 브라이언과 클레어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절망하는 장면이다. 아이린의 시선은 창밖을 향한다. 밝은 창문을 뒤로 하여 브라이언과 클레어의 모습은 어둡다. 이 어둠은 한편으로 아이린의 시선을 가로 막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브라이언과 클레어를 가깝게 묶어주는 힘이다.   아이린은 두 사람을 보고 절망하지만 클레어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 오고 있다.  
출처: https://www.nyculturebeat.com/index.php?mid=Film2&document_srl=4048076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마침내 일이 벌어진다. 아이린은 클레어를 초청하지 않았지만, 브라이언이 클레어를 초청했다. 파티에서 브라이언은 클레어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혼자 소파에 앉아 브라이언과 클레어를 보던 아이린은 절망해 창가에 가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운다. 외로워하는 아이린을 보고 클레어가 아이린이 있는 창가로 다가갔을 때, 클레어의 남편 존이 파티 장소에 찾아와 클레어에게 사기꾼이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다가간다.

갑자기 카메라는 창밖에 떨어진 클레어를 멀리서 비추어준다.  클레어의 등 위로 백색의 눈이 덮인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단순한 아이린의 실족으로 처리하고 만다. 그러나 소설 작가나 영화 감독은 이 사실을 다르게 설명한다.

클레어가 떨어지기 전에 아이린은 창가에 있는 클레어에게 손을 뻗었는데 소설에서는 그게 클레어를 보호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클레어를 민 것인지 모호하게 했다. 소설에서 아이린은 자신이 혹시나 민 것이 아닐까 스스로 의심하지만, 전체 흐름은 오히려 클레어가 스스로 뛰어내린 것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아이린의 손이 확실히 클레어를 민 것으로 보이고, 아이린이 자기 손을 감추려 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아이린의 죄의식을 분명하게 한다.

4)

클레어의 죽음은 물론 억압적인 백색의 지배를 의미한다. 영화는 처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으로 시작해서 점차 그림자가 들어오면서 사물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끝날 때 영화는 다시 사물의 모습이 흐려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으로 되돌아간다.

클레어의 죽음은 또 다른 의미층을 지니는데, 그것은 클레어의 실패이다. 클레어는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 실패는 백인 세계 속에 성공적으로 패싱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백인의 세계 속에 녹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힘이 그 내부에 은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클레어의 눈 속에 감추어진 신비한 무엇이다. 곧 자유로운 생명의 리듬일 텐데 그 힘이 백인 사회에 대해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브라이언을 매혹한 힘이다. 

그러나 이 힘은 동시에 클레어가 백인의 삶에서 다시 흑인의 세계로 되돌아오도록 강제했던 힘이다. 그 힘은 현실 속에서는 결코 자신을 실현하지 못하는 자기 파괴적인 힘이니, 클레어의 삶은 처음부터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아이린의 삶은 백인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클레어처럼 백인의 세계 속으로 잠입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 전체는 백인의 삶을 모방한다. 아이린은 말하자면 문화적 차원에서 패싱한 셈이다.

현실에서 아이린의 삶은 성공했다. 그녀는 백인 중산층의 안정된 삶을 실현했다. 그 때문에 클레어는 아이린을 존경한다. 하지만 아이린의 삶은 자신의 본질을 억누르고 제거한 결과 얻어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프리카의 숲을 버렸다. 그리고 살아남은 것이지만, 그 삶이란 결국 백인의 세계에 종속된 삶일 수밖에 없다.

소설 작가는 소설에 들어가기 전에 흑인 시인 카운티 컬런의 시 구절을 소개한다. 여기 인용해 보겠다.

3세기 떨어져 있다네

그녀의 아버지가 사랑했던 풍경들로부터

향기로운 작은 숲과 계피 나무

나에게 아프리카란 무엇인가?

우리도 마침내 아이린을 따라 백인의 세계에 도달했다. 민주화와 근대화를 이루었다. 20세기 초 흑인 사회가 할렘 르네상스를 일으켰듯이 우리 역시 백인 문화를 소화한 한류를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우리의 고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소설가 넬라 라슨은 검은 생명의 리듬에서 자신의 고향을 찾았다. 우리에게 고향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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