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소 시대의 혁명: 리좀의 흐름 [천 하룻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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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소 시대의 혁명: 리좀의 흐름

2024년 07월 22일 대서(大暑)

– 평상 위에 누워서 하늘을 보시라, 별빛이 보이시려나?

 

지금껏 여러 서양 철학사들을 읽으면서, 그 철학사들이 정당성과 진실성을 지녔다고 여겼다. 대부분 앵글로색슨계열의 철학사는 인류가 점점 더 확실한 지식을 갖춘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그들이 언어와 논리를 정초하여 기본으로 삼고, 사실들에 접근하는 태도를 유지한다고 본다. 이들의 철학사 글쓰기의 전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등 다른 학문과의 연관 위에서 철학이 각 분과 학문을 점검·검토할 권리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서술한다. 한때 언어분석 철학은 철학의 교통정리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그럴까?

나로서는 박홍규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때, 철이 없기도 하였고, 짧은 수강 기간에 들은 것들이 정리될 수 없어서, 벩송 전체를 여러 번 읽고서 나름으로 선생님의 설명을 지침으로 삼았다. 그가 말하기를, 철학은 자료들을 총괄적으로 앞에다 두어 놓고서 다루어야, 허튼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간략하게 보면, 공간과 시간을 둘 다 놓고 나아간 철학자는 플라톤이고, 공간을 놓고 나아간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며, 시간을 놓고 나아간 철학자는 벩송이라 했다. 철학은 이 세 가지 길 외에 없다는 것이다. ‘벩송의 작품을 잘 읽으려면, 자네는 수학사를 공부해야 하네’, 수학사를 몇 권 읽고 난 뒤 면담할 때는 ‘물리학’을, 그리고 또 ‘생물학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다. 아마도 관련 서적들 몇 권 읽고 또다시 상의하러 갔더라면, 심리학을 읽으라고 하셨을 것이다.

스스로 잡학파라고 하듯이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각 과학사의 뒷이야기까지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인간이 그 시대에 부딪힌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무척이나 노력했고, 각 분야 방면으로 내공을 쌓았구나 하면서 감사하기도 했고, 한번 살다가 갈 세상인데 모진 고문을 받을 위기에도 처했고 멸시와 비난 속에 고통과 천대를 견디기도 했던 인물들에 감동하기도 했다. 최근래에 우리나라의 질병과 의학의 뒷이야기에 관한 글을 접하고 또 한 번 인간은 참으로 내공이 쌓인 분들에 의해 이 세상에서 그나마도 한시적으로 생명 보존과 안녕을 누리고 산다고 생각하면서, 사유의 지층이 얼마나 두껍고(기억), 알려지지 않은 구석구석들(추억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감탄한다. <이런 책도 있다는데, – 1438년(세종 20)에 원나라 『무원록(無寃錄)』을 참조하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였다. 시체 검안에 대한 책이라 한다. 비샤를 떠올렸다.>

이런 과학 이야기를 읽는 것을 철학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나로서는, 그들이 탐만치 중의 하나에 빠지거나, 또는 세 패거리(카르텔)에 포섭되어 복속하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여기며, 그들을 우파라고 부를 수 있다. 당연히 패거리들에게 아부하고 포로를 자청하는 이들은 극우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패거리 봉사자들의 철학하는 태도는 원리를 마치 신앙처럼 받들고 있다. 이에 비교해 진솔한 철학자는 적어도 19세기 중반 이후로 실재성의 지속을 탐구하며, 지층 속에서, 기억 속에서 현재에도 존속하고 있는 실재성을 탐구한다. 그리고 심층에서 표면으로.

긴 철학사들과 더불어 간략한 철학사들 여러 권을 읽어보면, 철학사를 통해 인류의 지식이 발전한 변화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발전들은 체계화와 분야의 확장일 것이고, 확장의 차원에서 여러 분과 학문의 발생과 전개는 아직도 계속된다. 체계화는 간단할 수 있으나, 확장은 좀 더 고민해야 했다. 아마도 분과들에서 분화가 독립성을 지니고, 게다가 이런 분화의 분류에서 학문의 성립에는 강도(내공)가 필요하다. 사회학, 인류학, 정치경제학 등의 성립을 보면 그러하다. [생태학과 유전자학 등은 생리학과 뇌신경학에 이어서 체계화를 정립하려 한다.]

우선 시대의 변천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 중세 철학, 르네상스와 빛의 시대 철학, 그리고 근대(19세기)철학, 20세기 현대철학, 21세기 새천년 철학 등으로 구분할 때, 철학사는 발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서양 철학사의 발전을 인식과 인식 대상에 관한 것에 한정한다면, 우선 수학사를 한두 권을 읽기를 권한다. 수학사를 잘 들여다보면, 철학사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다. 고대에는 상식(sens commun, 5관)을 통해 원리와 기원을 탐구하였다. 그다음에 물리학 법칙의 발견으로 양식(봉상스, bons sens)의 시대를 열면서 이원론(평행론이든, 대칭론이든)의 시대를 거쳐 가다가 그래도 하나로 통일, 또는 종합을 하려 했다. 봉상스란 한 방향이란 뜻도 있는데, 원리에서 법칙으로 가는 길이든, 그리고 개별적 사실로든(합리론), 개별적 사실에서 일반화의 법칙을 추론하여 추상화의 원리로든(경험론이든), 체계가 먼저 있다는 것을 버리지 못했다. 이런 체계화의 구성(constitution), 또는 구축(construction)의 학문이 현대에도 주류라고들 한다.

수학사는 이런 과정들에 부딪히면서 자기 변신을 했다. 수와 도형에서, 분석기하학과 좌표기하학이 나올 시절에, 거듭제곱에 관한 지수의 계산이 나왔고, 그다음 미적분이 나오면서 힘과 에너지의 표현 방식을 바꾸었으며, 입자 물리학과 전자기학의 발전으로 확률론의 개연성 이론이 나왔으며, 개연성 이론의 적용에서 날씨의 자료들에 대한 계측방식의 예측 불가능에 대한 현재 상태의 서술로서 복잡계이론도 나온다. 서양에서 다른 학문은 복수를 쓰지 않는데 수학만은 복수로 쓴다(mathématiques). 기하학은 오랫동안(중세는 당연하고 근세까지도) 유클리드 기하학이 표준이었으나, 공리에 대한 선 전제에 의문을 품으면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고, 이와 나란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수의 단위와 언어의 단위의 일방향(봉상스)으로 논리를 전개하다가, 수의 단위든 논리의 항(용어)이든 단위의 전제가 비규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파라독스들이 등장하면서, 수학은 무한에서 다루는 방식이 복잡계보다 더 넓은 영역으로 열리게 되었다. 무한의 열림은 신의 현존을 무색하게 하였다.

수학사의 관점을 가지고 보면, 소쉬르의 언어학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사물(실재성)에 대해, 언어(입말이 아니다)는 기표(청각기호, 기호의 대상)와 기의(사유 이미지, 대상의 의미)로 표명되는데, 이 기표와 기의는 실재성(사물들)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챈 것은, 구조주의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철학자들이 1968년쯤에서야 나왔고, 새로운 생성의 철학을 말하게 될 것이다. 낌새를 알아챈 이는 그래도 푸꼬였고, 이를 전개한 이는 들뢰즈였다.

철학사를 넘어서 학문의 발달사는, 일반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공간화된 설명방식이 무너지는 과정이며, 개별 학문의 자기 위상을 정립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우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대해 지동설로서 천문학이 르네상스에서 성립하고, 곧바로 이어서 고대의 자연학(phusis, 퓌시스)에서 갈릴레이의 물리학(physique)이 성립한다. 그다음에 연금술이라 불리는 알-화학(al chimie)에서 분자의 성질 규명해낸 화학(la chimie)으로 발전한다. 곧이어 고대의 그리스 생물학과 다른 생물학이 전개되기 시작하며, 화석을 규명하는 생물학과 인간 신체 해부학의 도움으로 의학이 발전한다. 생물학과 의학이 뇌 신경과 신경계를 규명하기 시작하면서 심리학이 발달하게 된다.

수학들과 다른 과학들(소위 자연과학들)의 발달은 19세기 말에 철학사를 바꾸어 놓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해왔던 패거리들은 언어와 논리를 우선으로 또는 토대로 시작하여, 고대로부터 단련된(?) 논리 위에 사물들(원자들, 자기장이든, 신경계든)을 설명해야 한다고 지금도 주장하는 이들이 AI를 통해서 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학문의 확장을 논리 위에 세우고자 한다.

천문학은 천문학대로 우주의 크기와 그 발생에 관한 연구가 있고, 물리학은 물리학대로 원자보다 적은 입자들, 그보다 더 내면의 깊이의 구성체(쿼크든, 기묘든, 끈이든, 초끈이든)를 설명하려 든다. 생물학은 포유류 형태의 변환들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동물들(곤충들, 연체동물, 균류)과 더불어 생명체의 변형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여, 생명체의 봉상스(한방향)의 진화를 설명하기에 이른다[이에 속하지 않는 것은 넌센스(non-sens, 농상스)인 셈이다]. 물리학이든 생물학이든 이런 설명에는 논리와 언어에서처럼, 기호 또는 상징(생볼)에 의한 규약(기준, 코드화)이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게 여기는 생각에는 은근슬쩍 물리학에서 기호의 개입처럼, 생물학에도 유전자의 분자배치들(TGAC)에 개입하여 해석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생각이 다른 학문에서도 제기되면서, 수학과 논리의 영역은 실재성과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즉 상징계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과 전개에서 깨닫게 될 것이고, 논리는 선 전제 미해결의 오류로 파라독스 또는 자가당착(개구즉착)에 이른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천문학과 물리학은 실재 세계에서 운동과 지속이 공간에서 운동과 계속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안다. 원자들의 결합은 동일한 원자가 다른 어떤 원자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실재로 안정된 분자일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폭발하는 경우도 있다. 분자 덩어리는 무기물로도 있을 수 있고 유기물도 있을 수 있다. 생명의 유기적 조직화에는 무기물을 보태어 유기물을 함께 종합하고 있다. 이쯤에서야 천문학에서 우주의 구축, 물리학에서 운동과 화학에서 구조 등은 생명체에서 조직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로운 체계화가 필요하였고,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혼성(composant)하여 하나의 동일성(단위,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혼성의 동일체로서 정체성(l’identité)이, 구성과 구축에서 상징의 동일성 원리(le principe d’identité)와 용어가 같지만, 실재성과 가상성 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이런 유기체들의 조합(혼성)으로서 사회와 국가라는 조직은 물리학적 원자들의 결합이나, 유기체 분자들의 혼성과는 다른 방식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유기체들의 관계와 연관 속에서 구성된 사회체(socius)란 단위는 물체들의 단위와 달리, 과거를 기억(역사)하고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만들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 유기체 중에서 인간이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를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은 여느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산물이다. 자연으로부터 탐구가 실재성을 다루는 것이다. 패거리(국가권력, 종교권세, 지식권위)들은 선 전제로서 통일성이 먼저 있다고 여기고, 그리고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전혀 다른 인식의 수준을 가졌다고 하며, 봉상스의 발전에서 지성(오성이든 이성이라 하든)이 어떤 생명체들과 다르다고 여겨 이기주의와 오만에 빠졌다. 이 오만의 바탕에는 종교 무오류의 오만이 패거리를 돕고, 게다가 인식에서 완전하고 통일적인 하나의 체계가 있다는 패거리들과 합친다. 세 패거리 중에서 이기주의 탐욕은 식민지 수탈과 착취를 정당화한 국가가 그 소수의 탐만치를 부추겨 탐욕의 사적 이익을 확대하며, 가족, 사회, 국가의 체계를 정당화하였다. 이기주의 탐욕에 빠진 자들이 사악한 무리임에도, 사악함을 감추기 위해 종교의 무오류와 지식의 통일성을 서로의 필요로 의해 거리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패거리들에 저항하며, 프롤레타리아 국가주의를 주장한 맑스가 모순을 보았다고 한다. 식민지 수탈에서 제국주의가 형성될 때, 레닌이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조직화를 만들어냈으며, 맑스 말대로 제국주의가 공황에 빠져 자기들의 죄과를 감추기 위해 세계대전을 일으킬 때, 식민지 수탈에 항쟁하던 중국 인민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이고, 헤겔이 말하는 시민의 자유에서 인민의 자유로 확장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조직화의 방식은 자연의 풍토와 영토에 따라 달리 문화적 창달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여러 다양체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것을 짓누르고, 제국주의 식민지와 다른 방식으로, 규소 문명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제국을 형성하려 하고 있다고들 한다. 이들의 패거리는 정보의 독점화로서 디지털과 그에 필요한 에너지의 장악에 열을 올리고 있고, 발표는 잘 안 하지만 생명체의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미국의 탄저균 연구소가 있다고들 한다.>

심리학이 뒤늦게 영혼과 정신에 대한 용어의 구별을 시작한 것이다. 정신론(spiritualisme)에서 정신은 원리와 공리를 지닌 의식이 먼저라고 믿고서,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과거의 전승과 습관을 유지하면서, 인간이 하늘의 자식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자연에서 단세포로부터 진화한 동물로서 인간의 영혼을 주장하는 이들을 동물 취급하였다. 지금도 개돼지 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들이 신의 자식이라 신앙하고 있는 반증이다. 패거리의 정신이 하늘에서 또는 신에게서 온 것이라는, 선 전제의 허구를 아직도 주장하는 배경에는 유일 신앙자들의 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신은 누가 만들었는데? 라는 질문에, 그들은 마치 마남 사냥하려는 듯이 덤벼든다. 기억, 그것은 생명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속하고 있다. 그것을 바깥에서 설명할 수 있는 예가 바로 지층일 수 있고, 생명체들의 DNA일 수 있다. 다윈은 지질학을 이용할 줄 알았으나, 지층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 이해하는 작업에 이르지 못했으니, 시대의 한계였다. 그럼에도 기억과 지층에 대한 학문은 진화론이 창안되는 시기에 성립하기 시작한다.

물론 사회학이 진화론과는 거의 동시대적이다. 유기체들 사이의 관계와 연관이 일으킨 것은, 수학, 물리학, 화학, 유기체론의 생물학 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집회 결사의 조직체의 활동방식은 법률적 제도에서와 다른 방식들도 많다. 고대로부터 수도원도 있었고, 불교처럼 걸승들의 집단도 있었다. 사회는 권력, 권세, 권위의 세 패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져 왔던 것이 많음에도, 사람들이 성(城, 폴리스, la cité) 안에서 조직화된 제도가 정당한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 규소의 시대(예로 손전화)는 성벽이 해체되어 남아있지도 않다 – 인간은 다양한 학문들의 연계를 통해서, 도구와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생산양식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키우스(socius 사회체, 사회권의 공동체)가 품앗이 하듯이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갈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패거리 문명론과는 다른 문화론을 생성하며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과학이란 이름으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바닥에서 상층을 전복하려는 학자가 맑스인 셈이다. 이런 시도로서 공공재의 인민화 작업이, 공공재 사적 소유의 제국에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 점점 확장되어 간다는 것이 세계사의 발전이다. (57RMA)

*

지혜(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삶은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벩송은 고대에서 상층의 이데아론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갈릴레이의 빗금을 타고 내려와 르네상스 이래로 표면의 이원론의 방법이 제기되었고, 그다음으로 심층으로 또는 안으로 파고들었다고 했다. 상층시대, 표면시대, 심층시대이다. 프로이트와 라깡은 이런 관점을 상층(초자아, 상징계), 표면(자아, 상상계) 심층(Id, 실재계)라는 공시태의 도식을 만들고 논리적 구조로 해석하였다. 이들과 달리 벩송은 통시태로서 탐구와 생성과정의 사실들과 상태들을 드러내려 한다. 이를 이어받은 이가 들뢰즈일 것이다.

그런데 표면의 이원론 이후 전개과정은 흥미롭다. 이원론의 좌절은 칸트의 형이상학 불가능성의 제기로 상층을 규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헤겔이 표면에서 다시 상층의 절대자로 올려놓고 절대자의 완성체를 통일체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국가주의의 한 패거리가 성립하였다. 다른 한편 상징의 상층을 허구(또 다른 이야기, 파라독사)로 간주하면서, 표면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학문의 탐구가 있으니, 생물학의 지층을 통한 고생물학이 나오며, 벩송의 기억론도 나온다. 말하자면 서양 철학사에서 상층에서 표면으로(근대화), 표면에서 심층으로(근대화의 탈피, 학문적 탈근대화) 탐구의 길을 열었다. 봉상스(한 방향)의 주장자들은 상층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으나 상징성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성에서 보아, 심층으로부터 발생과 창발의 길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 노력하고 강도(내공)를 높이는 중이다.

이러한 상층, 표면, 심층으로 구분의 용어는 들뢰즈의 것이다. 그는 구조주의가 파라노이아 현상에 메여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참주(크리스토스, 원리)가, 나아가 신이 먼저 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광기에 빠져있다고 하는 것은 들뢰즈 보다 먼저 푸꼬의 이야기, 광기의 역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들뢰즈의 표현으로 의식을 다루는 자들에 대한 평가이다. 프로이트와 라깡은 상층의 원리 또는 논리로부터 현실과 사태(사건)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면의 이중성을 알아챈 이는 데카르트였다. 그런데 봉상스의 길은 앵글로색슨의 방법이다. 이에 비교해 넌센스(농상스)의 길을 개척한 것은, 파라독사를 눈치챈 러셀이 아니라, 파라독사를 전개한 수학자이자 작가인 루이스 캐럴이라 하며, 소설가로서 조이스를 꼽고 있다. 그리고 심층에서 농상스(넌센스)의 길을 개척한 이들로서는, 푸꼬가 찬사를 아끼지 않은 레이몽 루셀이며, 들뢰즈는 내재적 실재성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시를 쓴 말라르메와 아르또를 덧보탠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상층을 규준(코드)으로 하는 사고를 하는 이를 파라노이아라고 하고, 표면의 적용과 발생이라는 이중적인 측면에서 봉상스가 적용의 오류에 빠진다고 지적한 이들을 도착자(뻬르베르)라고 부르며(새 시대 알리는 시인들, 새 소식을 알린 단편소설(la nouvelle)을 쓰는 이들이 그 예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하는 자들은 우글거리는 심층의 생성과 창조의 발생을 드러내는 자들로서, 이들을 스키조라고 한다.

패거리들은 규소 시대 이전에 이런 도착자들에게 겁을 주고 위협하면서 포섭하거나 포획하여 자기편에 복속시켰는데, 대혁명 이후 인민의 깨우침 이후로 역사는 느리게 가는 것 같지만, 도착자들이 패거리를 유머 삼으면서, 파라독사의 글들(단편소설이든 장편소설)을 쓰면서, 모른 체 딴짓하는 듯이 보인다. 패거리들이 스키조라 불리는 분열자들을 예전에서 이교 (소두)집단 또는 이단 집단처럼 마남 사냥을 하였으며, 소련과 중국 성립 이후에도 빨갱이 사냥(매카시선풍)을 하려고 덤벼든다. 그러나 분열자는 패거리들이 기표화 하거나 법제화(성문화)하는 방식과 달리, 자신들의 실재성 이야기가 인민들 사이에 입말로서 말투로서 또는 이미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3천 년의 철기 문명에 비해 규소 문화는 백 년도 아직 안 된다.

규소 시대에서 파라노이아의 패거리들이 도착자들의 우화와 마술과 같은 이야기(반지의 제왕, 해리포터)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그래도 이미지를 장악하기 위해 만화영화와 전자게임을 통해 젊은이들을 묶어두려고 한다. 젊은이들이 리좀으로 연결과 연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찾아내는 시대가, 마치 자유의 확장처럼, 이제도 아제도 진행 중이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을 쓰고 30여 년에 대혁명이 있었고, 맑스가 자본론을 쓰고 50여 년 만에 레닌이 새로운 국가체계를 만들었고 그 여파로 이차 대전을 거치면서 30여 년이 지나 마오쩌뚱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면서 세계는 거의 양분화되었고, 이런 양분화의 균열로 표면에서 리좀들의 생산이 새롭게 저항과 혁명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글을 쓴 것은 들뢰즈였다. 네트워크(WWW)가 인민들의 손안에 – 부처님 손바닥에처럼 말이다. – 들어온 것은 30여 년쯤 될 것이다.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 이는 푸꼬였다.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쓴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혁명은 도래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는 이들이 있다. 들뢰즈는, 혁명은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혁명은 내재성, 실재성의 표면화로서 용출선을 드러내는 과정 중이며, 이제 여기서도 진행 중이다.

제국이 무너지는 소리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들린다고 한다. 제국주의가 무너지지 않고 변신하였듯이, 신을 제거하고 돈을 받드는 제국도 변신할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패거리의 편에 끈을 잡고 그들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며, 일제 부역자들의 망령과 탐만치에 젖은 이들과 더불어, 상징계의 끝자락을 잡고서 문자화와 판단(심판)을 남발하고 있다. 이 남발이 제국처럼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이다.

젊은이들의 실재성 발현은 그들을 유머극장쯤으로도 여기지 않고, 그들의 문장들이 파라독사로서도 재미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패거리들이 자기 언어와 문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안다. 단지 현재로서 탐만치 세상에서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도 안다. 김건희는 영부인이라는 상징을 통해 파라노이아로서 실행하고 있다고 새 소식에 나오는데, 그녀는 검찰의 조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검찰을 불러서 포섭하고 포로로 삼으려 했다. 이것은 탐만치에서 치(癡)자처럼 패거리들이 치졸한 제국주의 방식과 같이, 식민지지배를 하고 있다고 믿는 파라노이아와 같다.

농상스(반대방향)이면서도 놀라운 앨리스 이야기와도 같지 않은 이야기를, 패거리의 끄나풀이 언어와 문자 또 그림 이미지로 펼친다고 해도, 젊은이가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다. 돈이라는 신을 받드는 자들이 용비어천가를 부르듯이 꼬리를 흔들며 따라가는 주구(走狗)들이 있을 뿐이다. 이들을 처분하는 방식은 프랑스 대혁명의 단두대와 두 번의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들처럼 총구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다른 것도 있다. 이미 역사에서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 내렸고, 총에 맞아 최후를 맞게도 했으며, 여럿을 감옥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들의 신인 돈, 부정하게 축적한 돈(신)을 환수해야 할 것이고 더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시민들은 촛불의 항쟁을 실천해 보았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흐르고 있다. 리좀의 흐름처럼.

규소 세기의 변화는 달리 표출되고 있나니. 벩송이 말한다. 역사에서 자유 용출은 간헐적이지만 열정적이라고.

(5:10, 57RMA) (6:19, 57RMB) (6:32, 57RM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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