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사학자 이혜옥 선생의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글을 읽다, 2021)를 읽고 [이종철 선생의 에세에 철학]
재미 사학자 이혜옥 선생의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글을 읽다, 2021)를 하루 만에 단숨에 읽었다. 2년 전인 2022년 4월경 나는 저자가 의왕시에 위치한 한 출판사에서 출판 기념회를 할 때 우연한 기회로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가정집을 개조해 출판사로 운영하는 곳에서 자그마한 몸집의 저자가 2시간 넘게 책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질의응답을 할 때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 그때 저자가 사인한 책도 선사를 받았고, 내 차로 전철역까지 모셔 드리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 사이 무슨 바쁜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잊고 있다가 이제야 읽은 것을 보면 책도 아마 인연이 따르는 듯싶다.
이혜옥 선생은 미국의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사서를 하다가 뒤늦게 본격적인 학위 과정 공부를 시작해서 박사 학위 논문으로 이 책을 완성했다. 저자는 1904년 <강철 군화>의 저자로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잭 런던(Jack London)이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의 러-일 전쟁 종군 기자로 대한 제국에 5개월간 파견되어 쓴 신문기사와 여행기 그리고 많은 사진에 관해서 쓴 영문 논문 <History of Early-modern Korea Through the Eyes and Pen of Jack London, 1904>에 기반해 썼다고 밝힌다. 저자는 이 논문에서 일본의 속국이 되기 삼십여 년 전에 한국인들이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여했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그 당시의 여러 신문기사와 한국, 미국, 러시아, 일본 정부의 국가 공문서에서 찾아낸 기록들에 발로 뛰어다니면서 찾아냈다. 아울러 한국인들은 러시아군에도 전투 병력 또는 정탐 군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한국인들은 6.25 전쟁에서 동족 상잔을 겪기 훨씬 전에 이미 러-일 전쟁에서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된 배경에는 조선의 몰락과 함께 만주와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생존을 위해 일본의 앞잡이 노릇한 조선인들이 있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대표적으로 유대인을 상징하는 말이지만, 한인들 역시 유대인 다음으로 전 세계에 걸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매 장을 여러 버전의 아리랑으로 시작한다. 아리랑은 한인들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노래라 한인들이라면 어디에 있든 잊지 않고 부르는 노래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아리랑~아리랑~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 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에는 어쩔 수 없이 처자를 데리고 고향 땅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던 한인들의 애절한 한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한인들의 디아스포라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19세기 중반 이후 초근 목피로 연명하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나 그 밖의 땅으로 이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이유로 조선을 떠난 것이다.
경제적 이유로 조선 땅을 떠난 최초의 기록에 따르면 임란 전에도 있었다. 그 당시에도 가난과 학정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월경하다가 목숨을 잃은 기록들이 있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으로 1860-70년대에 극동 러시아와 만주로 대거 이주했던 주원인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반-상 차별의 봉건적 신분관계와 억압적인 관료주의, 과도한 세제-백골징포-의 문제에 있었다. 조선이 후기로 내려올수록 민란이 잦았던 것도 삼정문란에 따른 과도한 세금 포탈 때문이었다. 죽어서 백골이 된 사람이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태중의 아기에까지 세금을 매겨서 수탈하니 가뜩이나 어려운 소작인들이 생존을 이어가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런 사정을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의 이야기에 잘 나와 있다.
“남편이 병들어 죽은 지 이미 3년이 되었는데도 대정을 하지 못하여 아직도 배골의 신포를 바치고 있는데 지난해 일곱 살 난 아이가 세초에 들어갔고 등에 있는 네 살 난 아이도 올해 세초에 들었습니다. 종리 기필코 보존하고 있으려 했던 것은 남편의 외로운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감당할 수 있는 형세가 없어졌습니다.”(71-72쪽)
사농공상에 기반한 조선은 그야말로 힘없는 백성들을 마른 걸레 짜듯 수탈하면서 유지되던 국가였다. 오늘날 북한 사회를 보면 조선의 옛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이처럼 극한 상황에 처한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야반도주해서 국경을 넘었다. 이들이 못나고 게을러서 가난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한인들은 체격상 일본인보다 뛰어났고, 이들이 이주한 만주나 러시아에서 한인들은 근면한 노력과 현지인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농사기술’로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국에 있었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조선이라는 국가에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그런 나라를 떠나왔지만,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현지에 동화되지 않고 한인들의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대원군이 조선을 개혁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특히 그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중창하는 일에 막대한 인력과 세금을 쏟아붓고, 국제 정세의 변화를 외면한 채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조선을 더욱 고립 정체시키고, 세도 정치를 막기 위해 간택한 왕비 윤 씨와 정치적 갈등을 빚으면서 조선은 마지막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반면 일본은 1854년에 미국과 굴욕적인 통상 조약을 맺은 이래 1868년 메이지 유신의 개혁 정책에 따라 빠른 속도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화의 발길을 재촉했다.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제적으로 강화도 조약을 맺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조선 땅에서 청일 전쟁에 승리를 한다. 이후 일본의 정한론자들은 노골적으로 조선의 왕실을 장악해서 서서히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조선의 외교와 재정을 장악하면서 식민지화를 강행한다.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강제 합병은 예정된 수순에 불과했다.
한인들의 2차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조선이 정치적으로 무력해지면서 나타났다. 이때의 디아스포라는 1860-70년대의 경제적 이유로 이주한 것과 달리 양반 출신의 식자층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모색한 개혁 측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만주에 수많은 학교들을 세워 인재들을 양성했다. 이들은 만주와 러시아 그리고 몽골 등을 중심으로 활동 기반을 만들었다. 이들은 전 세대의 디아스포라가 현지의 토착화에 관심을 갖는 것과 달리 언제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조선의 언어와 풍습 그리고 문화 등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조선의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끌어들인 이동휘, 단지회를 결성해서 조선의 무장 투쟁을 부추겨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그리고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주력한 북간도의 이상설과 신민회 등 여러 갈래들이 있었다.
이혜옥 선생은 1937년에 있었던 고려인의 강제 이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스탈린이 다민족 디아스포라인들을 ‘반역자’로 의심했고, 외국인들은 거의 병적으로 불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스탈린은 “비 러시아 민족을 대상으로 대숙청과 강제 이주를 시행했는데, 이런 방법으로 적의 세력을 소탕하고, 소비에트 사회를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전쟁에 대비하려는 심산이었다. 그 정책의 첫 번째가 엄청난 수의 고려인들을 극동 러시아로부터 남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랄해와 발카쉬 호수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300쪽)이다. 화장실도 숙식 시설도 없는 열차 여행길은 30일 내지 45일이 걸렸는데, 이 긴 여행 과정에서 고려인들은 질병과 부상으로 무려 16.3 퍼센트가 사망했다. 나머지 60퍼센트도 다음 해 봄에 또 다른 미지의 고향으로 실려갔다. 수십 년 전에 가난과 차별 대우를 못 이겨 국경을 넘어갔던 불쌍한 조선의 농민들이 또다시 알지도 못하는 멀고 먼 고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대규모로 이루어진 다국적 한인 디아스포라는 그야말로 애환과 고통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그럼에도 한인 디아스포라는 중국계 역사가 매들린 슈가 말한 것처럼 ‘모국을 향해 지속하는 충성심으로 단합’해서, 어디에 살고 있던 언젠가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환향을 믿고 그날을 위해 살고자 했다(313쪽). 이러한 전통은 끊이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디아스포라가 조선이라는 국가의 흥망성쇠에서 발생한 것을 미루어본다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국가의 책임과 역할은 지대하다. 오늘날 전 세계를 강타하는 한류의 바람도 대한민국의 국력 신장과 한인들의 열정과 재능 그리고 애국심 등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이혜옥 선생의 방대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선생은 뒤늦게 시작한 학술 연구지만 이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당시의 신문 기사와 서양인들의 조선 여행기, 일본과 미국의 내쇼날 아카이브, 러시아와 한국의 일차 자료뿐만 아니라, 미국 내 도서관에 소장된 수많은 기록과 출판물을 추적하여 발췌한 역사적 사실들을 서술한 것”(8쪽)이다. 선생의 이러한 노고는 책 뒤편에 실린 방대한 참고문헌(Bibliography) 목록으로 확인된다. 이것들만으로도 이 책의 연구사적 가치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저 책상에 앉아서 문헌들만 뒤적거리면서 쓴 것이 아니라 발로 뛰어다니면서 문헌들을 찾고, 오랜 도서관 사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사료들을 정리하고 해석한 노고의 산물이다. 이런 연구는 민족 사학이니 식민 사학이니 하면서 추상적인 개념만을 둘러싸고 갑론을박하는 한국의 역사학계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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