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 32-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32- 이것은 건축인가 조각인가?
1) 건축의 질료
건축의 질료는 ‛역학적으로 무거운 물질[즉 Mass], 또는 무게의 법칙에 따라서 형상화될 수 있는 물질’[1]이다. 예를 들어 돌멩이나 나무와 같은 것이니, 그것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물질이거나 아주 간단하게 다듬어진 물질이다.
건축의 질료는 직접적인 자연 물질이지만 다른 예술로 갈수록 그 질료가 추상화되고 점차 관념화된다. 조각의 경우 이미 형상화가 가능한 물질로 제한되며, 회화나 음악에 이르면 물질이더라도 이미 관념화된 빛이나 소리가 질료로 사용된다. 시문학의 질료는 표상이니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건축이 예술 장르 가운데 가장 단순한 계기를 이루며, 역사적으로 가장 빨리 등장한 예술 장르가 되었다고 한다.[2]
그 가운데 건축과 조각은 사용하는 질료를 놓고 보면 동일하게 보여서, 양자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성채이나 부처상은 둘 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소나무가 장승이 되면 조각이고 기둥이 되면 집이 된다. 헤겔은 정신이나 형상이 아니라 질료를 통해 건축과 조각을 구분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물체[Matter] 예를 들어 돌멩이나 나무 토막은 이중적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공간적 연장적 양적인 특성을 지니니, 이런 점에서 하나의 덩어리[Mass]이다. 다른 한편 이런 물체는 그것에 대립하는 규정성, 질적 특성을 지니니, 이런 측면을 물질성[material]이라 할 수 있다. 덩어리의 측면은 물체의 부정적, 무의 측면이라 한다면, 물질성의 측면은 긍정적, 존재의 측면이다.
물체는 공간적 연장적 측면에서 축조되면서 특정한 덩어리의 결합체를 만들어내니, 덩어리는 주변과 분리되면서 독자적인 것이 된다. 이런 덩어리 결합체가 곧 건축이다. 반면 물체의 규정적 질적 특성은 조각의 질료가 된다. 물체의 규정성과 질적 특성은 서로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2)
물체의 전면 즉 긍정적[positive] 측면과 부정적 측면, 물질성과 덩어리는 서로 대립하지만 떼어낼 수 없다. 규정성이 없는 연장성은 없고, 공간성 없는 형상도 없다. 양자는 서로의 이면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공간 자체를 구축하는 건축 예술과 물질성을 조형하는 조각도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일정한 형상화 없이는 건축도 없으며 일정한 연장성 없이는 조각도 있을 수 없다. 건축을 거꾸로 보면 조각이 되고, 조각을 거꾸로 뒤집으면 건축이 된다. 건축과 조각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의 이면이 된다.
그러면서도 건축과 조각이 서로 구분되는 것은 그 의미가 부여되는 방식 때문이다. 건축의 경우는 규정적 형상적 측면은 공간적, 연장성의 측면을 다른 것과 구분하는 데 기여할 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곧 공간성과 연장성이다. 이런 공간성과 연장성은 무규정적이고 연속적인 측면이니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자기 밖에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질료의 특성상 그것의 의미를 자기 밖에 가지기 때문에 건축이 된다.
반면 조각에서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은 질적이고 규정적인 측면이 존재하기 위한 토대, 장소가 될 뿐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적이고 규정적인 측면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형상이 된다. 이런 고유한 형상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처럼 자기 내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으므로 그것은 조각이 된다.
헤겔은 건축과 조각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면에서 보면 조각에 감각적인 것 자체를, 즉 질료를 질료적 공간적 형식으로 형상화하는 한, 그것은 아직 건축과 같은 단계에 있다. 하지만 조각은 건축으로부터 구분되기도 하는바, 까닭인 즉 조각은 정신의 타자인 비유기적 물체를 정신에 의해 제작된 하나의 합목적적 환경으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자신의 외부에 두는 형식들로 변형하지 않고 정신성 자체를 … 신체적 형상에 투입하여 신체와 정신을 불가분으로 통일된 전체로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건축이 단순 외적인 자연과 환경으로서 정신에 봉사한다는 규정을 갖는다면, 조각의 형상은 여기서 탈피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현존한다. 이러한 탈피에도 불구하고 조각상은 그 환경에 본질적으로 관계한다. 즉 조각상이나 군상은 특히 부조는 작품이 위치하는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작될 수 없다. ”
여기서 헤겔은 건축은 “질료를 질료적 공간적 형식으로 형상화”하며, “그 목적을 자신의 외부에 둔다고” 규정한다. 반면 조각은 “물체를 정신에 의해 제작된 하나의 합목적적 환경”으로 만들며, 정신의 형상이 “자기 자신을 위해 현존하는” 것이라 한다.
3)
이런 구분은 많은 의문을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헤겔 자신이 고대 건축의 출발점으로 들고 있는 것이 남근상이라든가 스핑크스, 멤논 상 등인데,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구체적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조각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헤겔은 이들을 건축 속에 집어넣어 다루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혼란은 건축의 질료인 덩어리[mass]가 지닌 이중적 측면 때문이다. 즉 공간적이고 연장적인 측면이다. 공간적 측면은 비어 있는 것인 반면 연장적 측면은 오히려 충만한 측면이다. 이렇게 대립하면서 둘 다 내적으로 무규정적이며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모든 공간은 한편으로 충만되어 있는 것이며, 모든 충만한 것은 다른 편으로 비어있는 공간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화강암 덩어리를 보자. 화강암 덩어리는 화강암적 물질로 충만한 것이며 너무나도 충만해 있어서 그 속에 차별도 없고 연속되어 있다. 이런 무규정성과 연속성의 측면만 보면 그것은 비어있는 것이다. 거꾸로 우리 눈에는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보자. 그것은 무규정적이고 연속적 공간이다. 그러나 사실 이 공간은 정말로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다. 공기가 가득 채우는 있으니 그것은 공기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이런 공간성과 연장성, 비어 있음과 충만함이 같은 것임을 이해한다면, 이제 남근상이나 스핑크스, 멤논상을 헤겔이 왜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비록 부분적으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축조된 것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형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지닌 거대함과 육중함이다. 그것은 육중한 돌 덩어리와 거대 나무 토막을 세우거나 쌓아놓은 것이다. 이런 거대하고 육중한 것은 비록 비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충만한 것으로서 연장적인 것이며 곧 건축의 질료가 된다.
이런 점은 오벨리스크나 카바석 등을 살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이런 것들도 수직적이거나 정육면체라는 일정한 형태를 지니지만, 이것이 건축물인 이유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 형태가 아니고 그것이 지닌 거대하고 육중한 질료적 측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워지거나 누여져 일정한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 이르면 모더니즘 건축이 지녔던 단순성, 기하학적 형태가 사라지고 다시 구체적 형상성이 되돌아 온다. 개미집과 닮은 음식점이나 프랑크 게리의 춤추는 건물을 보라. 그럼에도 이런 건물이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 되는 것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그런 형태를 축조하면서 만들어낸 공간성 또는 연장성 때문이다.
4)
조각도 축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대의 많은 조각 작품은 그 사이에 빈 공간을 담고 있고, 어쩌면 그런 공간 자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공간이 비어있는 것만이 아니라 충만한 연장성을 지니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거대한 덩어리를 깎고 다듬은 조각 작품은 차라리 건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많은 조각 작품은 마치 사탑처럼 다양한 형태를 지닌 물질 덩어리를 쌓아놓았으니, 더욱 그런 의문이 든다.
이런 작품들 역시 건축이 아니라 여전히 조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조각 사이의 빈 공간은 어디까지나 조각의 형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바탕으로서 역할을 할 뿐이며 깎고 다듬어진 거대한 덩어리에서 작가가 드러내려는 것은 덩어리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고유한 물질성이니 그런 물질성이 지닌 양감이나 촉감 시각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탑처럼 축조한 조각 작품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작가는 이렇게 축조된 덩어리가 아니라 그런 덩어리가 지닌 규정성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경우에도 그 의미는 작품의 형상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 만일 작가가 그런 작품에서 공간성, 또는 연장성 다시 말해 그 덩어리로서 물체에 중점을 둔 것이라면, 그런 덩어리는 그 자체로 무규정성이나 연속성을 지니는 것이기에 고유한 의미를 자기 밖에 지닐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에 비로소 그런 작품은 건축이 된다.
예를 들어 조각가 문신이 올림픽 공원 입구에 세워놓은 작품이 사찰 앞에 서 있어서 사찰의 경계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목적을 지닌 것이라 한다면, 이제 그 작품은 조각이 아니라 건축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지닌 덩어리가 경계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천사지 탑처럼 국립박물관 안에 옮겨지면 그것은 건축이라기보다 오히려 조각작품이 되면서 그것이 지닌 형상성, 질적 규정성, 감각적 느낌 등이 문제가 된다.
5)
건축은 축조를 통해 특정한 덩어리를 만들어 낸다. 이 덩어리는 비어 있거나 충만한 것이다. 덩어리는 어느 방식이든 무규정적 연속적이기에 그 자체로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 의미는 자기밖에 가질 수밖에 없으니 건축적 공간은 외적인 의미에 대해 합목적적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건축은 근본적으로 상징적이다.
건축은 축조하는 가운데 외적인 형태를 가지는데, 그 외면적인 형태와 내적인 공간은 서로 동전의 이면이다. 두 측면은 서로 대립하면서 서로 관계한다. 여기서 외적 형태는 내적 공간과 엄밀하게 관계하기보다 느슨하게 관계할 뿐이다.
건축이 상징적으로 지니는 의미와 그것의 축조된 외적 형태 사이에서도 내적인 공간을 매개로 하여 간접적 관계를 갖는다. 축조된 외적 형태는 자신의 이면인 내적 덩어리를 느슨하게나마 규정하고 이는 다시 그것과 상징적으로 연관된 의미와 합목적적으로 관계하니, 외적 형태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제약하는 관계를 지니게 된다.
“건축은 공간에 경계를 설정하고 이를 에워싼다…. 왜냐하면 이런 건축 예술은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형태를 쌓더라도 정신이 자신에 적합한 신체적 형상 속에서 현상하는 자유로운 아름다움의 목적을 추구하지 않고 대체로 본래 하나의 표상을 암시하고 표현하는 상징적 형식을 제시할 뿐이다.”[3]
“왜냐하면 건축의 소명은 독자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정신에게… 외적 자연을 울타리로 세우는 것인데 … 그러므로 그 의미를 더 이상 자신 안에 지니지 않고, 그것을 제3의 것에서 … 발견하면서 자립성을 포기하고 만다.”[4]
건축의 질료인 덩어리를 축조하는 법칙은 주로 무게의 법칙이며 건축은 지성에 의해 계산된 안정과 균형의 관계에 따라 정돈된다. 이런 법칙의 결과 축조에서 나타나는 형태는 주로 직선이나 직각, 수평면과 같은 비유기체적인 형태에 머무른다.
건축적 질료를 통해 그 의미 즉 정신과 간접적으로라도 관련되기 위해서는 무게의 법칙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기울어져야 한다. 무게의 법칙이 밑으로 하강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라면, 건축에 담긴 정신성은 내리 누르는 힘에 대해 지탱하거나 들어 올리는 힘 즉 상승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런 상승은 유기적인 형태 즉 곡선이나 사선, 수직면을 통해 도입된다.
비유기체적 형태와 유기적인 형태가 어우러지면서 건축 자체가 일정한 고유한 형태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정의 형태나, 고딕 건축물의 형태가 그와 같다. 이와 같이 형태가 축조되는 가운데 건축은 조화, 대립과 같은 관계 방식이 사용되니, 마치 음악에서 음이 조화와 대립을 이루며 발전하는 것과 같다. 음악에서 이런 발전은 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건축에서 그런 관계는 공간적으로 공존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슐레겔의 표현을 빌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말한다.
[1] 미학강의 2, 275쪽
[2] 과연 건축이 역사적으로 최초의 예술인가? 아놀드 하우저는 선인류의 동굴벽화에서 예술사를 시작하니, 그런 관점에서 헤겔의 주장은 옳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이렇게 반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굴벽화가 있기 전에 먼저 동굴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최초 인간이 살고 있는 동굴도 자연동굴을 거칠게나마 다듬은 것이니 이미 건축에 속하지 않을까?
[3] 미학강의 2, 288쪽
[4] 미학강의 2,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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