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18- 소외된 정신과 기독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8- 소외된 정신과 기독교
1) 전면적인 시장화
낭만적 예술 형식은 근대 정신을 반영하는 예술 형식이다. 헤겔은 근대 정신을 절대적 주관성으로 규정했는데, 어떤 의미일까? 거슬러 올라가 먼저 헤겔에서 근대 정신이 출현한 역사적 토대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선 통상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지만 헤겔에서 중세와 근대는 단절된 시대가 아니라 연속된 시대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헤겔에서는 인륜성의 시대이다]가 해체되면서 개인적 인격의 발전이 일어난다. 이제 인격 즉 형식적인 자유로운 결정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여된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등장한다.
인격은 아직 실질적 정의의 원리를 결여하므로 자유의 실질적 내용을 둘러싸고 인격 사이의 무한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런 투쟁은 후일 홉스가 주장한 만인의 만인의 투쟁에서와 같이 끝내 황제가 자의적으로 법을 결정하는 세계[로마 제국 시기 이후]로 된다. 황제는 절대권을 지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인격이므로 그의 결정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니 이 시대는 모두가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내용적으로는 황제가 자의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다.
황제가 자의적으로 제정한 국가[로마 제국]가 만인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오성 국가로 발전하기까지가 헤겔에서 근대 정신이 출현하는 시기이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은 이 시대 사회적 상호관계의 발전인데[1] 이는 시장의 출현을 매개로 한다. [2]
이런 시장이 사회 전체에 일반적으로 펼쳐지게 되면서 마침내 근대 사회가 출현한다. 헤겔에서 근대사회란 곧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다.[3]
시장의 기본적 관계는 자유로운 인격 사이의 법적 계약관계이다. 이런 계약적 관계는 비단 경제적 시장에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계약적 관계는 그 동안 존재했던 모든 사회적 관계 속으로 침투하면서 전체 사회를 보편적 계약 관계로 전환시킨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단체는 물론이며, 국가조차도 마침내 계약 관계로 되며, 심지어 가족 관계조차 이런 시장적인 계약관계가 파고들어간다.
중세와 근대의 차이는 다만 시장 즉 사회적 상호관계가 발전하면서 사회 전체가 이런 시장 관계로 전환하는 정도에서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니, 헤겔은 통상적으로 구분되는 중세 사회와 근대 사회를 이런 시장의 계약관계가 발전하는 연속적 단계로 파악한다.
2)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
헤겔은 이 시기를 정신적으로 보면 근대 정신[그 산물이 곧 오성 국가이다]이 발전하는 시기라 규정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회 전체에 일반화되는 시장 관계에서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분석해 보자. 시장 관계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보면, 그가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 속에서 표면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개인의 목적은 타인을 통해 실현되며, 거꾸로 타자의 목적은 개인 자신의 활동을 통해 실현된다. 여기서 개인은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타자의 수단으로 만든다. 개인과 타인은 이제 보편적 상호 의존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개인은 자신의 산물에 주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산물이 지닌 객관적 가치는 시장을 통해 실현된 가치이니, 그의 활동은 전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는다. 두 가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부여한 주관적 가치는 시장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의 산물은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가치를 실현할 수도 있으니, 그의 자유란 오직 시장에 의해 제약된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은 생산하는 활동 중에서는 자기가 생산한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 그 가치가 실현될 수 있을지조차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생산한다. 그는 생산을 마치고 시장에 나가 그 생산물을 교환 속에 집어넣는 때 비로소 뒤늦게야 자기가 생산한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표면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은 항상 어긋난다. 그 때문에 단기적으로 시장 관계는 공황과 붐이라는 끝없는 요동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장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은 조절된다. 사회는 이런 시장에 의한 조절을 통해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이 힘은 현상 속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현상 속에서 자기를 관철하니, 아담 스미스는 이런 시장의 힘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 하였다.
헤겔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타인의 상호 작용 관계를 일반화한다. 사회 전반에 전개되는 법적 계약관계는 이런 시장 관계를 원형으로 삼는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사회적 상호 관계 속에서 개인은 주관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하지만 그의 활동은 맹목적일 뿐이다. 그 너머에 사회적 실체가 그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헤겔은 사회 전반에 일반화된 시장 관계를 통해 자기를 관철하는 객관적 가치를 사회적 정의[Sache Selbst] 또는 실체로 규정한다. 이런 실체의 힘 즉 보이지 않는 시장의 힘을 헤겔은 소외된 정신이라 규정했다. 이를 굳이 소외라고 규정한 까닭은 그 힘은 한편으로는 현상 너머에 초월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 속에 자기를 관철하고 있으니, 내재하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소외[4]라고 규정한 것이다.
황제의 국가에서 오성 국가 즉 근대 국가로 형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신의 발전이다. 그 정신은 소외된 정신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이 소외된 정신을 자각하면서 자각된 정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시장 관계 속에 전개된 개인적이고 형식적인 자유의지가 마침내 개인이 실체적 목적을 자기 의지의 목적으로 삼는 루소적 일반적 자유의지가 출현하는 데로 발전한다.
물론 근대 국가인 오성 국가에서는 아직 정신의 발전은 완성되지 못했다. 헤겔은 루소의 일반의지 단계를 넘어서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자유의지로 발전하며 이 과정을 통해 이상적 국가의 형태가 출현한다. 하지만 이 마지막 과정은 헤겔이 상정한 미래의 역사이지 현실의 역사는 아니다.
3) 절대적 주관성과 무한한 내면성
중세부터 서서히 발전해 온 근대 사회의 정신은 곧 소외된 정신이니 이 소외된 정신은 근대 정신을 표현하는 종교와 예술, 철학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먼저 이런 시장 사회를 토대로 하는 종교의 모습부터 확인해 보자.
헤겔은 바로 이와 같은 소외된 정신을 통해 개신교의 근본적인 특징이 도출된다고 본다. 개신교의 신은 헤겔에서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개인에게 내재하면서도 초월해 있는 신이다.
신이 세계를 너머 초월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와 단절된 피안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은 이 세계 속에서 개인의 상호 활동을 통해 자기를 관철하지만 다만 그 관철하는 활동이 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개인에게 내재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범신론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즉 개인 자체가 신의 현현은 아니다. 신은 시장 속에서처럼 개인들의 활동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있다는 의미이다. 이 상호 작용은 곧 개인이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이니, 개인들의 상호 부정적인 관계 속에 신이 현현한다.
개인은 이런 상호작용적 관계 속에 신이 출현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런 개인에게 신의 활동은 곧 외적인 강제, 맹목적 필연 즉 운명의 힘이다. 그러나 개인이 객관적으로 관철되는 실체의 힘을 알게 되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본질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니 자유로운 의지가 된다. 여기서 신과 나는 합일에 이른다.
이런 자각은 근대를 넘어서야[칸트 자유의지에서 비로소 이런 자각이 시작된다고 한다] 가능하며 개인은 아직 이런 자각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개인은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이런 합일을 내적으로 느끼고 있으니, 신과 나의 합일이 이런 느낌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것이 곧 신에 대한 믿음이다.
개인의 측면에서 신과 나와의 합일은 스스로 자기를 넘어서 신에 이르는 고양의 과정이다. 이 고양의 과정은 개인의 자기 부정성 즉 무한한 규정성으로 규정된다. 신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합일은 신 자신이 나를 매개로 해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과정이니, 이 과정이 곧 절대적 주관성이다.
“낭만주의 예술에서 무한한 주관성은 그리스 신과 달리 홀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와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발을 들이나 이 타자는 주관성 자신의 타자로서 그 안에서 주관성은 자신을 재발견하며 또한 자신에 머무르는 존재[Bei Sich Sein]로서 그것과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5]
느낌을 통해 다가오는 믿음의 상태를 헤겔은 ‛내밀함[Innigkeit]’으로 규정한다. 이런 믿음의 단계에서 신은 한편으로 개인에게 알 수 없는 소원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에게 그의 본질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니, 개인은 이 신에 대해 두려움과 친밀함을 동시에 느낀다.[6]
여기서 기독교적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 개념 즉 ‘절대적 주관성’과 ‘내밀함’ 사의의 연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이 주관 속에서 이미 내적으로 신과의 합일을 느끼고 있을 때 그것이 곧 내밀함이며, 이런 내적 합일은 자기 부정적인 행위를 통해서 마침내 실현되면서 절대적 주관성이 된다. 내적 내밀함 속에 절대적 주관성이 예감되며, 내밀함의 외적인 실현이 곧 절대적 주관성이다.
4) 역사 속의 신
이런 신은 한편으로 상징주의 시대 주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인 추상적 신과 구분되며 다른 한편으로 각 민족의 자연적 개별성을 담지 하는 그리스 시대 개별적인 정신과도 구분된다. 절대적 주관성으로서 신은 가장 추상적인 유일 신이 가장 구체적인 인간[그리스도]으로 출현하니 이 신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인간에게 직접 계시해 주는 신이다.
예수는 성령이 곧 사랑이라고 선포했다. 헤겔로 볼 때 이는 곧 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신이 소외된 정신이고 이 정신은 실체적 정의를 자발적으로 실현하는 의지이니 이는 공동체적 정신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신의 본질, 성령이 곧 사랑이므로 기독교 신은 인격신이다.
헤겔은 본래 기독교 정신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믿음의 관계이지만, 이런 내밀한 믿음의 관계는 봉건제 시대에서 거룩한 빵과 성 유물 숭배 신앙[7]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이는 사물 속에 신이 강림한다는 신앙이니 곧 상징주의 단계의 신앙에 불과하다. 봉건제 말기에 이런 신앙은 다시 성상 신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고전주의 단계의 예술적 종교[8]이다. 마침내 종교 개혁을 통해 다시 원래의 내밀한 믿음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의 관계가 출현했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의 모습은 고전적 신의 모습과 구분된다. 헤겔은 이 두 신의 모습은 모두 인간의 형태를 통해 나타나므로 어떻게 보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헤겔은 두 신의 모습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한다.
우선 고전적 신은 예술 즉 감각적 형상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며 이 감각적 형상은 영웅을 닮은 이상화된 모습이다. 그 감각적 형상은 불멸의 영원한 모습으로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반면 기독교 신은 감각적 형상이 아니라 시간적인 역사 속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기독교 신은 살과 피를 지닌 구체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그런 구체적 인간이 스스로 전개해나가는 역사적 운동 가운데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 역사적 운동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이런 개인의 상호작용 운동은 개인이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이니 이를 통해 개인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 존재로 복귀한다. 이런 정신적 존재 속에서 신이 출현한다. 고전적 신은 아름다운 육체 속에 출현하지만 기독교 신은 육체가 아닌 자기 복귀적인 아름다운 정신 속에서 출현한다. 이 자기 복귀적인 정신이 곧 무한한 내면성이고 절대적 주관성이다.
기독교 신의 조각이 고전적 신상에 대해 지니는 차이의 핵심에 눈이 있다. 헤겔에 따르면 고전적 신의 형상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눈동자는 곧 영혼을 드러내는 것인데, 고전적 신은 무한한 내면성인 영혼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 신은 현상을 너머 자기 내로 복귀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기독교 신의 모습 속에는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눈동자를 지닌다.
“이러한 결함은 조각 형상들이 단순한 영혼의 표현 즉 눈빛을 갖지 않는 점에서 외적으로 드러난다. 아름다운 조각의 걸작들은 시선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들의 내면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정신적 집중을 갖는 –이것은 눈을 통해 알려진다-자기인식적 내면성으로서 비치지 않는다.”[9]
“그러나 낭만적 예술의 신은 시선을 지니는 것으로, 자신을 의식하는 것으로, 내면화된 주관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내면에 열어 보여주는 것으로 현상한다. 왜냐하면 무한한 부정성, 즉 정신적인 것의 내면으로의 회귀는 육체성으로 주조된 상태를 지양하며, 또한 주관성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정신의 빛이기 때문이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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