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15-피디아스와 라오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5- 피디아스와 라오쿤
1)
헤겔은 미학강의 2권에서 그리스 조각을 설명하면서, 느닷없이 영국의 외교관 엘진 경을 거론한다. 그는 1789년에서 1803년 사이에 터키 제국에 파견된 영국 외교관으로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을 떼어내어 영국으로 가져온 인물이다.
헤겔은 언급하기에 사람들(특히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그렇다)은 그를 약탈자라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은 오히려 가만 두었으면 이슬람 지배 아래 파괴되었을 예술품을 구출하였다고 평가하겠다고 말한다. 엘진 경의 약탈물은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그의 약탈 때문에 파산했으니[1] 신으로부터 충분히 처벌받았다고도 하겠으나, 엘진 경의 콜렉션은 헤겔이 고전적 예술형식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점은 미학강의에서 헤겔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이 시대 작품들에서 이구동성으로 평가되는 것은 형식과 자세의 매력과 고상함이 아니며 피디아스 이후의 시대에서처럼 이미 외부를 향하는, 그리고 감상자의 측면의 만족을 목적으로 삼는 우아함이 아니며, 제작의 섬세함과 대담함 또한 아니며 오히려 일반의 찬사가 주목하는 것은 이 형상들이 갖는 자립성과 자기 관계성이다. 그리고 특히 자연적 질료적인 것을 완전히 꿰뚫고 지배하는 자유로운 생동성을 통해 경탄은 정점으로 치달았다.”[2]
결론적으로 말해 엘진 경의 약탈물이 들어오면서 그리스 예술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이전 그리스 예술은 매력과 고상함, 우아함 등 때문에 만족을 주었으나, 이제 자립성과 자기 관계성, 자유로운 생명성 때문에 경탄을 주고 있다고 한다.
2)
여기서 엘진 경의 약탈물이 미친 영향을 이해하려면, 그 작품의 유래를 이해해야 한다. 엘진 경의약탈물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 부착된 조각품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가 그리스 동맹을 이끌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페리클레스가 BC 5 세기경 건축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 신전 건축을 지도했던 인물이 바로 그리스 조형 예술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 피디아스의 작품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엘진 경의 약탈물은 그리스 조형 예술의 최고작품을 대변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이전 시기 그리스 조형 예술을 대변했던 작품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 이전 시기 그리스 조형 예술의 대표작은 빙켈만에 의해 평가되어 신고전주의 시기 모범이 되었던 작품인 Apollo Belvedere, Laocoön 군상, Belvedere Torso, Antonous Mondragone과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BC 3세기 그리스 몰락기에서부터 AD 2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이며 지금 대부분을 교황청이 소유하고 있다.
두 시대의 작품을 비교해 보기만 하면 헤겔이 왜 미학강의에서 위와 같은 말을 남겼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엘진 경의 약탈물 중의 하나를 보자. 이것은 파르테논 신전 페디먼트에 부착된 것으로 엘진이 가지고 와서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하는 조각상 중의 하나다.
이것과 비교하여 전성기가 지난 BC 4세기 작품을 보자. 이것은 그 시대 크니도스에서 만들어진 이후 AD 1세기 로마 시대 복사한 것으로 교황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크니도스의 비너스 상이다.
전성기 작품은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자립성이 지배하고 있다. 반면 몰락기 작품은 헤겔 말대로 우아하고 고상하며 특히 약동적이다. 물론 전성기 작품 속에서도 몰락기 요소를 찾을 수 있으며, 몰락기 작품 속에서도 전성기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배적인 것은 전 후 시대 서로 다른 것이었다.
3)
고전주의 작품은 처음에는 주로 16세기 들어와 로마에서 발굴된 것을 통해 알려졌다. 당시 아테네는 오스만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발굴된 것은 앞에서 말한 로마 교황청 소장품과 같은 것인데, 르네상스 이래 사람들은 그런 작품의 주로 표면적인 모습에 주목했다.
그 결과 르네상스 시절 고전 예술은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순간적으로 운동하는 모습이 그대로 포착된 리얼한 것이었으며, 보는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고 해방하는 힘을 지녔다. 헤겔의 말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고 매력적인 모습은 르네상스의 대표 화가 보티첼로의 비너스 상에서 너무나도 잘 드러난다.
고전 예에 대한 이런 이해에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 빙켈만이다. 빙켈만은 18세기 초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청이 소장하고 있는 발굴품을 직접 보면서 그 핵심을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는데, 그로부터 그리스 예술을 파악하는 고전주의적인 관점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뛰어난 미술 작품들이 자세와 표현에서 보여주는 가장 일반적이고 현저한 특징은 결국은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다. 아무리 바다의 표면에 거친 풍랑이 인다 해도 저 깊은 심연 속은 언제나 고요를 지킴과 같이, 그리스 조각상들은 격정의 한가운데 있다 해도 위대하고 초연함을 지키는 영혼을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평가했을 때 토대가 되었던 작품은 교황청 소장 라오쿤 군상이었다. 그는 이 라오쿤 군상[3]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한 영혼은 라오콘 군상, 특히 라오콘의 얼굴에서 격렬한 고통에 맞서는 모습으로 잘 드러난다. 그의 육체의 모든 근육에서 고통이 드러난다. 굳이 얼굴과 다른 신체 부위를 보지 않고 고통으로 수축된 그의 복부만을 보더라도 충분히 그 고통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은 얼굴 표정이나 다른 몸짓이 격렬하기 때문에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다. 라오콘 상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라오콘처럼 끔찍한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라오쿤 군상의 표면적 모습은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의 비명을 지르는 순간을 표현한다. 그 표면적 모습만 보면 이 군상은 오히려 그리스 예술의 후기 즉 몰락기에 나타나는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도 빙켈만은 이런 모습 속에서 고통에 맞서 자기를 유지하는 고귀함과 고요함을 보니, 빙켈만은 표면적 모습에 감추어져 있는 심층적 모습을 간취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하겠다.
“위대하고 고귀한 영혼은 조화롭고 고요한 상태에서 발견된다. 라오콘 상이 고통만을 묘사한다면 그것은 파렌티르소스일 것이다. 그러나 조각가는 영혼의 독특함과 고귀함의 두 성질을 통일하기 위해서 라오콘을 극한 고통 가운데 두면서도 고요한 상태와 맞닿아 있는 동작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영혼의 평정은 유일하고 독특한 성격에 의해 나타나야 하고 형태에 고요와 움직임을 동시에 부여해야 한다. 그것은 지루하거나 둔감하지 않은 고요함이다.”
빙켈만은 고전 예술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작품 가운데 보티첼리보다는 오히려 라파엘로를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시스티나의 마돈나 상과 같이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는 고귀함과 고요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래 시스티나 마돈나 상 가운데 마돈나의 얼굴 모습을 보라.
4)
헤겔이 빙켈만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가는 그가 고전 예술을 평가하면서 제시하는 개념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고전 예술의 대표적 특징으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고요함과 자립성을 갖는다고 하는데, 그런 개념은 빙켈만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헤겔은 고전 예술이 단순히 고요함과 자립성만 지니는 것은 아니라 한다. 고전적 예술은 또 하나의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본다. 즉 생동성이다. 어느 시대에도 두 요소가 다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자립성은 전성기 시대 지배적이었고 생동성은 오히려 몰락기에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이행기를 거친 이후 고전 예술의 발전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1] 터키 외교관 시절 엘진은 사비를 들여 그리스 미술품을 발굴했고 특히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조각품을 떼어냈다. 엘진의 약탈물은 1803년 영국으로 보내졌으나 수송 도중 배가 침몰하여 이를 인양하는 데 많은 돈이 들었다. 그는 프랑스를 거쳐 귀국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전쟁포로가 되었다. 나폴레옹에 탄원한 끝에 석방되어 1806년 귀국했다. 귀국해서 그는 자신의 부인이 자기의 친구와 바람이 났다는 것을 알고 이혼 소송을 하느라 많은 돈이 들었다. 그 때문에 처음에 사설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들여왔던 조각품을 영국 정부에 판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들인 전체 비용의 반 값으로 판매했으니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그는 나폴레옹에 탄원하는 중 그가 했던 발언 때문에 영국 정부로부터 상원의원과 귀족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는 그를 추궁하는 빚쟁이를 피해 1820년 프랑스로 도피하여 1840년 파리에서 죽었으니, 약탈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았다고 하겠다.
[2] 미학강의 2권, 409쪽
[3] 라오쿤 군상은 트로이의 신관 라오쿤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바다 뱀에 물려 죽는 모습을 조각했다. 이 작품은 로도스 섬 출신 세 명의 그리스 조각가가 제작했다고 알려지며, BC 2세기 경 제작된 원본을 로마 황제 시대 복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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