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① [시대와 철학]
헤겔 바깥의 헤겔
―오늘의 우리 현실과 헤겔― ①
이 글은 2023년 11월 18일 부산대에서 열린 한국헤겔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저자의 기고로 게재합니다.
문성원(부산대 철학과)
Ⅰ
1. 지금부터 약 반세기 전 루치오 콜레티는 루이 알튀세르의 헤겔 해석을 가르켜 “헤겔을 읽은 지 매우 오래되어서 헤겔에 대한 기억이 대단히 희미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주장”1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알튀세르가 헤겔에게서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을 그 사상의 핵심으로 간파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한 평이었지요. 제가 이 자리에서 이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우선, ‘헤겔을 읽은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 제게도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저는 1980년대 초에 정신현상학을 비롯해서 몇몇 헤겔의 저작을 잠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이후로는 헤겔에 대해 집중적 연구를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오늘처럼 여러 훌륭한 헤겔 전공자들 사이에서 감히 발표자로 나서는 건 정말 무모한 작태인 셈입니다.
2.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 논의의 초점이 헤겔에 대한 문헌학적 이해나 해석에 있지는 않다는 점이겠습니다. 콜레티가 알튀세르를 몰아세웠던 요체가 바로 문헌학적 정확성 문제였지요. 헤겔에 ‘주체’가 없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해석이라는 거죠. 아마 헤겔을 좀 공부한 사람이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저도 그랬지요. 우리 사회에 알튀세르가 뒤늦게, 또 압축적으로 수입될 당시에, 그러니까 1990년대 초에, 저는 헤겔에 대한 오해와 곡해 속에 받아들여지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의 편향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문헌학적 정확성에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오히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다소 무리한 주장이 부각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데 있을 겁니다.2
3. 슬라보예 지젝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지요. 지젝이 오늘날 헤겔을 재론하고 현재화하는 데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그의 헤겔 해석이 자의적이며 문헌학적 근거가 취약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 ‘주체’에 대한 해석이 초점이 되겠지요. 알튀세르처럼 주체가 없다고까지 주장하진 않는다 해도, 지젝이 내세우는 헤겔의 주체는 라캉 식의 빗금 쳐진 주체, 자기 부정의 주체이니 말입니다. 반면에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헤겔의 주체는 발전과 진보의 주체, 자기 확장과 자기 확증의 주체일 겁니다. 문제는 이런 주체로는 더 이상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갖추기 어렵게 되었다는 작금의 사태에 있는 것이겠죠.
4. 철학과 설명력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헤겔의 경우에는 사후(事後)의 설명이라도 가능해야 그 스스로가 ‘미네르바의 올빼미’라는 별칭에 부합할 수 있을 테지요. 저처럼 철학이 과학적 성과의 한계와 인간의 이지적 욕구 사이를 그럴 법한 가정과 논리를 통해 메우는 역할을 한다고 보는 처지에서는 더욱 이런 요구를 물리기 어렵습니다. 나름의 한계 내에서나마 미래를 예측하고 거기에 맞추어 목적을 세우는 일에 간접적으로라도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적 작업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목적론에 대한 비판은 우리의 이런 활동 방식을 무차별하게 다른 존재들에게 적용하는 데서 오는 무리함을 지적하고 경계하려는 것이지, 목적이 우리 삶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적절한 목적 설정과 추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잘 짜인 설명이 꼭 필요할 테지요.
5. 한국에는 사회 운영에 대한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이 부재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유튜버인 안유화라는 분의 지적이었는데,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사회 운영 프로그램과 비교하여 나온 말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으나, 뼈아픈 비판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장기적 전망과 청사진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변화무쌍한 현실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그런 구도 자체가 민주적 사회 운영 방식과는 어긋나는 면이 있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우왕좌왕해온 ―실제로는 ‘우왕우왕’이었다고 보는 분도 있겠지요― 금세기의 경험 가운데서 우리 사회가 과연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지 새삼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6. ‘큰 이야기’에 대한 불신을 설파하는 것은 한참 전에 시효가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혹 아직도 “공산 전체주의”를 운위하는 시대착오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활용하는 경우라면 또 모르겠지만요. 우리는 거대 담론의 파국이 초래한 반작용의 음울하고 착잡한 늪에서 진작 벗어났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여기에 오늘날 헤겔을 다시 거론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여깁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알튀세르와 지젝이 원본의 헤겔을 변형하고 왜곡하면서까지 헤겔을 놓지 않은 이유와 통하는 것이지요. 변화와 발전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그런 의미에서의 변증법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오늘의 ‘로도스’에서 뛰는 헤겔의 사유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7. 그렇다고 제가 이 자리에서 헤겔 전문가들과 함께 뜀뛰기 경쟁을 할 자신은 없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우리 현실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들을 몇 가지 늘어놓아 보는 데 그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객석에 머물러 있어야 할 아마추어가 경기장에 끼어들어 물을 흐리는 꼴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Ⅱ
1. 세상은 복잡하지만, 설명은 가능한 한 단순할수록 좋습니다. 헤겔 철학이 제아무리 어렵다고 한들,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니, 세상사보다는 쉽고 단순해야 할 테지요. 두 항의 대립과 모순을 통한 변화의 설명 방식은 그런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항이 본래 하나에서 비롯된 것인지, 두 항의 설정에는 논리적 연관 외에 다른 요소들이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자의적으로 끼어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기로 합시다. 저는 헤겔 논리학(또는 “논리의 학”)의 세부 내용은 잘 알지 못하지만,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집단적으로 개발해온 각종의 주요 개념들을 하나의 체계로 다시 엮어낸 그 솜씨가 매우 경탄스럽다고 여깁니다. 두 항의 운동이 하나로 지양되어 모이고 재차 다른 두 항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과정들이 이어지고 쌓여서 두툼할 뿐 아니라 방향성을 갖는 체계를 이루어내지요. 단순함으로 복잡함을 구현해내는 멋진 직조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물론 여기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어요. 헤겔의 논의를 쫓아갈 때, 우리는 대체로 현재 진행되는 과정만을, 말하자면 한 채널만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우리 의식의 집중 방식이 보통 그러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른 채널들로부터의 간섭을 고려하기 힘들죠. 이른바 중층결정(Überdetermination)의 효과들을 놓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건 헤겔에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닐 테지요. 헤겔식의 과정을 좇아 구성된 얼개를 통해 지속적으로 점검해야 할 경험적 보충이 필요한 사안일 겁니다. 채널들의 자립성은 실험실에서 외부 요인들을 통제하듯 추상적 사유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일 따름이어서 상대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또 그런 과정들의 총괄이라 할 ‘전체’ 역시 잠정적일 테죠. 지젝이 헤겔에서 현재 또는 미래로부터의 소급을 통한 의미 발굴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당연해 보입니다.3
3. 그런데 이 같은 잠정성은 특정한 ‘전체’의 불완전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실 또는 실재 자체의 잠재적 면모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죠.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이 불완전한 ‘전체’들 뿐이라면, 그 너머의 현실이란, 아니 현상을 통해 다가오는 현실 너머의 실재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저는 이제껏 철학 논의에서 어쩌면 블랙홀 같은 모습을 보여온 이 현기증 나는 영역으로 넘어갈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두 가지만 짧게 짚어 두도록 하죠. 우선, 현상 너머의 실재에 대한 생각도 현상에 속하니까 현상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입론은, 새로운 경험의 가능성을 봉쇄하지 않는 한 현상 너머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실재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4, 다른 한편으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성만 주목하고 강조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응답(response)의 자세 면에서 무책임(irresponsible)하기 쉽다는 점.
4. 저는 특히 두 번째와 관련하여 헤겔적 사유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숱한 철학자들이 개방성의 근거나 양상 문제에 초점을 맞추곤, 블랙홀 근처에서처럼 우리의 시간이 가는 걸 잊어버린 듯한 인상이에요. 지젝이 내세우는 “무보다 못한 것(less than nothing)”이나 “덴(den)” 같은 데 홀린 채 말이지요. 보기에 따라선 바디우의 “사건(événement)”이나 데리다의 ‘대상 없는 기다림’ 따위도 유사한 작용을 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이런 모토들을 둘러싼 진지한 태도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같은 막연함을 한껏 세공해 본들 거기에서 더 이상 기대할 만한 것이 있을지 궁금하군요. 그것보다는 차라리 체계화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두 대립되는 계기들로 변화의 과정을 논리화하고 설명하려는 방도를 세련화하는 것이 진정 헤겔을 계승하는 길이 아닐까요?
Ⅲ
1. “근대화가 함축하는 서구적 산업화를 추구하는 계기와 식민지적 종속에 대항하는 자주의 계기가 근대 이후 우리의 역사를 이루는 변증법적 대립의 두 축이라고 할 만하다.”5 몇 년 전에 저는 이런 식의 문장으로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헤겔적 변증법을 적용해 보려는 어설픈 시도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고 별다른 반향도 없었던 그 내용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연속적인 문제의식은 버리지 않았던 탓에, 최근 몇 년간의 답답한 사태들의 해명 요구에 유사한 방식을 참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현재와 같은 검찰공화국의 성립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민주주의의 후퇴와 남북관계의 경색, 대미 대일 종속의 심화 등등 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고, 이런 점들을 되짚어 보는 데 이전의 사유가 소환되기도 하니까요.
2. 최근 몇 년간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제가 보기에 남북관계인 것 같습니다. 벌써 옛날 일이다 싶지만,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 단일팀과 판문점 도보다리 회담, 평양 능라도 경기장의 연설이 있었던 것이 2018년, 불과 5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의 분위기를 회상해 보면, 우리가 여전히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질 지경이지요. 더 흥미로운 면은 이런 변화의 주요 원인이 우리 사회 내부에 있지 않다는 점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 가시적 변곡점은 2019년 2월의 북미 하노이 회담 결렬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런 변화가 우연적이 아니며 그 뿌리가 결코 얕거나 만만하지 않다는 점이 이후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죠.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는 최소한 오바마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것은 중국에 대한 견제를 노리는 이른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 트럼프냐 바이든이냐 하는 정권의 문제보다 더 깊고 단단한 수준의 것이죠.
3.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한반도에 배치하고 남한과 일본을 묶어 세우려는 미국의 의도는 현재 성공적으로 관철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앞서 언급한 ‘자주’의 계기는 후퇴하고 위축되었다고 해야 되겠지요. 이런 분위기 탓인지, 근대 이후 한반도의 운명에 압도적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외세와 지정학적 조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 한국전쟁의 실질적 주역이 미국과 중국이었다는 인식이 부각되고 있는 것도 오늘날 미중의 대립과 긴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6 산업화 면에서도 외세의 영향이 강조됩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몰락하고 대신 한국과 대만이 반도체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것도 미국의 주도하에서 일어난 일이고, 따라서 현재의 우리 산업구도와 미래 전망도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에 따라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습니다.
4. 중국의 중요성도 만만치 않지요. 특히 금세기 들어와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세계의 공장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수출입의 주요 상대국으로서 한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좋은 불평등이라는 책의 저자는 한국에서 소득 불평등의 정도가 심해진 시기가 중국과의 무역에서 대기업이 호황을 누렸던 기간과 겹친다는 점을 여러 통계수치들을 통해 입증하려 했지요.7 저는 이런 주장의 사실에 입각한 설득력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탈중국’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2023년 8월 현재 중국은 수출과 수입 모두에서 20%를 넘는 비중으로 우리의 교역상대국 가운데서 여전히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요.8 현재 한국 경제의 불황이 중국 경제의 상대적 위축이나 투자 및 무역 여건의 악화와 관련이 있음도 분명해 보입니다.
5. 미국이 되었든 중국이 되었든 이들의 영향력을 떠나서는 우리 사회의 형편을 논하기 힘들 테지요. 이제 동남아나 남미 등 다른 지역과의 관계 다변화에 힘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대외의존적 산업구조가 바뀔 것 같지는 않군요.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와 같은 여건에서 산업화와 자주의 요구를 마주했을 때,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길을 택했을 경우 자주(自主)는 상당 부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6. 우리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민주화’는 이런 산업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속적이고 연속적인 계기였다고 할까요. 물론 이때의 ‘민주’를 보편적인 것이라 여길 순 없을 겁니다. 다중(多衆)이 힘과 권리를 가지는 방식이 여럿일 수 있을 테니까요. 또 현재 실존하는 민주주의의 방식들이 과연 명실상부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면도 많죠. 하지만 한때 우리에게 익숙했던 구호로 말하자면, ‘민중민주’가 ‘민족해방’보다는 산업화와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예에서 보듯 산업화가 필연적으로 서구적 민주화를 수반한다고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경우는 국가자본주의 축적 단계를 넘어선 서구적 산업화와 민주(民主)의 요구가 적어도 한동안은 잘 호응한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7. 북한의 경우는 반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주의 요구에 산업화와 민주가 밀려난 꼴이라고 할까요. ‘민족해방’이 오래도록 실질적인 ‘민중민주’를 가로막았다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과거 소련과 중국 도움을 받았지만,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고집이 핵개발에 이르게 했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지금도 명목상으로는 조중동맹 조약이 유지되고 있고 최근에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으나, 남한의 경우처럼 외국 군대가 계속 주둔을 한다든지 합동 군사훈련을 한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하지요. 지속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주를 ―그것이 비록 민중의 자주라기보다 소수 지배집단의 자주라고 할지라도― 뒤로 물릴 생각은 지금도 없는 듯합니다. 요컨대, 거칠게 말하면, 한반도에서 남쪽에는 산업화 내지 민중민주의 계기가, 북쪽에는 자주 내지 민족해방의 계기가 우위에 선 채 다른 계기와 대체로 길항적 관계에서 작용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 그런데 이런 조야한 개관이 헤겔의 철학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오늘의 현실을 해명하는 데 어떻게 연결이 된다는 걸까요? 일단, 산업화와 자주의 계기란 헤겔 식의 모순을 이루는 쌍도 아니고, 또 거기서부터 민주화나 핵무장 따위가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도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앞서도 언급했듯이, 개념이나 계기의 연결을 통한 설명은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단순화하여 재구성하는 방편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자주’가 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립하거나 상충하는 계기로서 그 구체적 형태들을 달리하며 작용해 왔다고 파악하는 것이 오늘의 사태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9. 무엇보다도 저는 우리의 현황이 산업화 우위의 맥락에서 작용하던 내부적 동인이 목표를 잃고 취약해진 가운데 외적 요인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국면이라고 봅니다. 단적으로 말해,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뜬금없는 윤석렬 정권의 등장은, 민주화 이후 자주의 요소가 개입된 시도들이 좌절되고 그간의 산업화 방식이 낳은 문제들이 극복되지 못한 데서 비롯한 방향 설정의 공백을, 고유한 내용 없는 형식적 수단에 불과한 검찰 중심의 관료적 집단이 주워 ‘먹은’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강하게 도사리고 있던 미국의 요구가 그 비어 있는 자리에 손쉽게 파고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사태일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우리는 한 나라의 정책 결정 심장부가 도청을 당하고도 항의할 생각조차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신뢰’의 일방적 투명함을 목도하게 된 것이죠.
10. 촛불혁명이라는 놀라운 형태의 민주화를 발판으로 성공적인 출발을 보였던 문재인 정권이 궁지로 몰리기 시작한 과정을 돌이켜 보면, 계기들의 양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노이 회담의 결렬 이후 ―그 다음에도 2019년 6월말의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같은 몇몇 에피소드적 사건은 있었으나 실질적 변화는 없었죠― 남북의 관계는 사실상의 관계 단절에 이르기까지 악화 일로를 걸었고,9 대중의 관심과 기대도 급속히 식어버렸습니다. 조국 사태가 터진 것이 2019년 9월이니까, 대외 여건 악화에 내부의 문제가 겹쳐진 양상이라고 해야겠죠. ‘적폐청산’의 도구로 썼던 칼날에 베인 꼴이라고들 합니다만, 더 큰 문제는 대북 정책의 좌절을 뚫고 나아갈 만한 ‘적폐청산’ 이상의 목표가 없었던 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2020년 코로나에 대한 대응으로 국민적 역량이 결집되긴 했으나, 그해 여름부터 터진 아파트 가격의 앙등이 민심의 이반을 재촉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지요. 문재인 정권이 구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거푸 확인된 셈입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할 만한 동인이나 세력은 눈에 띄지 않았지요. 윤석렬의 검찰 정권은 앞선 정권과 맞서는 공허한 힘만을 과시한 채 아무런 비전도 없이 이 상황을 집어삼킨 격입니다. 그렇다 보니, 실제의 내용은 강력한 외세의 영향을 적극 수용하는 것 말고는 이전 정권에 대한 반대라는 퇴행적 방식으로밖에 채워질 수 없는 것이겠지요.
11. 그렇다면 이제 우리 사회의 목표는 이러한 퇴행과 종속성의 강화를 다시 되돌리는 데에 맞춰져야 할까요? 아마 대부분 그런 것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새로운 변화의 기초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목표를 설정하는 일, 여기에 헤겔을 끌어올 수 있을까요?
② 에서 계속
♦ 다음 글
「루치오 콜레티와의 정치적·철학적 대담」, 이병천·박형준 편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포스트 마르크스주의·Ⅰ』, 의암출판, 1992, 276쪽.↩
이 점에 대해서는 졸저, 『철학의 시추 ― 루이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철학』, 백의, 1999 참조.↩
슬라보예 지젝, 『헤겔 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4장, 특히 401장 이하 참조.↩
여기에 대해서는 졸고, 「현상에서 윤리로」, 졸저, 『해체와 윤리』, 그린비, 2012 참조.↩
졸고, 「끝나지 않은 변증법의 모험」, 졸저, 『철학의 슬픔』, 그린비, 2019, 192쪽.↩
대표적으로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미중전쟁> 참조. 그 내용은 책 (『1950 미중전쟁』, 책과 함께, 2021)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최병천, 『좋은 불평등』, 메디치, 2022. 특히 7장, 8장 참조.↩
https://www.kotra.or.kr/bigdata/visualization/korea#search/ALL/ALL/2023/8/exp (KOTRA 통계) 2023년 연간으로도 수출, 수입 점유율은 각각 7%와 22.2%로 수위를 보이고 있지요.↩
이로부터 일년 뒤인 2020년 6월 북한은 남북통신연락 채널을 폐기하고 급기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었죠. 2021년 7월 통신선은 복원했으나, 같은 해 남북간 왕래 인원은 0명이었고, 이런 상황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욱식,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서해문집, 2023, 122, 216쪽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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