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산책1-독특성과 우연성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형이상학 산책1-독특성과 우연성
1)
특유한 존재가 있을까? 누구나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화를 내지는 못하지만, 씁쓸한 기분이 들 것이다. 그가 누구도 아니며, 세상에 유일하며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일 텐데, 갑자기 사람에게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궁금해졌다.
우선 특유한 존재가 있을까 생각해보자.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론에서 모든 개체는 특유한 존재라 했다. 만일 어떤 것이 되풀이된다면, 그것은 우연성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나왔으니, 일회적 존재일 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주장대로 개체가 특유한 존재 즉 모나드라면, 곧바로 함정에 빠지고 만다. 어떤 존재가 특유한 존재라면, 그것은 그것 외의 다른 모든 존재와 구별되는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특유한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은 동어반복적이다.
모든 특유한 존재가 모든 성질을 갖는다면, 이들은 서로 무차별한 존재가 되니, 모나드론은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서로 무차별하다는 점에서 동일한 모든 존재에서 차이가 있다면, 잠재성과 현재성의 차이에 불과하다. 즉 모든 존재는 잠재적으로는 무차별한 동일성이지만 현재적으로는 즉 각기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것과 구별된 성질을 나타내게 된다.
2)
현실적으로 우리는 다수의 동일한 존재를 발견한다. 물방울이나 나뭇잎이 다수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다수성을 인정하려면 우연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동일한 개념이 현실화될 때 현실적 조건에 속하는 우연성 때문에 다수의 존재가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개념이 우연히 실현되었다면 다음에도 우연히 또 하나의 존재가 출현할 수 있고, 아직 이 우연이 출현하지 않아, 지금은 유일하게 존재하더라도 언젠가 이 가능성을 실현되기 마련이니, 당연히 복수적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복수적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우연성의 개념이 문제가 된다. 우연이 원인이 없다는 뜻이라면 우연한 존재 즉 원인 없이 출현한다는 존재란 신의 개입이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연한 존재라는 가정도 부정될 수밖에 없을까?
3)
우연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개념은 현실의 특정한 조건에서 실현된다. 특정한 조건에서 실현된 사건 자체는 우연적이다. 그 조건 자체가 일회적으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개념은 다른 조건에서도 실현되니, 사건은 법칙의 측면에서는 반복되지만, 매번 일어난 사건 자체는 일회적이며, 우연적이다. .
예를 들어 주사위는 엄밀하게 역학법칙에 따른다. 하지만 그것이 던져질 때 작용하는 힘이 매번 달라지고 한번도 동일한 경우가 없으니, 매번 던져져 얻어진 숫자는 일회적 사건이 된다.
하지만 개념이 실현되는 조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개념이 실현되는 조건은 일정한 정도 안에서는 그 차이가 무시되고 따라서 이런 경우 동일한 동일한 개념은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흔히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할 때는 이런 경우일 것이다. 주사위 던지기도 이런 경우일 것이다.
반면 어떤 경우에는 그런 범위가 너무나도 미세하여서 동일한 조건이 출현하지 않거나 또는 그 조건이 너무나 복잡해서 그 총합이 동일한 경우가 없는 경우 현실적으로 반복되지 않을 일회적 사건 즉 우연이 발생한다. 로또의 경우나, 역사적 사건과 같은 경우이다.
4)
현존의 복수성을 인정하는 칸트의 사유를 생각해보자. 칸트는 사유의 개념이 경험의 시공간적 현실에 적용되면 복수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칸트에서 시공간이란 균질적이고 텅 비어 있으며 무한하다. 그 때문에 칸트는 시공간을 실재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감성적 주관의 형식으로 보았다. 하지만 시공간이란 사물들이 서로 관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공간은 물체의 공간과 다르며, 나의 시간은 그대의 시간과 다르다. 시공간이 이처럼 유한하고 비균질적이며 나름대로 어떤 성질 즉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바탕을 갖는다면, 칸트의 논리를 뒤집어 주관의 형식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공간이 감성의 형식이든, 실재하는 관계이든, 개념이 실현되는 시공간은 시공간이 개념에 대해 필연적이라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가 출현한다. 그러므로 시공간은 개념에 대해 우연적인 것이다.즉 어떤 것이 어떤 시공간에 위치할 것인가는 전적인 우연이다. 내가 이곳에 지금 있을 이유는 없다. 우연히 여기에 지금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우연성 때문에 개념은 다른 시공간에서도 출현할 수 있으며, 현존의 복수성이 성립한다. 칸트가 현존의 복수성을 인정한 논리 역시 우연성을 깔고 있다.
5)
사건의 우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복수적 사건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인간의 경우도 사실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런 우연적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서로 일회적이지만 사실 복수성이 가능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유일한 대체 불가능한 독특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모나드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즉 내가 존재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 나는 아직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자연은 왜 나를 만든 것일까?
더는 그런 물음은 던지지 않기로 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우연한 존재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허무를 견디듯 우연을 견딜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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