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시대와 철학]
[출처] https://blog.naver.com/readingclassics/222995108058 (세상책방 진로글방)
이 글은 지난 1월 27일에 ‘말과활아카데미’에서 열린 기획강좌 <지금, 여기의 정치철학: 빼앗긴 법치주의 정치철학적 고찰>의 1강(강사: 김성우) 강의록 일부를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을 알립니다.
김성우(상지대)
왜 ‘자유’를 묻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정의 내릴 때는, 지배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자유의 반대말이 ‘지배’이기 때문이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가 왜 노예인가? 주인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노예이다.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런데 지배에 대한 관점에 따라 자유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유의 의미가 여러 가지이기에 자유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애매모호하다. ‘자유주의’라는 말이 혼란스러운 이유이다.
자유주의(liberalism)가 유래한 liberal이라는 말은 현재 미국에서는 진보를 뜻하고, 유럽에서는 소유의 자유와 시장의 자유를 주창하는 시장주의(자유방임주의와 작은 정부를 외치는 고전적 자유주의나 이것의 세계화 버전인 신자유주의)를 가리킨다. ‘libertarian’의 경우도 지금은 시장만능의 극우논리로서의 자유지상주의(신지유주의)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최초로 썼던 단어이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단어의 원초적인 의미는 바로 지배로부터의 자유이다. 모든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지배 없는 삶. 이것이야말로 무정부주의자들의 꿈이다.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마르크스가 내린, 코뮌주의의 정의도 자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코뮌주의란 “자유로운 개인들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연합(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런데 지금의 자유주의는 재산권과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며 지배 없는 삶을, 재산(생산수단)이 있는 소수에게만 부여하고 재산이 없는 다수를 지배하는 논리로 전락했다. 자본과 이를 보호하는 권력에 의해 착취 받을 자유만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만, 즉 형식적으로 자유로울 뿐이다. 자유로운 소수가 다수를 예속하고 착취하는 자유주의의 자유는 형식적인 자유, 가짜 자유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가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소수만 자유로운, 더 정확히는 죽은 노동인 자본만 자유로운, 가짜 자유를 외치는 자유주의가 자유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루소,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포함해서 사르트르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 진정한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철학자가 외친 진짜 자유를 다시 외쳐야 한다. 그래서 진짜 자유를 실현하는 ‘세계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만인이 자유로운 이성국가(헤겔)이든, 자유로운 연합(마르크스)이든, 다중의 절대민주주의(네그리)이든, 자유로운 시스템으로서의 국가(지젝)이든, 어소시에이션으로서의 세계공화국(가라타니)이든.
세계화로 인해 불평등이 심각해지자 자유주의자들이 극우 포퓰리즘으로 전락해서 자유의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스스로 자유의 적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시장 실패로 인해 시장의 자유가 예전의 헤게모니(설득에 의한 지배력)를 잃었다. 그러자 우리 사회에서 보수 언론이 ‘공정’이라는 단어를 다시 훔쳐갔다. 그들이 말하는 공정은 교묘한 엘리트주의인 ‘능력주의’를 포장하는 기만적인 언어조작에 불과하다. 본래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말한 ‘공정’은 소수 엘리트가 부와 지위의 독점을 보장하는 논리인 능력주의가 아니라, 최소수혜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는 사회 정의이다. 유사하게 마이클 샌델도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이 능력주의를 내세워 공정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폭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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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단어는 1980년대 민주화 이후에 우리의 간절한 열망에서 사라졌다. 어떤 낱말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가 있는 것 같다.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많이 화석화됐고 더 나아가서는 자본에 의해 독점화되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의미보다는 왠지 낡아빠지고 의미 없게 느껴진다. 도리어 정의나 평등 아니면 복지라는 단어가 훨씬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정의라는 철학적인 개념도, 평등이라는 개념도, 복지라는 개념도, 자유 개념이 빠지면 그 고유한 의미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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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화되었다. 그런데 민주화된 이후에 우리는 실제로 자유로운가? 일상생활에서 여러분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순간이 어느 때인가? 예컨대, 지도 교수님에게 매여 자기 발언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 심지어 고상한 음악을 하는 대학에서도 매를 맞는다. 다행히 물의를 빚은 그 폭행 교수는 쫓겨났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항상 무언가에 예속되어 있어요. 한 청소부 아주머니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자신은 비정규직이고 그래서 일자리를 계속 유지해야 하므로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워도 항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법치의 이름으로, 여론의 이름으로 미국과 브라질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극우적인 엘리트 정부가 들어서기도 한다. 이로 인해 촛불시민이 이룩한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위기 앞에서 현재의 정치 시스템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지운 제도인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촛불시민의 강인한 열망도 확인할 수 있다. 열망은 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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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속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유와 반대가 되는 단어, 즉 ‘지배’와의 대조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모델 1은 ‘지배를 간섭으로 해석할 것인가?’에서 비롯된다. 이때, 자유는 ‘선택’이 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지상)주의 모델이다. 모델 2는 ‘지배를 강제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자율’이 된다. 자유는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하게 되어 자율적인 인간들이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는 모델이다. 모델 3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할 것인가?’이다. 이때, 자유는 ‘해방’이 될 것이다. 이 모델은 자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좋은 공동체 체제를 통해 실현될 가치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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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첫 번째 모델,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이기적 개인’이 가장 원하는 자유는 간섭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따라서 첫 번째 자유의 모델은 신자유주의의 모델로서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누가 개인에게 간섭하는가? 간섭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는 점도 여러분이 이해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최소 국가’를 의미하다. 국가가 내 재산을 지켜주고 타인이 내 재산을 뺏어가는 것을 막아주기를 원하는가? 방범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다. 다만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세금을 많이 걷어가는 것은 로빈 후드처럼 강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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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두 번째 모델, 강제로부터의 자유
이제, 두 번째 자유의 모델이다. ‘지배’를 ‘강제’로 해석해 보면 이런 ‘강제’의 반대말은, 칸트가 말한 ‘자율’ 개념이다. 자율이란 내가 스스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고 나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만, 이때의 규칙은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수학처럼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공자님이 말씀한 경지이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내가 내 뜻대로 하지만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지이다. 그래서 칸트가 말하는 자유 개념이 왜 공리주의나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다른지 여러분들이 여기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도덕법칙을 내게 스스로 부여하는 자율이 진정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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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세 번째 모델, 예속으로부터의 자유
자유의 세 번째 모델은 지배를 예속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간섭이나 강제는 간헐적일 수 있다. 하지만, 전근대사회의 노비나 현대사회의 비정규직처럼 예속은 지속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예속이라는 말의 반대말은 해방(liberation)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월레스가 외친 프리덤(freedom)이다. 노동해방과 민족해방과 같은 단어가 이러한 모델을 대표하는 말이다. 이는 단순한 형식적 자유가 아니다. 해방의 자유를 의식하고 실현하려면 먼저 노예로 살아가는 예속적 삶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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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민주화된 이후에 민주와 자유를 얻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건 형식적인 민주와 형식적인 자유에 불과하다. 자유를 형식적인 자유와 실질적인 자유로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인 자유라는 말은 법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분제 사회의 노예는 아니다. 법적으로 1인 1표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 우리는 똑같이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실질적인 자유, 실질적인 평등이 요구된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민주화를 통해서 형식적인 자유와 형식적인 평등을 성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사법 재판에서 자본과 권력에 유리한 판결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당장 법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 돈과 연줄이다. 예컨대, 삼성 X파일 사건이 있었다. 삼성과 연관된 쪽에서 대권 주자한테 어마어마한 뇌물을 준 사건이다. 그런데, 이걸 기자가 신중하게 공표한 행위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사생활을 침해한 범죄라고 해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래도 그중에 다섯 분이 반대 의견을 냈다. 사실 반대 의견 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반대 의사를 표시하면, 반재벌 성향의 법조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판사를 그만두고 나와 변호사로 성공하기 어렵다. 재벌에 협조하면 엄청난 수입이 보장되어 있다. 반대하는 행위는 수십억 원, 많게는 수백억 원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판사들도 소수이지만 존재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조금씩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성취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법꾸라지’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선택적 수사’, 심지어 ‘조작적 수사’를 하는 검사와 이에 동조하는 판사도 존재하고, 이를 여론조작으로 돕는 언론인들도 있다. 이러한 엘리트들이 제도적 권한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우 포퓰리즘이 우리 시대의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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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자유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라는 단어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단어를 극우에 양보해서는 안 된다. 참된 자유는 단지 국가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가짜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국가 권력에 참여할 수 있는, 바로 주체적인 ‘시민으로서의 자유’이다.
일상생활에서 예속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행위가 거시적인 노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미시와 거시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한 대로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근본 흐름은 같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전체가 대립하는 게 아니라, 어떤 하나의 흐름은 개인을 만들고 또 하나의 흐름은 전체를 만든다. 자유주의의 흐름은 자유주의적 시민을 만들고 자유주의적 국가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어떤 새로운 정치적 운동은 새로운 주체의 모습과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 사회에는 불행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우리에게 강제된 제도인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체제’ 탓이다. IMF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1997년에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들어왔다. 불행하게도 구조화된 불평등과 착취와 억압이 커졌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신자유주의 사회의 인간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들이 보여주듯이, 경제는 성장하는데 왜 대다수는 행복하지 않은가? 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가? 왜 정의와 평등이라는 말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가? 이는 진정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이는 정의도 평등도 무의미하다. 마찬가지로 정의와 평등이 없이는 진정한 자유가 성취될 수 없다. 따라서 정의와 자유, 평등과 자유를 함께 고민해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할 수 있다.
푸코가 말한 대로 철학이란 바로 현대에 우리가 사는 우리의 현실 삶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며 동시에 우리의 현재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로크의 <정부론>은 오늘날 우리의 제도를 그리고 있다. 이 <정부론>에서 나온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가 미국 헌법의 언어이며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이다. 이처럼 고전이 우리의 제도와 틀과 우리의 삶의 방향을 만든다. 그러면 내가 어떤 고전을 읽는가가 우리 삶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하다. 현재 만들어진 것을 이해하게 해준 거라면, 거꾸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우리가 이것을 다른 식으로 바꿔볼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는 데 의미가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이런 점에서 ‘진정한 자유’에 관한 정치철학적인 정립에 대단히 중요하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에까지
과연 트럼프적인, MB적인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정치권력 행사는 사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제도이지만 민주주의 위기라는 시대적 모순으로 인해 제도가 뒷받침하는 권한 ‘행사’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이다. 과연 우리의 입법권이 국민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오히려 우리 국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나 있지 않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과연 우리 국민들에게 잘하고 있는가? 우리의 행정부와 사법부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불신은 널리 퍼져가고 있다.
입법, 행정, 사법이라는 정치권력이 이렇듯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게 사적인 것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인가? 공적인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자유주의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전혀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개인화와 전체화는 같은 흐름의 다른 표현이므로 어떤 개인과 어떤 정치 공동체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하지, 공적이라고 해서 자유를 억압한다는 단순 도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출발점과 문제의식을 오늘 철학적으로 마련해 보고자 했다. 일단 자유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원초적이고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성취해야 할 가치가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언제나 삶의 현장에서 자유를 향한 전쟁터에 있다. ‘심장의 자유를 이성적인 자유로 실현하는 것,’ 이것이 루소,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적 과제였다. 내가 살아가는 데 어느 순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낀 그 순간이 바로 철학함의 시작점이다. 루소만 따로 읽으면 그 철학적 의미가 잘 엮이지 않는다. 고전들도 서로 관계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루소를 칸트나 롤스와 같은 사람의 입장 속에서 읽을 수 있지만, 헤겔이나 마르크스, 니체나 푸코 같은 사람들과 연결해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계열로 책을 읽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고전들도 관계가 있으므로 여러 계열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다양한 계열의 철학자들이 등장했다. 한 사람의 철학도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의 망 속에 있고 그런 관계망 속에 서야 그 철학적 고전의 의미가 우리의 삶을 제대로 비출 수 있다.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우리 사회에서 독재적 억압에서 벗어난 민주화 이후에 왜 평등과 정의뿐만 아니라 다시 자유를 말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유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한쪽에서 독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진정한 실현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평등과 정의를 강조하다 자유를 놓쳐버리면 평등과 정의를 외치는 체제도 (구소련의 스탈린 독재정권처럼) 억압적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이 절규한 것처럼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 버렸다’는 자기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말은 독재라는 거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우리 스스로가 일상생활에서 자유의 적(敵) 노릇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한 것이다. 자유는 자유주의의 독점물이 될 수 없다. 시장과 선택의 자유는 단지 하나의 자유가 아니라 소수만을 위한 가짜 자유이다. 이러한 가짜 자유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진정한 자유에 역행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자유는 서양 근대 정치철학에서 신분제와 봉건사회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시대적 열망을 담은 주요한 가치어가 되었다는 점에서 자유는 단지 근대적인 것만도, 자유주의적 것만도 아니다. 자유가 있어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 자유는 인간다움의 기초이다. 이런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다. 정의는 평등한 자유를 실현하는 제도의 원칙이다. 공정은 자유주의적 정의관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지점이다. 소수의 횡포로 다수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회는 정의롭거나 공정하지 않다. 이를 능력주의로 공정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공정을 훔친 격이다. 물론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진정한 정의로 가는 디딤돌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루소, 헤겔,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정의이다. 민주주의가 위협에 받은 지금이 도둑맞은 공정을 되찾아 빼앗긴 자유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정의로운 시스템을 만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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