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예술의 화해(2)-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삶과 예술의 화해(2)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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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복은 후반부에 이르면 전반부와는 대립된 성격으로 변화한다. 그녀의 욕망은 이제 남성적 욕망의 형태를 띠며, 작가는 최후로는 금복이 남자로 바뀌는 것으로 설정한다. 금복은 이런 남성적 욕망에 토대를 두고 총명한 지혜를 이용하여 마침내 평대에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금복은 노파의 국밥 집을 운영하다가 다방으로 바꾸어 커피를 팔게 되고 돈을 모았으나 강도에게 다 털린다. 그날 폭풍우가 치면서 국밥 집 지붕이 무너져 노파가 쓰지도 못하고 감추어놓은 돈 무더기가 쏟아진다. 그 중에는 남발안이라는 곳의 토지문서도 있었는데, 금복은 곧 남발안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금복은 지식인 다운 모습을 지닌 ‘문’(이름이 아니라 성만 기록된다)을 데리고 남발안을 방문한다. 문이 이 땅의 진흙을 만져보고 이 진흙을 이용해 벽돌을 찍으면 되겠다고 말하자. 금복은 문에게 벽돌 개발 책임을 맡기고 뚝심을 부려가면서 가진 모든 돈을 투자하여 마침내 벽돌공장을 세운다. 여기서 나온 벽돌은 단단하고 아름다워 전국에 팔리고 곧 금복은 부자가 된다.
금복은 그녀가 과거에 만난 사람들을 불러모아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그녀는 생선장수를 불러 평대에 운수업체를 세우며 그 정점에서 금복은 그녀의 거대한 꿈을 실현시킬 고래를 닮은 극장을 세우려 한다.
작가는 이 고래 극장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는 금복의 고래에 대한 동경을 서술하면서 이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를 통해 금복은 그녀의 뒤를 쫓는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런 고래를 획득할 수는 없다. 결국 극장이라는 환상적 예술의 형식을 통해 고래를 획득할 수밖에 없으니, 고래 극장이란 이런 점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고래극장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존재이며 따라서 허망한 존재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래극장은 다름 아닌 자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죽음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런 자본은 사실 축적한 순간 곧 무너지고 마는 허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금복은 마침내 고래극장을 세움으로써 고래를 획득했다고 믿지만 사실 이 순간이 바로 그녀가 추구했던 거대한 욕망이 물거품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금복은 자신이 어릴 때 사귀었던 약장수를 불러 고래극장을 맡기고 자신은 어린 창녀인 수련의 몸을 탐닉한다. 하지만 약장수와 수련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둘은 미리 돈을 빼돌린 다음 함께 도망치고 만다. 금복은 실의에 젖어 술에 취해 살다가 극장에 라이터를 던져(떨어트린 것이지만, 아마 던졌을 것 같다) 고래극장은 불타고 만다. 영화를 보던 관객 800명도 함께 죽는다.
금복의 몰락은 자본의 몰락이니, 자본의 사회과학적인 일반적 법칙이라 하겠다. 하지만 작가가 자본을 그려내는 방식에는 자본에 대한 사회과학적 파악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후일 자본가가 되는 금복이 전반부에서는 오히려 예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금복이 기업을 세우고 마침내 고래 극장을 세우는 것을 죽음의 극복과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래 극장은 자본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을 의미한다. 이 경우 예술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허망한 꿈을 제공하는 사기 예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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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정한 예술은 어떤 것인가? 천명관의 입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토마스 만의 입장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토마스 만은 독일 낭만주의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기초하여, 예술을 죽음에 대한 동경, 몰락에의 의지를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에게서는 몰락과 죽음이 곧 아름다움이니 그런 점에서 예술은 삶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천명관은 토마스 만과 달리 예술을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는 진정한 의지로 설정한다. 작가는 예술의 꿈과 자본의 꿈이 어쩌면 동일한 바탕 위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은 앞에서 금복의 삶을 통해 말했듯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인데, 작가는 이 점에서 예술 또한 마찬가지로 보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자본이 죽음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판단 위에서 작가는 오히려 진정한 예술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 삶의 의지를 지탱해주는 힘이라고 본다. 이런 판단을 통해서 이제 소설 3부에서 예술가로서 춘희의 삶이 시작된다. 작가에게 예술가는 병약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춘희의 모습이다.
춘희의 삶에서 보듯이 예술가는 마침내 예술에 도달하기까지 삶 속에서 끝없는 희생을 겪어야 한다. 마치 노파가 무심한 눈을 가진 반편이를 닮았다고 자기 딸을 애꾸로 만들었듯이 금복은 춘희를 태어났을 때부터 냉담하게 대한다. 춘희는 춘희가 걱정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지만 단순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결과인 듯 춘희는 말을 하지 못하며, 어머니 금복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온갖 수난을 당한다. 마침내 춘희는 남발안 벽돌공장으로 돌아와서 들판을 쏘다니며 짐승처럼 살아간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통뼈인 트럭 운전사의 아들을 만나 잠시 삶의 기쁨을 찾고 아이도 놓지만, 그는 춘희가 아이를 뱄을 때 자신의 자유가 얽매이는 것이 싫어 춘희를 버리고 떠난다. 춘희는 그가 떠난 겨울 차가운 눈 벌판에서 아이를 먹이려 애쓰다가 잠이 들고 아이도 얼어 죽게 된다. 깨어난 춘희의 온몸에서는 새로 탄생하는 예술의 힘인 듯 울음이 터진다. 말 못했던 자폐아 춘희가 드디어 예술적 소통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미 감옥을 나왔을 때 노파의 두부를 먹으며, 춘희는 수난을 일차 마치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의 죽음으로써 춘희는 예술적 단련의 문을 통과하게 된다.
마치 예수 수난사를 연상시키는 이런 춘희의 삶(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이 더욱 그렇게 보이게 한다) 가운데 그녀에게 내재하던 교감의 능력이 싹이 트고 자라나며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며 그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으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든다.
벽돌을 만드는 것은 금복과 춘희가 동일하지만 금복은 그것으로 허망한 부를 쌓으려 했던 반면 춘희는 삶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다. 춘희는 무상의 예술로서 벽돌을 남발안 벌판에 쌓아놓고 죽는다. 그러나 예술로서 벽돌은 살아서 춘희의 죽음을 넘어선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벽돌로 대극장이 완성된다. 그것은 고래극장과 같은 극장이지만, 이제 의미는 달리 한다. 고래극장이 헛된 꿈을 부풀리는 가상의 세계라면 대극장은 삶의 버팀목이 되는 예술이다.
6)
전체적으로 볼 때 삶과 예술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천명관 작가는 토마스 만과 마찬가지 예술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이 삶과 예술을 극명하게 대립시켰던 것과 달리 천명관은 삶과 예술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미 삶을 대변하는 자본가 금복에서도 내재적으로는 예술적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 다만 금복의 예술은 허망한 꿈으로서 예술이니, 그것은 자본과 동일한 속성이 된다. 거꾸로 춘희는 예술의 원리를 대변하지만 그의 예술은 죽음에의 동경으로서 예술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로서 예술이니, 예술은 고통과 희생을 딛고 출현하며 삶을 견디고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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