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㊹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㊹
2023년 3월 19일 정암학당 강의록
1-3 통치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3-1 통치자들의 선발과 자격(412b-414b) – (1)
*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제부터 <국가>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이상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곳 정의로운 국가와 관련한 논의는 일단 주제 구분으로만 보면 3권 말미 412b에서부터 4권 434c까지만 다루어질 정도로 분량이 생각보다 짧다.(<국가> 전체 분량의 15분의 1정도) 내용도 우선 이상 국가의 기본 구조를 수립하는 차원에서 계층들의 분화 및 그에 따라 등장하는 통치자들의 자격과 생활방식, 근본 임무 등이 언급된 후,(412b-427c) 그런 나라에 어떤 덕들이 깃들어 있기에 정의로운 나라이자 행복한 나라가 되는지가(427c-434c) 매우 압축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짧기는 하지만 “분업적 공동체로서 각기 천성과 소질이 다른 세 계층들이 자신의 고유한 직분을 온전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덕목을 갖춘 정의로운 나라가 되고 동시에 모두가 행복한 나라가 된다.”는 플라톤 이상 국가의 기본 요체를 담고 있다. 그러나 <국가>를 이상국가론으로 알고 있는 독자들로선 학자들이 분류한 소주제별 목차 구성에 있어 이상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를 주제로 내세운 부분이 여기 이 정도 분량으로만 설정되어 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이해를 위해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플라톤의 <국가> 논의의 전체 구도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 <국가>는 먼저 제1권에서 부정의한 자가 행복하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논리적 부당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제로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적극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살피려면 소문자보다 대문자가 더 잘 보이듯이 개인이 아닌 국가로 확대하여 살피는 것이 한결 쉽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국가를 살핀 다음 그것을 통해 정의로운 개인을 살피고 또 부정의한 국가를 통해 부정의한 개인을 살핀 후 그 양자를 서로 비교하려 한다. 이에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구조부터 우선 수립한다.(427c까지) 그리고 그 나라에 깃든 덕목들을 살펴 그 나라가 왜 정의롭고 행복한 나라인지를 언급한다.(434c까지) 여기가 현재 우리 논의가 서 있는 지점이다. 이렇듯 주제 구분상 정의로운 국가의 수립과 특징들을 담고 있는 이 부분은 비록 정의로운 국가의 요체를 담은 것일지라도 소크라테스가 애초에 설정한 전체 논의 구도와 순서에 따른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생각보다 내용이 짧은 것이다.
* 이참에 <국가> 전체의 논의 구도의 이해를 위해 이후의 논의 구도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논의 구도상 다음 단계로 소크라테스는 앞서 다룬 대문자로서 정의로운 나라를 토대로 소문자로서 정의로운 개인을 살피고 나라와 마찬가지로 개인 역시 영혼이 세 부분으로 구분되고 그곳에도 네 가지 덕목들이 깃들어 있음을 확인한다.(434d-445e) 그리고 논의 계획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비교 대상인 부정의한 나라와 부정의한 개인을 다루려 한다. 그러나 글라우콘 등 대화 참여자들은 논의 진행을 저지하고 소크라테스가 앞서(423e-424a) 제시한 이상국가론에서 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남녀평등, 처자공유 등을 비롯한 몇 가지 난제들을 끌고 들어와 대답을 요구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직면한 이른바 세 가지 파도들(449a-474c)이다. 그 바람에 소크라테스는 애초의 논의 계획을 바꾸어 그들의 문제제기에 답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국가> 5권에서 7권까지의 내용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형식상으로만 보면 일종의 애초 논의 구도에서 일탈된 논의 영역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그 문제점들에 대한 극복의 기초로서 철학과 권력의 결합이 거론되고 그것을 논하는 과정에서 철학자 왕의 위상과 역할,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 철학의 교과 및 변증술, 좋음의 이데아 등 플라톤 철학의 핵심 주제들이 논의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앞서 짧게 기술된 이상 국가 관련 주제들과 내용들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연후 8-9권에 가서 계획된 논의 순서로 돌아가 부정의한 국가와 개인이 살펴지고 그후 비교를 통해 논의 목적대로 정의로운 개인이 부정의한 개인보다 행복하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증명된다. 요컨대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제4권에서 비록 짧은 분량으로 간단하게 제시되었지만 이후 부분에서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심도 있는 추가적인 논의들을 통해 그 내용들이 더욱 풍성해짐에 따라 결과적으로 <국가> 자체가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또한 플라톤 자신이 <국가>를 통해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주도면밀하게 보다 더 잘 드러내려고 했던 본래의 기획이자 드라마틱한 플롯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아무려나 이제부터 우리는 다룰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에 관한 논의는 내용적으로 통치자들의 선발 자격과 조건들 그리고 나라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세 계층들에 깃든 덕목들 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특징과 규범적 원칙들이 논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통상 우리가 국가론 내지 정치체제론 하면 떠올리는 주제들 즉 정부의 형태, 입법 및 사법과 관련한 조직과 제도, 법률의 체계와 절차 등에 관한 사항은 여기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이 통치자들을 비롯한 각 계층들의 덕목과 규범 즉 사람의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것도 섣부르다. 앞서도 살폈고 이곳에서도 그렇듯이(417b) <국가> 중간 중간 주요 단계마다 언급 내용들에 대한 법제화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데다 특히 말기의 대작 <법률>에 가면 시종일관 구체적인 제도와 법률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누차 강조하였듯이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정치가> 등 여타의 대화편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는 물론 무엇보다도 <국가>와 <법률>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가 필수 불가결하다.
* 이에 따라 이곳에서 우리들의 논의는 이곳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즉 정의로운 나라의 기본 구조 및 특징 그리고 그것의 구현을 위해 통치자들을 비롯한 각 계층들이 지녀야 할 덕과 규범에 관한 논의에 집중하되, 필요에 따라 <법률>에 관한 논의를 보충적으로 포함하게 될 것이다. <국가>와 <법률>의 관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권력과 철학의 결합, 이상국가의 실현가능성을 논하는 5권(471c-474c)에 가서 독립적인 주제로 심도 있게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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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b-c>
*정의로운 국가 수립을 위한 수호자 교육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한 후 소크라테스는 이제 수호자들 중 ‘누가 다스리고 누가 다스림을 받는지’οἵτινες ἄρξουσί τε καὶ ἄρξονται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바로 통치자들οἱ ἄρχοντες의 선발과 자격이 논의된다. 우선 통치자들은 연장자πρέσβυς이자 가장 훌륭한ἄριστος 사람들이어야 한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농부가 농사일에 그러하듯 자기 일에 가장 능숙한 사람을 말한다. 즉 통치자들은 수호자들 중에서 나라를 가장 잘 지키는 사람들 즉 나라 수호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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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자들’의 원어 οἱ ἄρχοντες는 ‘통치자’ 또는 공식 지위로서 ‘집정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ἄρχων(archōn)의 복수형이다. 그런데 이 말은 389a, c에도 나오긴 하지만 이른바 수호자들과 차별하여 이상 국가의 한 계층으로 따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드디어 통치자들, 수호자들, 생산자들로 구분되는 플라톤 정치체제의 기본 구조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들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철인왕정’이라 부르고 그 철학자 왕이 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여기서도 시종일관 ‘통치자들’로 표현하고 있듯이 <국가>에서는 통치 행위나 통치 역할의 주체를 표현할 경우, 군왕(473c, 543a 등)으로 부르든 철학자로 부르든, 기본적으로 복수 즉 집단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통치자들 가운데 특출한 한 사람이 생길 경우도 상정하고 있다.(445d) 그러나 지위명이나 일반명사 용례(491a, 591a 등)를 포함하여 ‘최선자들의 나라’에 상응하는 개인으로서 ‘왕도 정체적 인간’을 가리키거나 그와 참주의 차이를 비교할 때(580c, 587b 등)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통치자는 복수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흔히들 오로지 1인 군주정 또는 1인 독재정의 국가로만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요컨대 <국가>에서 통치 행위를 수행하는 주체는 기본적으로 집단으로서 복수의 통치자들, 군왕들, 철학자들이다.
*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이상 국가를 1인 군주정 내지 전제정으로 여기게 된 데는 순전히 텍스트로만 보면 제7권에 나오는 몇 가지 문구들에 대한 표피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는 통치자들이 ‘서로들 각기 번갈아가며 나라에서 함께 고생한다. συμπονεῖν ἐν τῇ πόλει ἕκαστοι ἐν μέρει’(520d)는 말이 나오고 또 비슷한 내용으로 ‘차례가 오면 서로들 각기 나랏일로 고생하면서 나라를 위한 통치를 한다.πρὸς πολιτικοῖς ἐπιταλαιπωροῦντας καὶ ἄρχοντας ἑκάστους τῆς πόλεως ἕνεκα’(540b)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사람들은 ‘each other’를 뜻하는 ἕκαστοι(hekastoi)나 ἑκάστους(hekastous)라는 말을 각기 한 사람의 군왕이나 통치자로만 해석하여 최고 통치자의 자리를 한 사람씩 돌아가며 맡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말들 모두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한사람만이 아니라 각각의 여러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즉 그 말은 통치와 관련한 복수의 역할들을 복수의 사람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 각기 돌아가며 맡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같은 부분(520d)에서 ‘함께 고생한다.’συμπονεῖν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유수의 역자들(P. Shorey, G. Grube, C. Reeve)도 모두 그 부분을 ‘각기 돌아가며 나랏일들을 나눠 맡는다.’(to share in the labors of state, each in turn)로 번역하고 있고, <국가>의 고전적인 주석가로 알려진 아담(J. Adam) 역시 그 복수형의 의미를 ‘때때로 고생을 서로 덜어주고 있는 (복수의) 통치자들의 (복수의) 교대들(relays of governors relieving one another from time to time)’로 풀이하고 있다. 요컨대 돌아가며 늘 혼자가 다 떠맡는 것이 아니다. 만약 통치를 돌아가며 혼자가 다 떠맡는다면 임기를 1년씩만 잡아도 50세부터 길게 잡아 70세까지 20년 동안 전체 통치자의 숫자는 20명 정도면 되고 2년씩 잡으면 10명, 4년씩 잡으면 고작 다섯 명으로 충분하다. 게다가 플라톤은 통치자들을 나라를 구성하는 세 계층을 각 집단ἔθνος(ethnos)으로 표현하고 있는데(420b) 통상 부족이나 종족 수준의 규모를 나타내는 그 말을 5명에서 20명 정도에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 이러한 논거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이상 국가의 정치체제들 1인의 철학자왕정으로 보는 견해도 만만치는 않다. 참고로 그 논거들은 대략 이러하다. 마치 거울에서 실상과 허상이 모든 게 동일하지만 동시에 반대이듯이,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체제는 허상인 1인 참주정의 정반대 실상으로서 완벽한 철학자 1의 통치체제로 설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통치자들을 집단으로 둔 것 역시 철학자가 철학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통치를 수고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분담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여럿을 두었을 뿐이다. 일종의 고통 분담 차원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위계나 능력 차이 없이 모두가 동일하고 완벽한 수준이므로 임기에 구애 없이 누가 돌아가며 통치업무를 맡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통치와 관련하여 분담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일들도 1인 통치자의 완벽한 능력으로 적합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처리할 수 있다. 등 등
* 그러나 <국가>에는 이 문제를 불식시킬 정도로 결정적인 플라톤의 언급이 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 ‘왕도정체’βασιλεία(basileia)를 ‘특출한 한 사람이 통치하는 체제’로, ‘최선자들의 정체’ἀριστοκρατίᾳ(aristokratia)를 ‘특출한 여럿이 통치하는 체제’로 직접 규정한 후에(445d) 이후의 언급에서 정의로운 국가, 최상위 정치체제는 일관되게 ‘최선자들의 정체’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544e,545c,547c) 물론 왕도정체와 최선자 정체를 구분 짓지 않는 언급들도 나온다.(576e, 580b) 그러나 그 경우는 통치자들 수(數)의 관점이 아니라 두 정체의 통치자들 모두 공히 철학자라는 관점에서 언급될 때이다. 그리고 <국가>의 이상 국가를 본으로 삼아 현실화한 실물로서의 현실 국가를 다루는 <법률>을 보면 그곳의 통치자들 역시 복수의 통치자들이고 역할도 각기 나뉘어져 그들 모두가 통치 업무에 참여하고 있다. 이를테면 <국가>의 군왕들이나 통치자들에 해당하는 역할로서 법수호자를 비롯해 사정관, 교육감독관 등이 나오고 야간위원회라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수 또한 법수호자는 37명이고 사정관들은 최초 12명에서 시작해 매년 3명씩 추가되며(946c) 최고 의사 결정 협의체인 ‘야간위원회’도 법수호자 10명과 수십 명의 사정관들로 구성되어 있다.(<법률> 752e-753a, 946c, 961a) 그리고 이곳에서 플라톤은 설사 최고 통치자를 1인으로 두는 왕도정체라 해도 반드시 입법자와 같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법률> 710d) 도리아 3국 중 스파르타만이 멸망하지 않은 까닭 역시 스파르타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복수의 왕들이 통치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법률> 691d-e) 이렇게 보면 <국가>의 철인왕정이라는 군주정이 <법률>에 가서 완화되어 최고 권력이 한 사람에 치우치지 않고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최고 권력자를 복수로 하는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는 견해 또한 텍스트상으로 맞는 말이 아니다. <국가>도 <법률>도 다 최고 권력자들이 복수이고 그들이 받는 교육 내용 또한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 최소한 권력 구조상 ‘철학자 집단의 통치체제’라는 기본 원칙에는 플라톤 중기나 말기나 변화가 없다. 이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플라톤의 정치체제론을 1인의 철인왕정체로 단정하고 내용적으로 그것을 반민주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1인 군주정과 독재정으로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20세기 초 나치스가 등장하면서 당시 권력가 게오르그(S. Georg) 주변의 명망 있는 독일 철학자들이 이른바 게오르그 학파를 결성하여 나치즘과 히틀러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플라톤의 철인왕정을 적극 내세웠기 때문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앞서 살핀 7권 문구들에 대한 그릇된 해석도 기본적으로 그들로부터 시작되고 강화된 것이다. 이들이 펴낸 관련 책들은 지금 이름조차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파시즘은 물론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 체제의 등장과도 맞물려 당대 급진 우파는 물론 스탈린주의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후 플라톤의 정치 철학은 20세기 서구 지성인들에게 독재정과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각인되었고 특히 종전 후 한나 아렌트와 칼 포퍼 등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된 이래 가히 전체주의와 반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철학으로 고착화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이에 대한 반론도 고전학자들은 물론 현대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심도 있게 전개되면서 최근에는 플라톤 정치철학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현대 자본주의 정치이론을 극복하는 기초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졸고 “플라톤과 정치철학”, 『아주 오래된 질문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정암학당 지음, 동녘, 2017 참고)
* 통치자들이 연장자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나이가 많아야 한다가 아니라 통치자가 되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오랜 기간 그 교육과 훈련을 훌륭하게 마친 그 만큼 가장 훌륭한ἄριστος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연장자라고 하면 많은 경험들에 기초한 연륜의 깊이를 먼저 떠올리는데 앞서도 살폈듯이 연장자의 훌륭함은 경험의 많고 적음 보다는 그 경험의 종류 즉 경험들이 영혼에 어떤 영향들 주는가에 달려 있다. <법률>에서도 이 원칙은 이어져 통치자들에 해당하는 법수호자들과 사정관들 모두 연장자들이어야 한다. 특히 그들 중 법수호자들의 경우에는 나랏일과 관련한 최고의 권력기구인 야간위원회에 참석할 때 각자 본성과 양육에 있어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30세 이상의 젊은이들을 반드시 데리고 들어가야 한다.(961d-e) 이른바 최고의 지성도 가장 뛰어난 감각과 섞여 하나가 될 때 가장 안전한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이상적 최선의 본으로서의 <국가>와 차선의 실물로서의 <법률>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 가운데 하나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원칙과 현실, 철학과 권력, 인치와 법치 등 삶과 현실의 주요한 갈등 국면에서 균형과 조화는 그 자체로 최고의 가치를 담보하는 요체이다.
[412d]
* 또 통치자들은 나라 수호에 슬기롭고φρόνιμος 유능해야δυνατός 하며 나라에 마음을 쓰는κηδόμενος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φίλος 것에 제일 마음을 쓰는 법이고 그것은 유익함συμφέρον 또는 잘되고εὖ πράττειν 잘못됨에 있어 자기와 같이 하는 경우의 것이므로 수호자들 가운데에서 그처럼 나라에 유익한 것이면 누구보다도 열의προθυμία를 다해 온 생애를 통해 그것을 행하려는 사람을 통치자로 선발해야만 한다.(41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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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훌륭한 사람은 농부가 농사일에 그러하듯 자기 일에 가장 능숙한 사람을 말한다.”는 말 그대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국가를 성립시키는 사람들은 어떤 계층에 속하건 어떤 직능을 갖고 있건 모두가 훌륭한 사람들인 것이다.
* 통치자들의 기본 자격으로서 ‘슬기로움’과 ‘유능함’ 그리고 ‘나라에 마음을 씀’은 나중에 언급될 영혼의 이성 부분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을 예비적으로 풀어서 쓴 말들이다. 그리고 나라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나라에 대한 헌신을 말하는 것으로 영혼의 기개 부분이 갖는 기본적인 특징을 포함하는 말이다.
* 그런데 나라와 통치자들 내지 수호자들의 이해가 동일하다는 생각은 그것만으로는 개인이나 국가들 모두에게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이기적인 통치자가 자기 이익을 국가 이익과 동일하다는 명분하에 국가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통치자의 자격에서 나라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 앞서 슬기(지혜)와 유능함을 먼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슬기로움은 장차 이성 부분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통치에 있어 대상의 이익 즉 시민과 나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앎의 덕목이고 유능함은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로 구현하는 구체적인 힘으로서 실천의 덕목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앎은 이미 실천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슬기가 유능함에 앞서 먼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덕목을 전제로 한 후에 그것에 희생과 헌신 열의가 더해졌을 때 진정한 이상국가의 통치자로서의 자격이 부여된다. 다시 말해 통치자들의 슬기와 유능함은 플라톤의 정체가 철학자들의 정체가 되느냐 피폐한 1인 참주정이 되느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금의 정치현실도 그렇듯이 어리석고 무도한 정치 지도자가 자기 나름으로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확신 아래 열의를 갖고 정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자가 열의를 가지면 가질수록 나라는 파국으로 몰린다. 성서의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수많은 사랑의 권고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평생을 그리하겠노라 마음 새기는 잘 알려진 성구이다. 그러나 덕목들 가운데 ‘의를 위하여 기뻐하며’라는 말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구에 감동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처신이 얼마나 그 말에 모순되는지는 모른 채 거리낌 없이 공정과 의리도 함께 외쳐댄다. 우리들의 무지는 자신들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피눈물이 될 수 있다.
* 이곳에는 통치자들을 누가 어떻게 선발하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본과 원칙으로서 말로 세우는 이상국가인 만큼 통치자들의 자격 이외에 제도로 규정되는 구체적인 선발 절차까지 논의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통치 권력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가의 문제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국가>의 원칙을 현실화한 것으로 평가되는 <법률>을 보면 <국가>의 통치자들에 버금가는 법수호자들의 선발 절차가 언급되어 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플라톤은 아테네 손님의 입을 빌어 “기병이나 보병에 복무하는 사람들, 그리고 감당할 힘이 있는 나이에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관리들의 선출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법률> 752e-754a) 관리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국가>에서 통치자로 번역되는 ἄρχων(archōn)으로 당연히 법수호자도 포함한다. 또 그들의 임기 역시 70세로 제한이 있어 법수호자들은 순차로 교체된다. 물론 이 선발 절차가 <국가>의 통치자 선발과정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비록 통치자 집단의 피선거권은 ‘최선자들’이란 제한 조건이 붙어 있지만 플라톤 스스로 통치자들을 선발하는 사람들로서 장교는 물론 일반 병사 등 시민 계급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큰 족적이 된 촛불 집회에서 가장 많이 외친 구호 가운데 하나도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였다. 최고 통치자들로서 법수호자들은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오늘날 대의 민주주의 정체처럼 시민들의 추천과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권력이 위임된 복수의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바람직한 정치체제에 관한 플라톤의 생각이 과연 무엇인지에 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 대해서도 추후 별도의 독립적인 주제로 따로 다루게 될 것이다. (통치자의 선발과 자격(1) 끝. 다음 회에 통치자의 선발과 자격(2), 건국신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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