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6)
1)
부산에 정착해서 모처럼 책상머리에 진득하게 붙어있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여유를 이용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독파해야 하겠다고 했지만,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번역본이 없었으므로, 사전을 찾아가며 까다로운 원전을 그것도 관계대명사로 이어진 마르크스의 문장을 읽어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의 자본론 읽기를 가로막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방대학교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교수를 혹사했다. 나는 거의 매 학기 18시간 어떤 때는 24시간까지 강의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 일상적인 업무, 학생들과의 만남, 교수로서의 학내 투쟁과 대외 투쟁이 나의 초조한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나는 마르크스 자본론 3권을 쌓아 놓고, 매일 남은 페이지가 얼마인가를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최초의 계획은 자본론을 다 읽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헤겔 논리학의 진행 방식을 검토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론을 거의 다 읽기까지, 도무지 헤겔의 논리학과 어떻게 연결시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으니,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었다.
거기에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로 구 운동권은 독선적이고, 영웅주의적이고, 반대중적이라는 등의 비판이었다. 그런 비판의 최종 점정{點睛]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였다. 그 시가 내용만 본다면, 꼭 당시 운동권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필요는 없었으나 누구나 그의 시를 운동권에 대한 비판을 읽었다. 그런 비판 앞에 운동권은 고개를 숙였으며, 부끄러움 때문에 병이 들었다.
구 운동권은 길을 잃었다. 대부분, 현실 정치권으로 흡수되었으며, 일부는 명상운동으로 나갔다. 이 시기 ‘방하[放下: 내려놓다]’라는 참선이 유행했다. 나는 과거 누구보다도 급진적이었으나 그 후 방하 운동에 참여했던 어느 교수로부터 술 자리에서 고백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더이상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았다. 무슨 잘못인지는 몰랐으나, 잘못했다는 죄책감만은 누구나 지나고 있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슬픔은 느끼지만, 무엇이 슬픈지는 모르는 상태와 같았다.
2)
이 시기, 구 운동권 문화를 대체하려는 듯이 새로운 문화가 들어왔으니 그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체제가 발전시킨 문화가 곧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이다. 이미 서구에서는 80년대 들어 유행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발독재 시대에 머물러 있었고 신자유주의로 변화하기 전이었으나, 이미 서구의 신자유주의 문화가 수입된 것이다. 당혹했지만, 먼저 문화가 수입되고 나중에 사회가 변화한다는 한국문화의 일반적 발전 법칙을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삽시간에 세상을 점령했다. 우리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하는 데 현실의 변화보다, 오히려 90년대 초 부딪힌 구 운동권의 좌절감과 자기비판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운동권의 거대 담론을 부정하지는 못했으나 거리를 두었던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앞에서 구원을 느꼈으며 구 운동권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끌려갔다.
어떻든, 포스트모더니즘은 엄숙하고 진지하기보다는 유희적이고 장난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금욕적이고 엘리트적이었던 모더니즘 문화에 대립하면서 쾌락을 허용하고, 대중성과 상업성을 받아들이자 했다.
민족과 민중을 말하는 것은 마치 철 지난 옷을 다시 꺼내 입는 것과 같았다. 그 대신 다양한 분야에서 일상적 투쟁이 독자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여성 운동, 지역 운동, 문화 운동, 소수자 인권 운동 등. 이와 더불어 새로운 다양한 단체가 세워졌다. 과거에 모든 단체 이름 앞에는 ‘민중’이나 ‘민족’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름 앞에 ‘시민’이라는 이름이 들어갔으며, 아예 ‘경실연’이라든가 ‘참여연대’라든가 하는 독특한 이름이 등장했다.
새로운 운동 단체는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자 했으며 세상은 합의를 통해 결정되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적인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더불어 길거리에서 시위는 진정되고 법과 언론을 이용한 투쟁 방식이 등장했다. 이제 앞에 고발장을 들고 카메라 앞에서 걸어가는 단체 대표의 모습이 언론을 장식했다.
2)
이러한 새로운 시민운동,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 운동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해 준 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변하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소위 자유주의 철학이었다. 갑자기 푸코와 데리다, 보드리야르의 철학이 밀어닥쳤다.
후기구조주의 철학이 밀어닥칠 때는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나 역시 여기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자본론을 거의 다 읽은 단계에서 원래의 계획을 일단 보류하고, 새롭게 소개되는 후기구조주의 철학자의 책을 허겁지겁 읽어 나갔다. 나는 불어에 능숙하지 못하고 아직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영어번역본을 구해 읽었다.
일단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출발점으로 하는데, 구조주의는 역사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언어학자 소쉬르가 놓았는데,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단단한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역사와 주체 속에서 모든 문제의 답을 찾으려 했으나 구조주의는 이런 역사의 개념이나 주체의 개념을 비웃었다. 한순간 내가 딛고 있는 받침대가 무너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구조주의는 구조의 변화만을 말했지, 이 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었다. 역사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에 의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보였다.
나는 여전히 역사의 변화를 믿는 편이었는데, 그렇다면 구조주의를 극복해야 했다.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일단 구조 개념의 철학적 토대를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편으로 구조주의에 매료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를 더 철저하게 공부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3)
처음 손에 잡았던 철학자는 푸코였다. 푸코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동의할 만했다. 그는 생체 권력이나, 판옵티콘의 자아 감시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소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내부에서 작동하니, 우리는 마치 자유로운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이런 권력에 의해 우리는 지배당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더욱 매료되었던 개념은 푸코의 권력 개념보다 담론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는 담론을 형성하는 담론의 구조를 제시하면서 이런 담론의 구조가 권력의 지배 아래 형성된다고 했다. 그는 심지어 진리의 기준이나 진리를 향한 의지조차 이런 권력의 지배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 하면서, 소위 ‘지식-권력 복합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푸코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억압적 거대 권력 개념과 이데올로기 개념과 대조되면서 나에게는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푸코의 주장은 당시 확산하고 있던 다양한 분야, 독자적 운동의 정당성을 제시해 주었다. 그런 운동은 각 분야에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권력을 제거하려는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푸코의 사상은 프랑스와 같이 발달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몰라도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노골적인 폭력 장치를 통해 강제적인 억압이 이루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푸코의 투쟁은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실제로 당시 처음 등장한 다양한 시민운동은 90년대 초중반에만 해도 아직은 커다란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시민 운동의 발전은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신자유주의가 노골화되는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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