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와 사건(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아니 에르노와 사건(2)
-두 작품 <단순한 열정>과 <사건>을 통해서
4)
<단순한 열정>에서 작가가 겪은 사건은 나이가 어린 유부남인 외국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사건이다.
주인공은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서서히 일상의 세계는 의미를 상실하면서 모든 것은 그 남자의 사랑과 연관된다. 남자와 만남이 정해지면, 주인공은 일체를 잊어버리고 남자와의 사랑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 어떤 대화나 표현도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기에는 부족하다. 오직 육체적 관계만이, 남자의 성욕이 살아 있을 때만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욕망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단순한 열정, 39쪽)
그러나 그 순간은 한순간이다. 남자가 떠난 이후 주인공은 남자가 아내나 다른 여자와 만나는 것을 상상하면서 질투에 빠진다. 주인공은 이 질투를 이기기 위해 마치 오연한 듯한 태도를 취해 본다. 또는 거꾸로 남자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는 듯이 혼자서 피렌체로 바캉스를 떠나지만, 이 모든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만약 그런 경우를[남자가 다른 여자와 차를 타고 가는 경우] 당하더라도 오만하고 무심하게 보이기 위해 짐짓 태연한 척 똑바로 몸을 펴고 걸었다. … 그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탈리앵 거리를 진땀을 흘리면서 걸었다.”(단순한 열정, 38쪽)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가 마치 글을 쓰듯이 피렌체에 나의 열정을 새겨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를 걸을 때나 박물관을 둘러볼 때나 A의 영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단순한 열정, 47쪽)
이미 예고된 헤어짐은 홀연, 아무 이유도 설명됨이 없이 일어난다. 외국인인 그 남자는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그 때문에 주인공은 삶이 마비된다. 주인공은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몽롱한 상태에 빠진다. 이 상태는 고통과 죽음과도 같은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겪으면서 두 달이 지나자 작가는 이 사건을 글로 기록하기 시작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원히 이 상태를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5)
두 사건은 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작가는 죽음을 체험하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 날밤 청소년기부터 간직해 온 내 육체를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생기잇고 비밀스러운 성기가 달려 잇던 육체를….나는 전시되고 사방으로 벌려진 성기와 바깥으로 열어서 긁어낸 배를 갖고 있었다.”(단순한 열정, 69쪽)
다시 태어난 주인공에게 세상은 “너무나 의미가 많은 존재와 사물이 있는” 세계이며, 그러나 기존의 말로는 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 세상은 “순수한 의식이 흥분된 상태에서” 보여지는 세계이다. 작가의 이런 말들은 마치 사르트르가 발견한 즉자의 세계를 암시한다.
작가가 사건을 통해 접한 세계는 바흐의 요한 수난곡에서 들려오는 신성한 세계이다.
“그리고 합창이 들렸다. Wohin! Wohin! 거대한 지평이 열렸고 ….고통과 영원한 죽음 속에 녹아내렸다.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단순한 열정>에서 주인공은 열정이 사라지고 점차 일상의 세계가 돌아온다. 그러나 때때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잠시동안 거대한 고요함이 내 안에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된다.”
여기서 ‘거대한 고요함’이란 앞에서 사건에 말한 ‘신성한 것’과 같은 의미이리라.
7)
작가는 두 가지 사건, 임신중절과 단순한 열정을 겪으면서 이 사건이 지닌 끔찍한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존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 작가는 자신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사건의 흔적을 찾아서, 그 사건의 원형을 발견하려 한다.
이런 사건의 원형을 발견하기 위해 작가는 세심한 글쓰기 전략을 추구한다. 두 작품은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사건은 일어난 시간적 순서대로 서술된다. 사건에 관한 인과적 설명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이 사건이 이미 일상의 세계 속에서 그 흔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는 사건을 입증해줄 자료인 일기나 사진과 같은 일차적 자료에 기초한다. 이런 일차적 자료는 사건의 진행과 더불어 기록된 것이기에 생생하기는 하지만, 주관의 감정적 개입이 심하며, 아직 사건의 본래 의미가 드러나기 전에 작성된 것이기에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작가는 일차적 자료를 따르면서도 일정한 시점 뒤에서 회고적으로 개입하여 재서술한다. 그 시점이란 곧 작가가 자신이 겪은 사건에서 끔찍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글을 써야 하겠다는 강박을 느꼈을 시점이다. 작가는 이런 회고 가운데서 사건과 무관한 사실을 제거하며 냉정하고 순수하게 사건을 드러내려 한다.
그 사건은 일상의 세계에서는 낙태이며 불륜이며 작가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전이며 모험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감정적 판단이 개입하니, 이는 사건의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런 관점과 감정적 판단을 서술에서 배제하려 하려 한다.
작가는 사건을 그 사건의 원형 그대로 순수하게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그 원형은 주관적인 작가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피안에 있을 것이니, 작가는 다시 자신이 서술한 글에 주석과 보완을 더한다. 주석과 보완은 때로는 작품 속에 차별적으로 표시되지만 작품의 내용 속에 녹아 들어가서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 결과 때로는 작품의 지문이 어떤 서술시에 서술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작가의 글쓰기는 3차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글쓰기이다. 작가는 이런 글쓰기 방법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거대한 열정 27쪽)
‘있는 그대로’란 곧 사람과 죽음을 초월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 그런 진실만이 사건이 지닌 끔찍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것이다. 작가는 <사건>의 첫 페이지에 자신의 글쓰기 방식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중적인 소원, 사건이 글쓰기가 되고, 글쓰기가 사건이 되는 것”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