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풀어주시오(1)-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를 풀어 주시오(1)-
정보라 작가의 단편집 저주 토끼를 읽고
1)
정보라의 작품은 우화나 설화, 동화, SF 형식을 취하고 있고 작품 곳곳에는 유쾌한 역설이 나 환상이 등장하므로 언뜻 가벼운 작품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들어있어 깊고 진한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 자신이 후기에 말한 대로 그의 작품 곳곳에는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절망감이 배어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전체 작품을 이해하는 한 마디는 “나를 풀어주시오”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 말은 ‘덫’이라는 작품에서 여러 번 반복된다.
“나를 풀어 주시오”라는 말에서 나오는 ‘하오 체’는 지금은 일상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과거에는 예컨대 장성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용하는 말투였다. 또는 남편이 아내에게 말할 때 사용할 수도 있겠다. 이런 말투는 상대방을 높이며 동시에 상대방에게 부탁하면서도 자신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말투라고 분석할 수 있다.
요즈음 ‘주십시오’와 같은 ‘합시오 체’가 많이 사용되는데, ‘하오 체’는 이런 ‘합시오 체’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차이가 있다. ‘제안 사항 없음 자신이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부탁할 경우 사용한다. 반면 ‘하오 체’는 상대방이 자신과 매우 친밀한 존재라는 점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말투라 하겠다. 친밀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가 바로 ‘하오 체’이다.
이런 ‘하오 체’ 말투는 이 단편집에 실린 ‘머리’와 같은 작품에 나오는 말투와는 반대다. 머리는 변기 구멍에서 나와서 주인공에게 어머니라고 부른다. 어머니와 머리 사이의 대화는 마치 사극에 왕과 대비 사이의 말처럼 들린다. 서로 존중하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런 거리감은 쉽게 반감으로 바뀌니 주인공과 머리의 대화는 곧 반말체로 바뀐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옷을 달라 하여 옷을 주지 않았느냐? 달라는 대로 다 주었으면 감지덕지하고 얼른 나갈 일이지 나더러 변기 속으로 들어 가라니 무슨 미친 소리냐?”
그러자 머리는 이렇게 답한다.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 네게 부탁한 적이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고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반면 “풀어주시오”라는 하오체는 거리감을 두고 있지만, 오히려 서로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 이런 말투를 사용하는 주목적으로 보인다.
2)
‘나를 플어주시오’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이제 덫이라는 작품을 좀 더 들여다보자. 어느 남자가 겨울에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덫에 걸린 여우를 보고 여우를 죽여 털가죽을 얻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자, 덫에 걸린 여우가 처음으로 이 말을 말한다.
여우가 사용하는 하오체에서 여우는 하나의 당당한 인격으로 인정되고 있다. 더구나 여우는 다가오는 남자를 존중하면서도 친밀한 존재로 보고 있다. 여우가 자신을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은 이야기가 ‘오래전에 읽은 이야기’ 즉 전설이나 민담에 속하니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다가오는 남자는 여우에게 낯선 남자인데, 여우는 무슨 이유로 그를 턱없이 믿고 있는 걸까? 여우는 남자가 양식 있는 인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여우의 발목 상처에서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액체가 흐르는 것을 보고, 여우를 자신의 헛간에 가두어 놓는다. 이 단편 속에 ‘나를 풀어주시오’라는 부탁은 여러 번 변주되어 등장한다. 한번은 여우가 죽자 그 대신으로 갇혔다고 짐작할 수도 있는 딸의 입에서도 나온다. 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풀어주시오” 딸이 하는 말로서는 좀 서늘하다. 그래도 아직 아버지에 대한 약간의 믿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의사를 불러 딸의 임신한 배를 가르려 했다. 이 말은 재산과 사람을 모두 잃고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아마도 산 채로 죽어 있는 남자의 입에서도 나온다. 남자는 그를 찾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를 풀어주시오” 약간 사무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동네 사람이니 이렇게 ‘하오체’를 사용할 수 있겠다.
딸과 쌍둥이인 아들의 입에서도 나온다. 아들은 자기 여동생의 피를 빨아먹고, 남자는 그 아들의 상처를 쑤셔 황금을 얻었다. 아들은 자기 여동생을 사랑해 임신시켰고 의사가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려 했을 때 뛰어들어서 아이를 구해 멀리 도망친다. 그리고 산속에서 죽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아들의 배를 갈라 금빛으로 빛나는 내장을 파먹으며 살아간다. 동네 사람들이 다가가자 죽은 듯했던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풀어주시오” 마지막 이 말에는 주어가 없다. 그 때문에 말 자체에 진지함이 사라졌다. 이미 상대를 믿지 않지 않는다는 의미가 강해진다.
이 말은 마지막으로 한번 반복되는 데, 이번에는 하오체가 사라진다. “플어….” 이젠 말을 하다 아예 멈추어 버린다. 더는 부탁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덫’이라는 단편에 반복되는 이 말은 점차 친밀함을 상실하고 의심이 강화된다.
3)
풀어달라는 말은 갇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대개 어딘가 갇혀 있거나 매여 있다. 단편 ‘흉터’에서 소년은 동굴에 갇혀서 한 달에 한 번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그것’으로부터 등골을 빨아 먹힌다. 소년은 자신이 왜 이 동굴에 던져졌는지, 자신의 등골을 파먹는 그것이 도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잔인한 고통 속에서 이 고통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린다.
이렇게 갇혀 있다는 주제는 마지막 작품 ‘재회’에서도 변주된다. 주인공이 광장에서 만난 폴란드 남자는 아마도 마조히스트로 보인다. 그는 자신을 묶어주고 그것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묶어 주기를 바란다. 남자는 그렇게 묶어주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에 주인공은 기꺼이 그를 돕는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지만 남자는 자신의 손을 묶어 놓고 목을 매고 죽었다. 주인공은 환영으로 그를 다시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풀어 줄까?” 목을 매고 죽은 남자는 말을 할 수 없고 다만 눈만 깜박거리면 응답한다. 풀어 달라는 말일 것이다.
작가는 이 남자를 풀어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갇혀 있는 상태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삶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여러 방식으로 재현된다. 이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은 폴란드의 어느 도시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주인공은 광장을 가로지르는 할아버지를 본다. 남자는 매번 광장을 가로질러 같은 길을 반복한다. 환영이다. 나중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이 할아버지는 전쟁 중에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만 죽고 만 사람이다. 이 할아버지는 전쟁의 현장에 갇혀 있다.
이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할아버지 역시 갇혀 있다. 남자의 할아버지는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준비한다. 배낭을 싸 두고 통조림을 쌓아 둔다. 할아버지는 과거의 기억에 갇혀 있다. 그것은 남자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풀어주었던 남자는 환영을 볼 수 있다. 남자의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이 환영을 따라서 떠나갈 것을 두려워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묶어 두고 아들이 환영을 보고 말할 때는 매를 들어 때린다. 남자의 어머니 역시 갇혀 있다.
4)
작가는 이 작품 ‘재회’에서 무엇이 사람을 가두어 두는지를 말해 준다. 길지만 정보라의 삶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니 인용해 보자.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사람들, 그도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생존본능이라는 것에 갇혀 있다. 사람들의 삶은 이 생존본능이 가장 격렬하게 발휘되었던 순간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사실은 과거의 유령일 뿐이다.
작가에게서 생존 본능이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황금에 대한 매혹일 것이다. 앞에서 든 단편 덫에서 주인공 남자는 황금에 사로잡혀 있다. 황금 물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황금 물신주의는 ‘모래와 바람의 지배자’라는 단편에서도 등장한다. 사막의 나라 왕은 황금의 배를 타고 사막을 오가는 주술사와 전쟁을 벌인다. 왕은 승리하지만, 마술사의 저주에 걸린다. 그 때문에 그의 아들인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눈이 멀었다.
초원에서 온 공주는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왕자가 걸린 저주를 풀기 위해 주술사를 찾아간다. 공주는 주술사의 해법을 따라 왕자의 눈을 뜨게 했으나 사막의 나라에 모든 사람이 걸려 있는 황금 물신주의 저주는 풀어내지 못했다.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눈먼 인간을 눈 뜨게 할 방법은 없다.”
이런 황금 물신주의는 또 다른 변주를 낳는다. ‘흉터’에서 ‘그것’이라는 변주이다. 동굴에 갇힌 소년은 처음에 ‘그것’의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점차 그가 깨달은 것은 ‘그것’은 거대한 부리를 가지고 있고 잿빛 날개와 파란 눈을 가진 존재였다.
소년은 청년이 되어 오랜 궁리 끝에 동굴과 괴물을 탈출했으나, 그가 만난 것은 어쩌면 더 원초적인 동굴이다. 그는 돈벌이에 눈이 먼 대머리 남자에 끌려 다니면서 격투를 벌인다. 그는 이 새로운 동굴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가 더 돈벌이의 수단이 되지 못하게 되자, 그는 버려지게 된다.
그렇다면 생존본능과 황금 물신주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삶을 벗어나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더는 황금을 생산하는 수단이 되지 못할 때 버려지면서 비로소 해방되는 것일까?
5)
“풀어주시오”라는 작가의 말투에서 짐작하듯이 사람을 가두고 있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친밀한 존재이며 가장 존중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생존본능 자체, 황금에 대한 매혹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질상 황금에 대해 매혹을 느낀다.
황금의 매혹은 작품 덫에서 딸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들은 딸의 피를 먹을 때만 상처에서 황금을 흘린다. 남자는 딸을 여우처럼 가두어 둔다. 그런 딸은 투명하고 창백한 얼굴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가 되었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무감각하고 서늘한 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또는 그 아름다움은 “달빛 아래 검은 숲과도 같은” 비밀스러운 매력을 발산했다.
딸의 모습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황금빛 자체에 관한 서술로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황금빛이 가진 매혹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금빛 안개는 서늘하고 창백했으며 바라보고 있으면 가까이 가고 싶어 졌고 가까이 가면 손을 담그고 싶어 졌다.”
이런 금빛 안개에 다가간 사람은 누구나 미칠 수밖에 없다. 사람을 가두고 있는 동굴은 바로 그 자신의 본성, 생존본능과 황금에 대한 매혹이다. 자기가 자기를 가두고 있는 한 이 동굴을 벗어날 길은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등골을 빨아먹는 ‘그것’의 모습이다. 그러니 누구도 자신의 본성인 그것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이 아닐까?
혹시 어둠 속에 쇠사슬을 바위에 부딪혀 내는 순간적인 빛이 하나의 구원이 되지 않을까? 아마 예술과 같은 것이 작가가 말하는 그런 순간적인 빛에 해당할지 모른다. 예술은 삶을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동굴을 나와 밤하늘에 별빛을 보면서 동굴에서 보았던 빛을 생각한다. 그러면서 저 별빛은 “누군가 자신처럼 동굴 안에 갇힌 사람이 쇠사슬을 거대한 돌벽에 부딪치며 저 수많은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말하듯이 이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별빛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게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인들 누가 들어주겠는가? 그게 공허와 어둠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한 놀이라면, 그처럼 허망한 놀이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소년은 밤하늘의 별빛조차 무심하게 바라보게 되는데, 작가의 절망감이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고 하겠다. 살아서 탈출할 길은 없다는 절망감이 정보라 작가의 작품 전체를 흐르고 있다.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