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것들에 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달콤한 것들에 대해
언제부터 인가 교외에 빵집이 들어섰다. 처음엔 시내 임대료가 비싸서 그런가 했다. 곧 알았지만 그게 카페의 일종이었다.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빵을 함께 먹었다.
속으로 웃었다. 외국 사전에 가든의 의미로 고기집이 등록되었다고 한다. 빵집의 의미로 카페가 등록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어느 날 아이가 식사 빵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들었다. 내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빵이지? 아이의 말이 보통 빵집에서 파는 빵이 식사 빵이라 한다. 카페에서 파는 빵은 식사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카페에서 파는 빵은 카페 빵인가?
나도 카페 빵을 한번 먹어 보았다. 카페에 진열된 빵은 종류가 많지는 않지만 대개 아주 달콤한 빵이었다. 생각해보니 쓴 커피를 먹으면서 달콤한 빵을 곁들이는 것은 환상적인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스타벅스 이후 커피가 더욱 쓰게 되더니 급기야 이런 빵집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건 차가운 얼음에 뜨거운 팥을 얹어 먹는 팥빙수만큼이나 환상적이다.
처음에 한두 개 생기던 카페 빵집이 이제 어디서나 흔하게 등장한다. 이젠 시내에도 카페 빵집이 흔하다. 사람들이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겠지.
철학 본능이랄까? 내게 의문이 생겼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걸까?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달콤한 것의 형태도 달라졌다. 우리 어릴 때는 단연 사탕이 인기였다. 요즈음 사람은 그 달콤함을 카페 빵에서 찾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시대에 사람들이 특히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달콤함은 문화의 다양한 형태에서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배용준이 한류를 대표하는 인기 품목이었다. 배용준은 그 미소 속에 달콤함을 달고 다닌다.
방탄 소년단에 대해 내가 인정하는 것은 오직 그들의 노래가 버터에서 보듯이 달콤하다는 것뿐이다. 그들에겐 고통도 슬픔도 저항도 없다.
게다가 막걸리는 왜 또 그렇게 달콤해졌는지?
그 뿐만 아니다. 정치의 세계는 원래 건달들의 세계였다. 옛날에는 우락부락한 파이터 아니면 건들거리는 한량, 조삼모사식 달변의 인물이 정치를 지배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인의 모습도 바뀌었다.
마치 연예인처럼 생긴 정치인이 등장하더니, 이들이 내세우는 정책도 소확행이라고 한다. 작지만 확실히 행복하다는 것은 달콤함의 정의가 아닌가?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달콤함의 이면은 우울함이 아닐까? 우울할수록 더욱 달콤한 것이 그리워진다. 우울할 때는 쓴 술조차도 달콤하게 느껴진다.
이런 우울함은 환상에 대한 욕망을 낳는다. 그게 이 시대를 휩쓸고 있는 이미지 문화이다. 술과 달콤함, 영화, 이 세 가지는 내가 동시에 좋아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울함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우울함이란 상징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징조이다. 상징계가 무너지면 처음엔 달콤한 환상이 등장해 이를 메꾼다. 하지만 머지않아, 달콤한 환상은 무서운 박해자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그게 편집증이다.
이 시대 달콤함이란 편집증의 시대를 예고하는 전조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이미 사람들은 무서운 박해자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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