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과 흔적에 저항하는 삶의 이야기’ – 서평: 쓰시마 다쓰오(이문수 옮김)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바오출판사, 2022) [최종덕의 책과 리뷰]
주술과 흔적에 저항하는 삶의 이야기
서평: 쓰시마 다쓰오(이문수 옮김)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바오출판사, 2022)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도 볼 수 없다”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 종전 40주년 연설문에서
히틀러는 세계사에서 가장 포악하고 공포스러운 정치권력자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히틀러의 무소불위 전권은 히틀러 개인의 독재력에 있지만, 독일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가능해졌다. 히틀러가 어떻게 독일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치에 저항하는 독일인들이 왜 드러나지 않았는지 답답하면서도 궁금했는데,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이라는 한 권을 책을 읽으면서 나의 답답함과 궁금함이 풀렸다.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이후 총리와 대통령직을 통합한 총통으로 스스로 지위를 높였다. 히틀러가 스스로 지위를 높일 수 있었던 권력 즉 무제한에 가까운 권력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때문에 가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혼란정치와 대공황에 이은 파탄경제로 인해 독일 국민대중은 새로운 정치 권력의 탄생을 원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히틀러라는 악마를 낳게 했다. 히틀러는 민족공동체, 고용확대, 경기회복이라는 선전으로 절망에 빠진 독일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다. 아리아인의 ‘국민동포’라는 민족공동체 부양 구호는 독일 국민에게 엄청난 호소력을 얻게 된다.(18쪽) 이 책에 나온 일반 여성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우리들이 바라는 건 오직 일과 빵이었어요. 배가 고파서 데모도 했지요. 그러나 그건 히틀러가 총리로 되기 전의 일이지요. 히틀러는 단번에 모든 걸 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에게 일자리가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국민 대중이 모두 히틀러 지지지가 될 수밖에요.” (책 26쪽)
실제로 독일 국민들은 물질적 부의 혜택을 느끼고 있었다. 독일의 상징인 고속도로 아우토반 건설과 더불어 도로를 가득 채울 자동차 산업 등이 국민기업으로 확장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노동복지정책과 레저산업이 구체화되었다. 1936년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은 대중들의 자부심과 히틀러의 인기를 최고로 올렸다. 이렇게 이어진 변화는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이런 변화속도를 의도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기획은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나치 기획의 성공은 절대 독재이면서도 압도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데서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중의 압도적 지지는 실제로는 일종의 마취 현상이었다. 유럽침탈의 장치인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민족공동체의 허상을 실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으로서 나치는 적군과 아군을 엄격하게 차별하는 악의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유대인을 구원하거나 동조하는 일체의 행위를 악의적 행동으로 규정하여 그런 행동을 증거 조사 없이 기소할 수 있는 특별법, 소위 ‘악의법’을 1934년 통과시켰다.(60쪽) 자국민에 대한 언론 통제를 하면서 라디오 등의 외국방송 청취 일체를 금지했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가혹할 정도의 처벌을 했다. 히틀러는 청소년에 대한 의식교육을 가장 중시했다. 1936년 540만 명을 넘어선 국가 청소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는 히틀러 독재 권력을 가장 옹호하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막상 독일 대중들은 히틀러가 청소년을 “교체할 수 있는 부품”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32쪽)
국민대중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1938년 나치 지도부는 포그롬Pogrom기획을 앞세워 나치를 반대하는 일체의 저항세력을 공개적으로 처벌하는 대박해를 시작했다. 이로써 국고 파탄을 유대인의 물적 자원으로 메꾸는 전시경제를 치밀하게 시행했다. 나치의 포그롬 대박해는 가시적인 약탈과 폭력을 합리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청소년을 중심으로 고발과 밀고를 일상화하는 생활습관을 만들어 놓았다.
독일에 점령당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는 나치 저항 지하단체들의 활약이 많았는데 왜 독일 내부에서 저항 운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의구심의 뿌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폭적인 대중지지의 위력 때문에 저항하는 세력이 은밀한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은밀한 저항을 독일 작가 바이젠보른(Günter Weisenborn 1902-1969)은 “조용한 봉기”라고 표현했다. ‘시민의 용기’ Zivilcourage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284쪽)
저항의 용기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기도였다. 암살 기도는 실패했으나 저항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상당한 악의 대가를 받게 되었다. 히틀러는 전국적인 무차별 보복을 시작했다. 7천 명 이상이 체포되고 그중에서 200명 넘게 나치에 의해 처형당했다. 히틀러의 증오에 찬 폭정은 국민을 완전히 압도했다. 정말 무서웠다.
그런 공포사회 속에서도 저항그룹은 활동했다. 그들의 활동은 처절한 삶의 저항이었다. 그래서 백장미그룹을 포함한 그들의 저항 운동은 전후 오늘날까지 건강한 시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유대인과 반체제 인사들을 외국으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에밀 아저씨’ 구원 조직은 매국노라는 오명까지 얻으면서도 진정한 인간애를 실현해 나아갔다. 뮌헨 의과대학 학생이었던 한스 숄과 그의 여동생 조피의 저항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게 되었다. <백장미 통신>이라는 삐라 활동을 하던 슈모렉 그룹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나치에 체포, 사형되어 죽음으로 저항의 삶을 마쳤다. 그 외 다양한 계층의 지하집단이 주도한 비밀단체들의 저항 결사 편지와 통신문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 책의 페이지를 가슴으로 넘기고 있었다.
크라이자우 저항 서클의 지도자였고 그래서 1944년 나치로부터 사형당한 트로트Adam von Trott는 나치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는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22쪽) 이 말은 아픔의 현실을 담고 있다. 1933년에서 1945년 사이 나치 치하의 독일 사회에서 저항세력은 오히려 매국노로 치부되었고 밀고의 대상으로 되었다. 청소년의 심리를 교묘하게 역이용한 나치의 히틀러 유겐트와 전통의 침략전쟁 옹호 그룹이었던 극우세력에서부터 실업과 가난에 빠진 일상인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 나치의 민족공동체라는 주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저항세력은 당연히 매국노와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히게 되었다.
1945년 히틀러는 죽고 전쟁은 끝났지만, 그 주술의 잔재 효과가 따라서 금방 끝나질 않았다. 이 책 『히틀러에 저항한 사람들』은 나치 세력에 저항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상으로 종전 그리고 나치 이후 사람들의 관념과 습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치 이후의 이야기가 나의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를 압축한 글을 하나 인용해보기로 하자.(241-242쪽)
1945년부터 1947년 사이에 네 모자는 16제곱 미터에 불과한 좁은 다락방에 살며 처음 몇 개월 동안은 그릇 하나로 소금에 절인 청어나 감자를 먹고 빨래를 하는 적빈의 생활을 감내했다. 그런 중에 딸 코르넬 리가 통학 도중 전차 운전수가 “아버지는 전사하셨니?”고 묻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코르넬리가 “아닙니다. 히틀러에 반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더러운 배신자의 새끼로구나!” 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해댔다.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던 “유족의 다수는 빈곤에 허덕이면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배신자’로 낙인찍은 세간의 차가운 눈초리에 가위눌렸거나 혹은 고통스럽고 끔직했던 과거를 봉인하고 싶었다거나 하는, 유족들이 침묵을 지킨 데에는 저마다 사정이 있었다.”
패전 이후 독일 정부는 처음에는 나치 공무원들을 계승한 전후 동/서독 공무원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1952년 치러진 전국여론조사 결과 나치 시기에 저항단체들의 운동을 긍정적으로 본 응답율이 45%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가 표현했듯이, 독일 패전 이후 7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독일 국민 다수가 히틀러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263쪽)
특히 전범을 처리해야 하는 판검사의 사법계에서 판사의 66%, 검사의 75%가 전 나치 당원이었기 때문에 정의로운 전범 처리에 심각한 장애에 부딪혔다. 예를 들어 히틀러 선서를 한 독일인이 전시(나치 시기) 중에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 자체가 이적 행위이며 국가반역이라는 나치 잔재 검찰의 법정 옹호들이 횡행했었다. 나치 저항운동을 국가의 반역행위라고 주장한 레머를 재판하는 그 유명한 1951년 레머 재판에서 레머는 오히려 나치 잔재인 검찰들의 지지를 받았다. 재판 방청객이 연일 천 명이 넘을 정도로 관심을 받게 된 레머 재판은 당시 검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항운동의 역사적 정당성과 합법성이 확정되는 계기로 바뀌었다. 전후 독일 정부는 나치 친정인 그들 검찰에게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왔다는 점이다.(270-3쪽)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일제 잔재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한국 정치와 나아가 최근 무소불위의 한국 검찰 권력 상황을 떠올리게 되었다. 독일은 전쟁을 끝낸 패전 국가이지만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을 끝냈지만, 여전히 전쟁 중 휴전 국가이다. 독일은 과거 히틀러 마약의 약해져가는 잔여효과를 처리하면 될 것이다. 반면 한국 사회는 지금도 지우지 못한 일제 흔적과 한국전쟁 여파인 색깔 주술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흔적과 주술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검찰 권력과 그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 내면의 자화상을 깨부수는 오늘의 저항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 책에서 깨닫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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