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인간상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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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인간상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이 바라는 인간상도 바뀌게 마련인가 보다. 자주 정치인이 그런 인간상의 변화를 암시하는데, 미국에서 클린턴과 트럼프, 한국에서 문재인과 윤석렬을 비교해 보면 그런 변화가 느껴진다.

클린턴과 트럼프, 문재인과 윤석렬, 이렇게 대조해 놓고 보면 이들의 차이는 단순히 정책적 차이만은 아니고 그런 차이는 심지어 무의미하게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더 뚜렷한 것은 인간상의 차이다. 인간상으로 볼 때 클린턴과 문재인이 닮았고 트럼프나 윤석렬도 서로 닮았다.

클린턴과 문재인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면 트럼프나 윤석렬과 같은 사람이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거꾸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클린턴 다음에 트럼프가 나오고 문재인 다음에 윤석렬이 나온 것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힘들다.

이참에 시대와 인간상의 상관성을 한번 고민해 보기로 했다. 헤겔이 시대와 정신의 상관 관계를 파헤쳐 ‘정신현상학’이라는 불멸의 저서를 남겼으니, 나도 좀 흉내를 내 보아야 하겠다 싶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60년대 이전에는 내가 체험한 시대가 아니므로 생략하고, 내가 함께 살아온 60년대 이후만 보자.

2)

한때 히피족이 세상을 지배했다. 히피족은 세상에 초연하면서 낭만적 몽상에 젖어 살았다. 고독과 자유를 즐겼으며, 명상을 즐겼다. 히피족이 음악과 섹스 그리고 대마초에 빠진 것은 세상을 초탈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런 히피족이 출현한 이유로 그 시대 배경이 자주 논의된다. 50년대 말까지 서구 사회는 전후 복구를 거쳐 복지 국가를 이루었으나 그 대가는 거대한 관료 체제였다. 이런 관료 체제의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 자라난 세대가 히피 세대이니 이들이 세상을 초탈하려 했던 것도 이해된다. 권력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몸에 새겨져 있으니 이를 벗어나려면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60년대 서구에서 히피족이 지배할 무렵 우리는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 아래 있었다. 이들의 권력은 노골적이었다. 유신 체제, 중앙정보부, 물고문, 최루탄 등. 온갖 폭력적 수단이 사용되었다.

이런 시대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이 저항을 위해 존재했고 효율적인 저항이 필요했다. 목적을 정하고 수단을 선택했으며 가장 합리적인 수단을 위해 과학이 늘 행동의 지침이 되었다. 운동도 삶도 과학으로, 술도 연애도 과학으로! 이 시대는 낭만적이라는 것처럼 경멸적 단어는 없었다. 대신 과학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등장했다. 이런 유형을 흔히 운동권이라 부른다.

3)

90년대 후반,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고 소위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이 시대,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자유화가 발전했다.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화 시대가 열렸다. 금융 자본이 등장했고 컴퓨터와 온라인이 새로운 생존 무기가 되었다. 자유로운 섹스, 불금의 광란이 벌어졌고 자동차와 영화와 바캉스가 맥주 거품과 함께 넘쳐흘렀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세계 여행을 떠났다.

이런 시대 장발을 한 히피족이나 운동화를 신은 운동권은 촌스럽게 보였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인간 유형은 흔히 ‘여피족’으로 규정된다. 어떤 학자(대비드 부륵스)는 이런 여피족을 ‘보보스족’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이야 어떻게 붙이든 무슨 상관이랴.

이 여피족을 어떻게 규정할까? 여피족 하면 연상되는 인물이 있다. 드라마 ‘겨울 연가’의 주인공 배우 배용준이다. 그는 내게는 단정한 차림에 안경을 쓴 곱상한 얼굴로 기억된다. 사회보다는 개인을,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행복을, 거대한 것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다.

그는 감각적으로 세련된 기호를 갖고 있다(커피와 음악 와인 등). 그는 타인에 대해 특히 여성에 대해 부드럽고 온화하며, 민주적으로 합리적으로 결정한다. 그는 새로운 첨단 기술을 장식물처럼 온몸에 걸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종교적이거나 금욕적이거나 탈세속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영악하기 짝이 없다. 그는 주가를 꿰고 있으며 부동산 시세에 환하다. 무엇을 팔면 돈이 되고 어떻게 하면 인기를 얻는지 잘 안다. 그가 늘 끼고 다니는 책은 경영학의 책이며 그가 통독하는 책은 심리학의 책이다. 그는 한마디로 이익에 침을 흘리는 스마트한 인간이다.

그런 여피족이 신자유주의 시대 30여 년을 군림해왔다. 이런 인물은 신자유주의 시대와 잘 어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풍미한 전문 기술 노동자, 대표적으로 은행인, 증권맨이 여기에 속한다. 정치적으로 이런 여피족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미국에서는 클린턴일 것이고 한국에서는 아마 문재인일 것이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정책적으로는 유사하지만, 인물 유형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노무현은 아무래도 운동권에 가까운 인물이다. 반면 문재인은 운동권보다는 차라리  여피족에 가까운 스마트한 정치인이다. 문재인의 별명이 곧 신사 아닌가? 이재명 하면 여피족에 더 가까워진다.

4)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가 지금 비틀거린다. 2008년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그 대표적인 증상일 것이다. 금융 위기 이후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신자유주의는 이미 곳곳에서 붕괴의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시대 미국에서 트럼프가 등장했다. 그는 우선 생김새조차 여피족과는 거리가 멀다. 거의 돼먹지 못하게 생겼다. 언어와 행동거지도 난폭하기 짝이 없으니, 거의 조폭 수준이다. 생각과 사고도 너무 단순하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하며 적은 삼킬 듯이 증오하고 자기편은 무엇이라도 좋다. 어쩌면 여피족을 반전 선택하면 이런 인물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인물을 억지로 좋게 보자면 의리의 사나이 돌쇠형이 아닐까? 아니, 단순 무식하고 저돌적인 저팔계 유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더 좋을까?  장점이 있다. 사소한 것은 제치고 크게 문제를 파악하고 집요하면서도 대담하게 이를 해결해 나간다.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또 상당한 친화력이 있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재주는 비상하다.

이런 인물이 그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마 이 시대처럼 사랑 받는 때는 없었지 않을까? 결국, 트럼프는 클린턴의 후광 아래 있던 힐러리를 제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왜 이런 인물이 이 시대 사랑받는 것일까?

시대의 증상이 아닐까? 이 시대에 다들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 짐작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는 한편으로 무너지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 복원되기도 하니, 새로운 시대가 오는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갈피를 알 수 없다. 니체가 줄을 타는 곡예사를 보면서 앞으로 가도 위험하고 뒤로 가도 위험하고 가만히 서 있어도 위험하다 했는데 꼭 그런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시대, 불안한 혼돈의 시대, 사람들은 트럼프와 같은 인물과 자기를 동일시하면서 위안을 받는 것이 아닐까?

5)

최근 대선에서 윤석렬이 이겼다. 윤석렬의 언행을 보면 트럼프를 연상시킨다. 거칠고 난폭하기에 늘 구설에 시달라자만 재수 9년이라는 것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듯 두둑하기 짝이 없는 배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적을 물고 늘어지고(조국 사태에서 처럼) 같은 편을 챙기는 것은 트럼프와 상당히 닮았다.  적어도 우파 통합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친화력을 말해준다. 정책적으로도 핵심 문제를 잡아내는 능력도 엿보인다. 트럼프가 클린턴의 반전 선택이듯 윤석렬은 문재인의 반전 선택이다.

초짜 정치인이 거대 야당을 접수한 데 이 기질이 작용했다. 사람들이 소확행을 주장하는 이재명보다 재수 9년의 윤석렬을 선택한 것도 이 인간상 외에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우리 시대가 거대한 전환기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전환기에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거대한 힘에 의존해 보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윤석렬의 인간적 결함을 지적한다고 그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런 결함을 가진 인간이기에 오히려 선택 받았다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불안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신냉전시대다. 이 시대가 어디로 갈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전환기를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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