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의 세계 / 곪아버린 것들의 신 [유운의 전개도 접기]
농담의 세계1
이유운
포자의 상태로 나누는 입맞춤
언니는 전보다 나를 사랑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
나는 하얗게 빛나는 나의 연인 앞에서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이거나
아주 먼 곳에서 상상된 타자이거나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언니는 턱을 괸 채로 나의 망가진 걸음걸이를 본다
이 세계에서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들 뿐
우리가 똑같이 없어진 세계에서
우리, 건강하게 잘 지내자
언니가 나를 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으며 말했으므로
나는 이 장면이 원망인지 희망인지 알지 못했다
미지근한 초콜릿을 입에 머금고
언니와 나 사이의 시차를 본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드라마가 되겠네
혹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가 되거나
내가 닮은 건 언니의 뒷모습
나는 꿈에서 거슬러 받은 나를 추슬러서 돌아온다
이토록 지겨운 세계에서
이제 나는, 꿈을 꾼 나날들을 가늠하지 않고……
곪아버린 것들의 신2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종종 이 세계가 내가 알던 세계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상한 감각이 든다. 가위를 눌리면 손가락을 뒤로 꺾어보면 된다고 한다. 꿈 속에선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내가 잠든 사이에 세계가 온통 바뀌어 있다면, 그건 무슨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고통의 감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나는 세계를 감각할 수 있을까? 꿈이 선명하게 기억날수록 이런 의심은 강해진다.
꿈 속에서 주로 나는 신과 대면하곤 한다. 내가 믿는 신일 때도 있고, 내가 존재조차 몰랐던 신일 때도 있다. 주로 그 신들은 화가 나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만들어냈는데, 너는 왜 그렇게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낸다.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그들이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그 신들의 얼굴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종종,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고 또 실제에는 없는 실재의 인물들의 얼굴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 그리고 그림에서 내가 상상으로 얽어낸 얼굴들이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지만 그들 자신을 위해 종교와 신을 만들어낸 멋진 종족이다. 나는 그 종족의 일원으로써 이 멋진 발명품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나는 신화와 종교가 좋다. 그들이 죽음과 고통을 대하는 엄청난 자세가 좋다. 취향에 따라 종교와 신을 선택하는 일은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지지만…… 특히 좋아하는 건 질투하는 신들이다. 그런 신들은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경배와, 손으로 꼽을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선사한다. 가끔 성경을 읽다보면 신과 악마가 잘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신을 믿으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건가? 인간에게 바람을 불어 넣어 전쟁을 하게 만드는 신, 메뚜기와 전갈을 보내 사람을 갉아먹도록 하게 하는 신, 인간의 가죽을 벗겨내는 것으로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신. 그런 신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기대한 걸까? 그들의 공포를 기반으로 한 믿음은 어딘가 서슬이 퍼렇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낸 신화는 조금 색깔이 다르다. 련도 작가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이 새롭고도 아주 멋진 새로운 신화에 매혹되었다. 영원의 신,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영원불변의 곧은 신은 언제나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수의 손은 언제나 신성한 손으로 쥐고 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 하지만 련도 작가의 신화에서 새로이 태어난 신들은 그간 신의 것이 아니었던 특성들을 전유한다. 곪거나 썩은 것들. 무한보다는 영원에 가까운 순간의 신들. 이 신들은 슬프거나 질투하거나 무서워 보이지 않다. 그는 내 꿈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왜 나를 모욕했느냐고 화를 낼 것 같지 않은,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살이 썩어 있으니 그것을 만지면 저항없이 내 손가락 사이로 허물어질 지도 모른다. 신화와 꿈 사이의 금을 밟고 서 있는 그들은 가끔 나에게 그런 살갗과 얼굴을 보여준다. 정말로 연약하고 매혹적인 신들이다.
그 중에서도 《곪아버린 것들의 신》을 봤을 때, 그가 그려낸 신의 팔과 얼굴에 돋은 이끼와 버섯을 보며 이유리 소설가의 「버섯의 나라에서」를 떠올렸다. 우리는 사랑과 신을 쉽게 등치시킨다. 그 둘은 모두 완전무결하고 성스럽고 깨끗하며 그 흔적들은 여기저기 낭자하지만 그것의 실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전설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신과 사랑을 모욕하는 건 비슷하게 힘이 들고 또, 꼭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버섯의 나라에서」에서 ‘강희’는 “레즈비언 윤강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버섯 윤강희가 되겠다” 하고 유서 아닌 유서를 남긴다. 그런 그가 마지막 편지에 연인에게 건강하길 바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같다.
강희가 버섯이 된 방 안에서, ‘언니는 여전히 잘 있다’ 라고 말을 시작하는 ‘수민’처럼, 나도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게 벌어지고 있는 신화 없는 전쟁의 삶을 받아들인다.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연약한 신과, 내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작고 하얀 연인이 있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런 삶에서는 나도 무언가를 태어나게 하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으로 걷는 시간을 소망한다. 아마도 그 시간이 흐르는 세계는 푹신푹신한 땅이 없어서 나는 발뒤꿈치로 걷고 있으며 자주 넘어져서 무릎과 발뒤꿈치가 죄다 까져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가짜로 만들어진 쿠션을 걸어 무릎의 연골과 근육이 퇴화되는 것보다는 자주 다치고 구르며 아주 멀리서 태어나는 내가 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슬픈 이야기와 연약한 신을 태어나게 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에 포자처럼 달라붙어서, 나는 딱딱한 길 저 멀리까지 가고 싶다.
이유리 소설가는 2020년 경향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빨간 열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onyuthegreatestcat@gmail.com
련도 작가는 신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주로 평면 작업을 하고 있다. ryundoyoon@gmail.com
-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동 시대 작가들과 동료들을 소개하는 연재를 마치고 2주 후에 유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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