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필요한 스물다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1) – ‘채움’ [시가 필요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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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필요한 스물다섯 번째 시간, 채움과 비움(1) – ‘채움’

 

마리횬

 

무언가를 비워내는 행위와 채우는 행위는 정 반대의 것처럼 보입니다. 보통 무언가가 비어 있다는 것은 채워진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고, 반대로 뭔가를 채우려면 그 채울 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가득 차 있는 것을 비워 내야만 하니 의미적으로만 보면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소개해드릴 두 편의 시를 읽어 보면서 전혀 달라 보였던 두 가지 행위가 한 지점에서 만나고 있음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채움’에 대한 시를 읽어보겠는데요, 도종환 시인의 <깊은 물>입니다.

 

 

  깊은 물
                                       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던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우리 가슴 속에는 저마다의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요, 도종환 시인은 이 시에서 우리 모두에게 마음 속 강물에 물을 깊이 채우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큰 배가 뜨려면 바다나 강물이 충분히 깊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인데, 시인은 그 사실에 덧붙여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가슴엔, 그대의 가슴에는 큰 배커녕 종이배 하나라도 뜰 만큼의 깊은 물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시간의 물살의 쫓기는 그대’라는 대목은 바쁘게 살아가는 분주한 우리들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죠. 이 시가 발표된 1994년에도 사람들은 바쁘게 살았겠지만, 그때보다 과학이 더 발전하고 편리한 기술들이 개발된 지금,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사는 것 같아요. 마음의 강물이 잔잔할 틈이 없죠.

특별히 시인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요?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침에는 모두가 바쁠 수밖에 없어요. 출근을 하고 학교 수업을 준비해야 하죠. 모두가 시간의 물결에 쫓기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는 저녁에는 어떤 가요? 잔잔하게 머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 자신을 비춰보고 되돌아 볼 시간조차 없이 여전히 분주하고 시간의 물살에 쫓기고 있지는 않은 가요? 시인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 강물은 충분히 깊은지, 그 물살은 잔잔한지 말입니다.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우리 주변에는 ‘잔돌’들이 참 많습니다. 작아서 위험하지는 않지만 유독 거슬리고 나를 건드리는 사소한 문제들이 있죠. 잔소리 많은 직장 상사, 항상 말에 뼈를 넣어서 말하는 후배, 하기 싫은 잡다한 업무, 해도 티 안 나는 집안일 등.. 인생에서 정말 자잘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 ‘잔돌’과 같은 문제와 상황을 만났을 때 내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스스로 돌아본다면, 내 마음 속의 강물이 얕은 물인지 깊은 물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하나 다 스치고 건드리며 소란스럽게 지나가는 얕은 물인지, 아니면 묵직하게 그 돌들을 품어 내며 묵묵히 소리 없이 지나가는 깊은 물인지 말입니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던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시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굽이 많은 시냇가 여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죠? 내가 있고 싶은 곳에만 있을 수 없고, 늘 마음에 꼭 맞는 사람들과 생활할 수도 없고, 언제나 나에게 편안한 상황들만 생기지는 않아요. 굽이굽이 굴곡이 있고 잔돌들이 놓여 있죠. 그런 것들에 일일이 반응하며 사사건건 내 목소리를 내려고 했던 ‘소리치며 흐르는’ 모습이 나에게도 있지는 않은지.. 이 시를 읽으며 반성하게 됩니다. 작은 것 하나에 일희일비 하는 가벼운 삶이 아니라, 때로는 깊이 품어낼 줄도 아는 무게감을 가지기를, ‘채움’으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가지기를 충고하는 시인의 메시지를 <깊은 물>에서 읽어냅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짧은 가곡을 한 곡 준비했습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나라 가곡에 대한 강연을 보게 되었는데요, 여러 곡들이 소개되는 가운데 2014년 화천비목콩쿨에서 창작가곡 부문 1위를 한 <마중>이라는 곡이 너무 아름답더라구요.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가져왔습니다.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 곡의 가사와 멜로디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 속에 깊은 물이 채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감동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라며, 저는 다음 시간에 ‘비움’에 관한 시 들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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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훈 – 마중 주소: https://youtu.be/yI3G7u7-6S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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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움과 비움(2) 보러가기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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