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포퓰리즘’을 악용하는가? ‘포퓰리즘’이 게으른 분석과 냉전식 선동 논리로 남용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를 시작하며,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병 위기는 자연재해 말고도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더 드러내 보였습니다. 어려움은 바이러스뿐만이 아닙니다. 집권당은 거대의석에 걸맞은 개혁을 보여주기는커녕 실망스러운 모습만 안겨주고 있습니다. 촛불 이후 민주주의가 크게 진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사라지고, 커져만 가는 불평등과 자영업 붕괴, 치솟는 부동산 가격에 서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집니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한 어느 재벌 회장의 죽음은 추도하면서, 택배기사들을 비롯해 산업 현장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습니다. 교육 현장은 비대면 수업의 전면화 이후 이른바 ‘언택트’ 방식으로의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어느 누구도 수업의 질과 강사들의 생존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미투 운동의 확산 이후에도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는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번 코로나 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해고되는 것은 여성이고, 성소수자들은 이태원발 집단감염 당시 강제 커밍아웃에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철학을 업으로 삼고, 철학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러한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두고 철학적으로 개입하여 시대진단과 비판적 시각을 담은 글을 써보려 합니다. 들어가는 큰 주제는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 ‘코로나 이후의 한국사회’, ‘사회운동의 현재와 미래’, ‘강사법과 대학 사회’ 등으로 잡아봤습니다. “철학은 시대의 혼이자 시대의 모순에 대한 반역”이라는 기조를 공유한 몇 사람들이 먼저 집필을 시작합니다. 참여할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 아래 글은 2019년 11월 5일자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정치면에 게재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 시대와 철학> [오늘의 민주주의: 철학적으로 사유하기] 코너에 게재할 수 있게 게재를 허락한 저작권자 김성우 회원에게 감사드립니다. 기사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84264&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누가 ‘포퓰리즘’을 악용하는가? ‘포퓰리즘’이 게으른 분석과 냉전식 선동 논리로 남용되는 현실을 비판하며”
김성우(한철연 회원, 상지대)
<포퓰리즘으로 망한 아르헨티나… 한국이 따라 가선 안 돼>(한국경제)
<‘조국 사태’와 포퓰리즘의 상관관계>(동아일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기업성장 저해>(중앙일보)
<디지털,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기로에 서다>(한겨례)
<포퓰리즘과 혼돈의 한국 정치>(프레시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최근 언론에 실린 기사 제목에는 어김없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적이자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악으로 등장하고 있다. 왜 포퓰리즘이 이런 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포퓰리즘은 냉전 시대의 전체주의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에 불과하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가 동구권의 자유화 이후 소련 스파이 대신에 새로운 악역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의 냉전 시대에는 ‘전체주의’라는 단어가 상대방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악용되거나 남용되었다. 우파의 파시즘도 전체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좌파의 스탈린주의도 전체주의라고 비난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이와 유사하게 유럽과 미국에서 트럼프로 상징되는 극우의 부활로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있다.
이는 포퓰리즘을 대중선동주의나 대중영합주의로 사용한 예이다. 이렇게 되면 광화문 기독교 극우 집회도 포퓰리즘이 되고, 서초동이나 여의도 촛불문화제 집회도 포퓰리즘이 되어 의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 세력으로 똑같이 취급을 받게 된다. 위에 열거한 기사 제목처럼 이러한 우려의 목소리가 보수지와 진보지를 막론하고 소위 정치 전문가들에 의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주의가 상대 진영을 비판하는 냉전적 언어이듯이 포퓰리즘도 극도의 흑백논리적인 언어이다. 다시 말해 포퓰리스트를 데마고그(대중선동가)로 착각해서 부르는 것이다. 민중의 편에 서는 민중주의자와 엘리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대중선동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원래 포퓰리스트는 기득권층인 엘리트에 대비해서 민중, 평민, 서민 등을 옹호하는 정치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대의 민주주의가 엘리트만의 게임으로 변질될 때 포퓰리즘은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로서 다시 대의 민주주의가 민중이나 서민을 대표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정치운동이다.
마치 전체주의가 그 이름과 정반대로 일인 독재나 일당 독재로 지칭되어 상대 체제를 서로 낙인찍는 애매모호한 명칭이 되었듯이 포퓰리즘도 그 원래 의미를 잃고 상대 진영을 비난하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언론과 방송에서 광화문 극우 집회도 포퓰리즘이고 여의도 촛불문화제 집회도 포퓰리즘으로 부르며 양비론을 구사한다. 엘리트의 입장을 양비론의 우산을 펼치며 보호하고 엘리트 중심의 의회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식이 이른바 의식 있다고 자처하는 정치분석가나 기자들의 행태이다.
어떤 낱말이 모든 것을 지칭하거나 애매모호하게 사용된다면 이미 그 단어는 생명력을 잃은 것과 다름없다. ‘전체주의’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폐기하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날카로운 주장이 이를 입증한다. 인종 차별과 전쟁광의 논리인 극우 파시즘과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극좌 무장투쟁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짜 뉴스로 대중 선동을 일삼는 대중선동 집회와 스스로 팩트 체크를 하며 기성 언론을 비판하는, 깨인 시민들의 자발적 집회는 본질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두 가지 유형의 정치운동을 무분별하게 동일한 언어로 동급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족보 있는 단어를 난데없이 족보를 무시한 채 임의적으로 남용하는 일은 이른바 전문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유행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더 이상 남발해서 애매한 양비론의 희생양으로 만들지 말고 엘리트 권력을 은폐하는 우산으로 사용하지 말기를. 냉전식 선동 방식으로 현재 일고 있는 사건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면밀한 분석 대신하지 않기를. 포퓰리즘에 그 원래의 의미를 돌려주고, 촛불문화제를 통해 우리 시대의 진리(검찰개혁과 언론개혁, 불공정한 제도 개혁 등 엘리트 파워 폐지)가 현현하고 촛불시민이 새로운 정치 주체로 호명되는 사건적 의의를 무시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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