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나빠요 [내가 읽는 『자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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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나빠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자본」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은 ‘노동가치설’을 토대로 형성된다. ‘노동가치설’이란 경제적 가치 창조의 근원이 ‘인간노동’임을 전제하는 경제학적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그에 앞선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사유를 학술적으로 체계화해왔으며, ‘노동가치설’은 마르크스 경제학의 등장으로 그 방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상에 내놓은 경제학 고전서 「자본」은 자본주의 구조를 지탱하는 경제학적 메커니즘과 현상적 모습 이면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속 (가치)착취의 원리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분석하고 있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 속 노동가치설을 통해 (경제학적 이론뿐만 아니라) 자신의 학문적 사유 전반을 담아냈다. 마르크스 철학의 근간이 되는 인간애의 사유를 비롯해, 사회학자로서의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와 그 필연성 역시 그의 저술 「자본」 속에 녹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치경제학 비판 서적’ 「자본」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속 계급적 대립 양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내의 계급적 모순의 필연적 양태는 익히 아는 것처럼 자본가 계급(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이때 (마르크스의 사상 전반에서 악역을 도맡는) 부르주아지들이 바로 착취를 자행하는 자본의 인격적 화신이 된다.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들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되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피착취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를 굉장히 거칠게 풀어내 요약한 이 같은 서술을 처음 접한 이들이라면 이처럼 파격적이고 대립적, 갈등적 분석에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다. 먼저, 본인의 경우엔 자본가 계급이 과연 절대적 악역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또, 경제적 가치가 오로지 노동자의 손에서만 탄생하는지 되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도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자본가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에 의문을 품을 수 있으며, 자본가 역시도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오늘 이러한 의구심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볼 작정이다.

필자의 절친한 친구 김 모 군은 현재 술집에서 야간 알바를 하고 있다. 김군은 종종 본인에게 자신이 알바를 하는 도중에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한다. 그 여러 에피소드에 압도적인 출연 비율을 보이는 이가 있고, 그는 바로 김 군의 고용주인 술집 사장님이다. 친구 김 군은 사장님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종 전하곤 하는데, 보통은 그 맥락이 “사장님 나빠요”하는 식의 뉘앙스인 경향이 많다. 사장님은 은퇴 후 현재의 매장을 오픈하셨으며, 편의점 점장도 맡으시는 등 다방면의 사업에 뛰어든 중년의 남성으로 보인다.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분이라는 친구의 담담한 말투 뒤에는 종종 푸념이 따라오곤 한다. 사장님이 너무나도 예민하고 엄격하셔서 잔소리와 업무 간섭이 심하시다는 것이다. 친구는 일하는 건 알바생인데 사장님은 일도 안하면서 너무한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사실 가게 자체가 사장님의 소유에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라며, 사장님이 입버릇처럼 하신다는 말씀을 내게 들려준다. “너네 테이블 닦는 것보다, 관리하고 총괄 감독하는 책임자의 업무가 훨씬 힘든 거야, 알어? 건너편 고기집 사장도 주말 지나면 몸져눕고, 회사들도 사장이 애 안 쓰면 안 굴러가. 이재용이 봐 얼마나 고생하는데” 필자는 이 말을 듣자 확인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사장님의 말대로 자본의 인격적 화신인 세계의 사장님들이 고된 노동에 내몰린 상황인 것인지, 또 이를 정말로 행하고 계시는지 실로 궁금해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유용성을 띠는 노동이 가치를 창조한다는 가정을 두었을 때, 사장님들의 관리 감독의 업무 또한 가치를 창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 지출의 형태는 다소 독특하지만, 어찌되었든 사회적 유용노동을 지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 관리와 감독의 업무를 담당하는 정서적 노동이 단순 육체노동보다 버거운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나 기타의 노동가치설에서도 복잡한 정신적 노동으로 창조된 가치에 [질적으로 상이한 여타 노동들과의 (노동)강도 비교를 통한] 양적 가감을 부여하는 등 정신적 노동 강도에 대한 고려 역시 빼놓지 않는다. 더욱이 대규모 자본을 굴리시는 사장님들이 아닌 이상 (소규모 자영업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은) 실제로 노동 현장에 참여하는 정도가 더욱 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 군의 고용주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발언이 크게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허나, 필자가 궁금해 하는 문제는, 해당 발언의 절대적 옳고 그름이나 적절성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논의에서 좀 더 명확히 밝히고픈 부분은 과연 우리 사회에서 소위 자본가로 칭해지는 이들이 관리, 감독 등의 업무를 통해 노동자들의 노동에 버금가는 근로를 실제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과 맞닿아있다. 김 군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모든 고용주들이 그토록 고된 관리, 감독의 노동을 도맡고 있음을 일반화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이 생긴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 역시도 우리 사회내의 경제적-가치를 직접 창조해내고 있는지 거시적 경제학 담론의 차원에서 함께 면밀히 관찰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유의하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첫 번째로, 우리는 관리, 감독 등의 정서적 노동이 육체적 노동의 강도보다 더욱 고된 것인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현실 속, 질적으로 상이한 형태의 노동들 사이의 강도 비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서적 차원의 관리, 감독의 노동이 여타의 육체적 노동들 보다 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세계 곳곳의 사장님과 회장님들께서 그러한 노동들을 실제로 수행하고 계시는지에 관한 문제다.

매우 중요한 두 번째 유의점은, 우리의 논의가 미시적 사례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정한 사례에서 특정한 자본가는 그 어떤 노동자보다 많은 노동을 수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고찰에선 그것이 사회의 평균적 수준으로 일반화 될 수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자본가도 고된 노동을 수행하는가” 하는 식의 의문은 파편적인 낱개 사례들의 종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가 품은 의문은 “우리 사회 내에서 자본가 계급 또한 노동자계급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통해)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가”라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며, 그 의문의 차원은 거시적 영역으로 넓혀져야 한다.

필자가 진지하게 탐구하고자하는 모든 의문은, 자본가, 즉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배제하고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자본가로 규정하는 이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규정되는 지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한다. 그저 돈이 많다고 자본가인가? 개인 사업장을 차리면 모두 자본가인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사장님은 모두 부르주아지인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명확히 답할 수 있어야할 것이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생산수단! 다름 아닌 ‘생산수단’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모든 의문들에 대한 구체적 해명을 내놓을 수 있으리라.

‘생산수단’이란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합하여 통칭하는 개념이다. 노동자의 노동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요소가 요구되는데, 첫 번째가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 활동이요, 두 번째와 세 번째가 각각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다. 인간노동은 자연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합목적적 활동(노동)을 실현해내게 되는데, 이때 인간노동의 대상이 되는 천연적 존재들이 노동대상이다. 또 인간노동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 중 이미 인간노동이 투여되어있는 존재들은 원료로 칭해지는데, 이들 또한 노동대상이 된다.

한편 노동수단은 노동자가 자신의 활동(노동)을 행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 넣어 매개체로 사용하는 도구적 존재를 의미한다. 예컨대, 김 모군 이 술집 테이블을 닦기 위해 사용한 행주부터 시작하여, 바구니, 항아리, 통, 각종 기계, 관, 돌도끼, 칼, 망치, 혹은 토지 그 자체 등 인간노동의 실현 과정에서 도구로 작용하는 (상이한 발전 정도의) 모든 존재들은 노동수단이 된다.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자본」 Ⅰ 상 제3편 제7장에서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나타남을 밝혔다. 즉,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되는 셈이다.

‘생산수단’ 개념은 어떻게 자본가 계급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해소해줄 수 있을까? 우선 마르크스가 분석한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를 면밀히 살펴보면 이 ‘생산수단’ 개념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나뉘게 됨을 주장했는데, 이때 이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는 사회적 기제로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가 그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이며,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 계급은 노동자 계급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 자본가 계급은 (경제적으로 초상위계층에 속한) 극소수의 부르주아지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상당한 양의 물질적 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을 규정하는 핵심적 기준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다.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많은 돈(자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돈이 많다고해서 전부 다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본가 계급은 자신이 직접 가치를 창조하는 행위에 착수하지 않으며, 자신이 소유한 생산수단과 자신이 구매한 (노동자들의) 노동력의 결합을 도모한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만남을 통한 물질대사의 작용 결과로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손에 쥐게 된다. 이 잉여가치들의 축적을 통해 자본가들은 가만히 앉은 채로 자신의 자본을 눈덩이처럼 불린다. 반면 노동자 계급은 무산계급으로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피지배 (피억압) 계급이자, 대다수의 대중들로 이뤄진 민중의 계급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노동 계급의 인민을 뜻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 역시, 본디 로마제국 시대에 군에 입대시킬 자신들의 아들(proles – 라틴어) 외엔 어떠한 부도 갖지 못한 무산계급을 조롱하는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개인 사업장을 차리고 독자적 사업을 운영하는 모든 사장님들은 전부 다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가? 자신의 사업장을 직접 운영하는 (자신의 생산수단을 가진) 사장님들 중에는 재벌가 대기업 회장님들도 있지만, 동네에서 자그마한 식당을 직접 운영하는 자영업자분들도 있다. 우리는 이들을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기업의 회장님들은 사회적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생산수단을 토대로 자신의 자본을 축적 내지는 확장시켜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소규모 자본(소규모의 생산수단)을 바탕으로 작은 사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은 대기업 회장님들과 유사한 형태의 방법으로 부를 쌓고는 있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직접 가치 창조의 현장에 뛰어든다.

자영업자들이 직접 노동에 참여한다고 해서 해당 작업장의 피고용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착취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고용주(자본가)가 노동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피고용 노동자들과 함께) 인간노동을 투여함으로써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존에 상정한 자본가 계급의 근본적 특질과는 동떨어져있는 현실이다. 또한 생산수단의 주인인 고용주가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과정에 직접 투여한다는 점에서 자본가 계급 일반의 인격적 전형인 대기업 회장님들과의 괴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노동력을 구매하고 이를 자신의 생산수단과 결합시킴으로써 가치를 창출해낸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자본가들과 유사하지만, 자신들도 그 노동과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점, 운영하는 자본의 규모가 비교적 작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반적 자본가들과는 구별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분석과 이론을 사상적으로 구체화해나가던 시기 전후에도 이러한 소(小)부르주아지들은 존재했다. 이에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러한 독특한 계급적 집단을 ‘쁘띠 부르주아’로 칭했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과는 분명하게 배치되는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만 대자본가들을 비롯한 [자본가 일반]과도 계급적 이해의 불일치를 보이게 된다. 생산구조의 기본적 구성 원리상 쁘띠 부르주아 역시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대자본가들에 의한 억압에 놓인다. 예컨대, 소규모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들은 독점적 대자본(대기업)에 의해 시장에서 배제되거나 흡수되며, 소규모의 중소자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남는 경우에도 하청제도나 대기업의 원료 독점, 불합리한 세금/금리 부담 등을 말미암아 이윤의 일정부분을 대기업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선 노동자 계급이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해야함을 주장하는 견해가 등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가 불안정하고 시장이 침체된 요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자본가 계급의 경제적 피해 역시 대부분 쁘띠 부르주아지들이 짊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자영업자들이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를 찾자면, 우선 MP3 플레이어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의 일을 들 수 있다.

세계최초의 MP3 MPman ‘F10’ 사진출처: https://it.donga.com/3476/

대한민국의 중소기업 ‘디지털 캐스트’는 1996년 MP3를 처음 개발해낸 심영철씨와 황정하 사장을 필두로 MP3플레이어의 세계 최초 발명과 특허 등록까지 완료했었다. 이때 삼성 계열사인 새한미디어에서 생산과 마케팅을 도와주겠다며 접근해 특허권의 공동 소유를 요구했고, 국제적 마케팅과 대량 생산을 위해 디지털 캐스트측은 이를 수용했었다. 하지만 새한미디어는 특허권이 공동 소유가 되자마자 디지털캐스트를 배신하고 MP3 플레이어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캐스트는 직원들의 급여조차 주지 못하는 상황까지 무너졌고, 결국 황정하 사장은 특허권을 미국 회사인 다이아몬드사에 매각하여, 미국인들이 세계 최초라고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 사의 MP3플레이어가 탄생하게 된다. 새한미디어 역시 특허무효소송을 걸었지만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채 결국 남은 특허권 지분까지도 미국의 아이리버사로 매각된다. 결국 MP3플레이어의 특허권은 전부 미국의 대기업으로 흡수된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납품가 후려치기, 계약금 미지급, 결제 미루기 등으로 유망 중소기업이었던 정산산업을 부도로 이끈 현대자동차(현대모비스)의 사례나, 28년간 성실히 냉장고 부품을 생산해 납품한 하청업체의 중국 투자를 강요하였다 발주물량을 줄여 해당 업체를 위기로 내몰고 이후 헐값에 인수를 시도한 삼성전자의 사례 또한 별반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횡포의 유형은 다르지만, LG생명과학은 중소기업 비타민하우스의 유망한 인재들을 단기간에 대거 빼오는 식으로, 현대중공업은 중소기업 테크마레에서 개발해 특허 낸 선박 구성품을 무단으로 복제해 사용하는 식으로 중소기업을 짓밟았으며,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 대기업과 대자본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위 갑질을 일삼고 있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대자본들은 쁘띠 부르주아 계급이 일차적으로 타격을 흡수함에 따라 위기에도 덜 흔들리게 되고, 기반이 불안정한 소규모 자영업자(쁘띠 부르주아)들은 사업 전반에 걸쳐 고스란히 그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쁘띠 부르주아들은 그 스스로 부르주아지적 사고와 자본가적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다. 쁘띠 부르주아지들 또한 생산의 기본적 메커니즘 상 노동자 계급과 근본적으로 갈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들은 대기업과 대자본으로 대표되는 자본가 계급 일반의 이해관계와도 일정부분 대립함으로써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특수한 중간 계급으로 취급된다. 초기의 의문처럼 우리 주위의 사장님들 역시 가치를 창조하는지, 또 현대 사회에서 자본가의 감독 역할과 관리 업무를 노동의 일환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분석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기존 관념 속 부르주아 계급(대기업을 바탕으로 한 자본가 계급 일반)과 현대 사회에서 그 출현이 더욱 두드러진 쁘띠 부르주아 계급을 분리해서 사유할 수 있어야만 2020년 현재의 자본가 계급의 역할을 ‘노동’ 혹은 ‘가치 창조’의 관점에서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가 격상되자 당분간은 가게 형편이 어려우니 알바 출근하지 말라는 고기집 사장님과 스마트폰 및 가전제품을 생산해내는 모 회사 회장님의 이해관계는 분명히 다를 테니 말이다.

자본가 계급 일반과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했으니, 이제 이 구분을 우리의 의문에도 적용해보자. 이전에는 대충 얼버무려 점철되어있던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 사이의 간극을 비로소 파악해낸 지금, 다시 “자본가 계급도 노동으로 가치를 창조하는가”하는 질문을 마주해보겠다. 이제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부르주아지의 경우와 쁘띠-부르주아지의 경우를 나누어 설명하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 먼저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경우엔 쁘띠 부르주아지가 직접 노동에 참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할 수 있다. 각각의 특수한 사업장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고용주 쁘띠 부르주아지는 저마다 다른 강도로 노동과정에 직접 개입한다. 우리 주위의 평범한 자영업자들 혹은 중소자본가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경우에 쁘띠 부르주아지들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펼쳐지는 가치 창조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쁘띠 부르주아지들은 가치를 일정 부분 직접 창조해낸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했으며 이를 활용하여 잉여가치의 창출을 도모하기에 자본가 계급으로 분류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과 마찬가지로 직접 노동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자본가 계급 일반]과는 차별성을 띤다. 한마디로 현대의 일반적인 쁘띠 부르주아는 ‘인간노동일반’의 지출을 통해 직접 가치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의 경우에 따라 중소기업의 사장님, 식당 주인, 식료품 도매업체 대표 혹은 (김 모 군의 사장님처럼) 술집 주인 등을 맡고 있으며 서로 다른 위치에서 상이한 강도와 다양한 질적 형태로 구성된 각자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자본가 계급 일반의 전형인 대자본가들, 대기업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한 사장님과 회장님들을 어떠실까. 이들은 기존의 일반적 관념 속 자본가 계급의 보편적 상 그 자체이자 자본의 인격적 화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자본가들과 대기업을 소유한 자본가들은 직접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매우 자명하고도 당연한 사실이다. 삼X전자의 이모 회장님께서 전자 제품 생산과정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지시, 지휘의 업무, 감독의 업무, 관리의 업무 등 그 어떤 형태의 노동도 대자본가들의 몫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이 지닌 자본으로 지시, 지휘, 감독, 관리 따위의 업무를 대신 도맡을 노동력을 구매한다. 단순 노동자들을 고용함과 동시에 관리나 감시의 역할을 수행할 노동자들을 별도로 고용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자본가들과 같은 편으로 보이는 감시, 감독의 노동자들, 이를테면 대기업 임원진 및 전문 경영인 등은 특수한 형태의 노동을 수행할 뿐 똑같은 노동자다. 물론 이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는 분명히 단순 노동자들과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의 강도나 임금의 수준, 착취의 정도 등 여러 부분에서 단순한 형태의 노동자들보다는 양질의 대우를 받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이들 역시도 대자본가 회장님들의 감시, 감독을 대신 행하기 위해 고용된 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쁘띠 부르주아로 분류되는 소자본가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가치를 만들기도 한다. 김 군의 사장님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을 이루는 대자본가들과 대기업 회장님들은 자신의 생산수단과 (노동자의) 노동력 사이의 물질대사를 멀리서 지켜볼 뿐 이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결론을 맺기 전에, 처음으로 돌아가 김 군의 일터에 계시는 사장님의 말씀을 다시 곱씹어보겠다. 사장님들이 행하는 노동의 버거움을 시사했던 김 군의 고용주, 사장님의 말씀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한 동시에 그렇지 않은 부분도 포함하고 있다. 일단 (힘듦의 정도는 객관화가 어렵지만) 사장님들이 실제로 노동하고 계신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나 김 군의 고용주와 유사한 형태의 사업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및 소자본가(쁘띠 부르주아)들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했다. 하지만 이처럼 사장이 애를 쓰지 않고는 그 어느 사업장의 (가치)생산과정도 원활히 굴러갈 수 없다는 말씀은 현대 사회의 모든 사장님들께 일반화시키기에 부적절했다.

앞선 논의에서 우리가 고찰했듯, 부르주아 계급은 일반적 양태와 (소자본가들로 구성된) 쁘띠 부르주아로 나뉘었다. 김 군의 사장님과 이해관계가 유사한 쁘띠 부르주아지 집단 내에서는 김 군의 사장님 말씀이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분 또한 자신의 경험적 한계에 근거해 이러한 발언을 하셨으리라. 하지만 이모 회장과 같은 대기업의 대자본가들에게는 이 같은 주장이 절대로 적용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은 노동 일선에 결코 참여하지 않으며, 나아가 자본가 계급 일반이 노동 과정에 참여한다는 발상은 실제적 양상과는 괴리가 컸다. 자본가 계급 일반의 부르주아지들은 절대로 직접 노동하지 않으며, 그들의 관리, 감독이 없어도 분명히 누군가(노동자) 이를 대신함으로써 생산과정을 원활히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자본가의 노동으로 사업장이 돌아감을 시사했던 김 군 고용주의 발언이 (쁘띠 부르주아의 경우와는) 반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 군의 사장님은 쁘띠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 계급 일반간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셨고, 이 때문에 무언가 오해를 하신 게 아닐까 싶다. 쁘띠 부르주아는 분명히 직접 가치를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내의 자본가들 모두가 가치 창조 과정(=노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기업의 운영구조를 대중이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따라서 필자가 알지 못하는 과정에 대기업 대자본가들의 노동이 투여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은폐된 과정이 존재한다한들, 대자본가들의 노동은 쁘띠 부르주아지들의 직접적 노동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형태일 것이다. 더욱이 강도의 측면에서도 결코 비교할만한 수준이 아니리라 확신한다. 결론을 짓자면, 우리 사회 내 많은 사장님들이 직접 노동을 하고 계신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 모든 자본가(혹은 고용주, 혹은 사장님)들의 표준적인 계급적 표본이 아니었으며, 그저 쁘띠 부르주아였을 뿐이다. 자본가 계급 일반의 경우엔 직접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실질적 노동과정에 대기업 사장님들이 개입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 같은 결론에 이르기 위한 사유의 과정 속에 우린 부르주아 계급 형성의 기저에 깔려있던 ‘생산수단’의 개념을 포착해냈고, 이를 바탕으로 쁘띠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일반을 분리해냈다. 부르주아와 쁘띠 부르주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사회적 경향성 속에 우리는 오늘의 논의를 통해 좀 더 세밀한 관찰을 이어갈 수 있었다. 더불어 노동과정 전반을 자본가의 관점에서 사유해봄으로써, 우리의 근로 과정에 사장님들이 어떻게 개입하고 계셨는지 심도 있게 분석해볼 수도 있었다.

일상적 사례를 통한 자본주의적 구조&생산관계의 명료화 과정을 가능케 해주었던 김 군을 떠올려본다. 글을 마무리하는 대로 김 군에게 연락을 취해 필자에게 들려준 에피소드를 글에 담았음을 밝히고 이를 게재해도 좋을지 물어볼 참이다. 소재를 제공해주었음에 감사인사를 전함과 동시에 우스운 질문도 하나 덧붙여야겠다. “ 너네 사장님보다 더 나쁜 사장님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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