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왕? [내가 읽는 『자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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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왕?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엄청난 생산력과 유통망을 가졌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능력은 서울 한복판 대로변에서부터 두메산골 잡화점까지 뻗친다. 어딜 가나 쇼윈도에 전시된 수많은 상품들은 잠재적 소비자인 행인들의 시선을 끌며, 그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지갑을 열기 위한 노력에 맞서기는 참으로 어렵다. 결국 지름신이 강림하고 어느새 지갑 안에 갇혀있던 신용카드가 계산원의 손에 쥐어진다. 우리는 생산할 때보다 소비할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소비를 통해 이 사회의 모두가 평등하다고 되뇐다. 자본주의의 물신숭배는 항상 속삭인다.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너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법이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왕으로 만든다. ‘손님은 왕이다!’ 모두가 소비자인 자본주의 사회는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는 세상,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세상이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를 얻는다. 배가 고프면 뜨끈하고 든든한 국밥 한 그릇을 사먹고, 몇 주에 한 번 머리카락을 다듬을 때가 되면 미용실을 방문해 머리카락을 손질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자신이 원하는 걸 얻는 과정이 소비이고, 거기서 얻는 만족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다음 봉급일만을 바라보며 일한다. 돈을 쓸 때 우리는 왕이니까.

 

소비는 짜릿하고 기분 좋은 행위이다. 원하는 사용가치를 얻은 우리는 행복하다. 또 원하는 사용가치를 찾아가는 그 순간 자체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소비 과정에서 주인의식을 느낀다. 애X스토어에 방문하여 최신 아X폰을 둘러볼 때 점원들에게 받는 대접은 문자 그대로 우리를 왕이라도 된 것 마냥 만들어준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격언이 잘 실현될 때 소비자로서 우리는 주인의식을 느끼며 만족한다.

 

우리가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즉 소비를 통해 왕이 되려고 노력하며 돈을 버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C-M-C’로 정식화한다. C는 상품(앞의 C와 뒤의 C는 다른 상품), M은 화폐이다. 상품을 팔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시 내가 필요로 하는 상품을 구한다. 여기서 C는 사용가치로 존재한다. M은 교환과정을 간략하게 만든다는 화폐 본래의 속성에 충실한 화폐, 화폐로서의 화폐이다.

 

원래 ‘C-M-C’는 물물교환의 연속인 ‘C1-C2-…-Cn’에서 비롯되었다. 나에게 필요 없는 사용가치를 다른 사용가치들과 계속해서 교환하면서 나에게 필요한 사용가치를 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물물교환의 불편함이 화폐를 불러왔고, 화폐가 물물교환의 과정을 없애거나 대폭 축소시켜 ‘C-M-C’라는 사슬이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C-M-C’는 사용가치가 목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자본의 목적은 사용가치가 아닌 자본의 증식, 즉 가치증식이다. 화폐가 목적인 것이다. 자본의 정의부터가 그러하다. 아무리 많은 돈이 쌓여있더라도 그 돈들이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데에 쓰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돈을 더욱 크게 불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는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구두쇠’일 뿐 자본가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본이 커지는 과정은 아까 논의한 C-M-C로 설명할 수 없다. 자본이 커지는 과정은 자본으로 시작하여 자본으로 끝난다. 그런데 처음의 자본보다 나중의 자본이 줄어들어 있으면 이 과정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자본의 증식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M-C-M′(M′=M+ΔM)’ 자본은 상품을 만들어내고 그 상품을 다시 팔아 자신의 몸집을 더욱 크게 불린다. 끝의 M′은 원래의 자본에 자본의 증가량이 더해진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고리대와 같이 M-M′으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자. ‘쌀을 팔다.’ 어떤 의미의 말일까? 물론 이 문장은 쌀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다른 용법이 있다. 돈을 주고 쌀을 살 때에도 쌀을 ‘판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쌀을 산다’는 것은 쌀을 팔고 돈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용례의 기원에 대한 여러 설들 중, 과거 화폐경제가 성립되기 시작할 무렵, 그 이전 시대 상거래의 핵심적인 수단이 되었던 쌀과 화폐를 교환하는 과정을 쌀 중심적으로 바라보아 그런 용례가 성립되었다는 설이 있다.

 

마찬가지로 돈을 불려야 하는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자본은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고, 다시 상품을 팔아 화폐를 사는 게 아닌가? 이를 C-M-C와 엮으면 우리는 돈이라는 물건을 팔아 사용가치를 대가로 받는 판매자인 건 아닐까? 즉 우리는 자본이 만든 물건을 사는 데에 집중하여 우리를 소비자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우리가 돈을 팔고, 자본이 돈을 사는 건 아닐까?

 

자본이 스스로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것도 아니다. 자본은 우리에게서 ‘돈’을 사옴으로써 몸집을 불려야 하는데, 그 돈을 사기 위해서는 상품을 팔아야 한다. 그 상품을 사올 때 팔았던 돈의 가격 그대로 되파는 건 자본에게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 돈을 팔아 상품을 사는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들은 곧 자본가가 아닌 우리들이다. 결국 우리는 상품을 팔아 사는 돈보다, 상품을 살 때 파는 돈을 더 많이 쓰게 된다. 자본이 몸집을 불리는 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과정에서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M-C-M′ 중에서 상품을 만드는 C과정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가치를 생산하고, 그 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왕이 아니다. 자본이 손님(=소비자)이고 우리가 판매자이기 때문에 자본이 왕이 된다. 또 우리는 자본에게 사기를 당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산한 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몫을 남에게 빼앗기는 사람은 왕이나 주인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은 노예에 가깝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주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언명에 현혹되어 스스로가 주인이라는 허위의식에 덮였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우리를 왕으로 생각하던 소비의 과정에서도 최후의 승자는 자본이었다. 자본주의는 모두가 노력하면 그만큼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과정이 공정하고 평등하다고, 모두가 소비자, ‘손님’이기에 평등하다고 강조했지만 그것은 사기였다. 자본은 그저 우리에게서 싼 값으로 돈을 사오기 위해 ‘손님은 왕이다’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몸집을 키우고 다른 자본과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소비자임에 동시에 어디서는 계산원으로, 어디서는 경비원으로, 어디서는 미화원으로 존재한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은 우리가 손님이 아닐 때에는 왕보다 못한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평등은 속 빈 강정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주인이라고 선전하지만, 사실 그 평등은 자본을 갖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평등이거나 비슷한 자본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평등이다. 조지 오웰은 동구권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동물농장에서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러한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하던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 역시 그 격언을 피해갈 수 없어 보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어떤 인간은 더욱 평등하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멋진 말 뒤에는 사실 우리에게서 우리의 몫을 빼앗아가는 고약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가 숨어있던 것이다. 손님이 왕인 세상보다, 그냥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손님일 때에만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멀쩡한 세상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왕으로 살고 싶지도 않고, 노예로도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소박한 이 바람이 실현되기까지 요원하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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