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여기가 로도스다, 춤추자!]
벤야민과 만화-폐허 산책하기 2편.
-도망쳐야 아는 행복? 벤야민과 나오미 수녀의 도피. 2020.04.05.
이상하(한철연 회원)
“자신의 과거를 강압과 궁핍에서 태어난 산물로
고찰할 줄 아는 자만이, 현재의 순간에 과거를
자신을 위한 최고의 가치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중에서 발췌)
1.
지난 시간에 두 폐허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반대로 이 폐허 속에서 점화된 불꽃, 낙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을 듯하다. 낙원,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력은 어느 시대에나 형태는 달랐지만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또는 소비 자본주의 시대, 나를 가져봐! 나를 즐겨봐! 그러면 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거야! 라고 외치는 광고가 세상 천지에 깔려있고 돈만 된다면 자진해서 사람 피부에도 광고판을 새겨놓는 21세기다. 슬라보예 지젝 같은 철학자가 자주 농담처럼 말하듯 이 소비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란 결국 모두에게 ‘즐겨라’ 라는 지상명령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는 체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세상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재벌 이재용이든 서울역 노숙자든 원한다고 해서 모든 걸 즐기거나 가질 수는 없다는 건 명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으로 종종 화폐, 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시공간을 상상하고 꿈꾼다. 그리고 그런 시공간이 우리 인류의 역사상 분명 없지는 않았고 사실 지금도 존재한다. 그 실제적 사례를 들자면 역시 절이나 수도원같은 종교인들의 공동체가 대표적이리라. 또한 혁명과 해방을 외치며 영주에게 저항하며 도망친 농노들이 만들어낸 중세 코뮨 도시나, 러시아 혁명의 소비에트=평의회라든지 로버트 오언의 공동농장같은 유토피아적 사회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회적 실험들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아 물론 나의 이 말에 대해 뉴스를 자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고기먹고 술 먹고서 단체 도박을 하다가 검거된 땡중이나 헌금 경쟁을 장사하듯 부추기는 부패한 대형 교회의 폐허를 떠올리게 하는 뉴스를 떠올리며 종교인들의 유토피아라는 말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 공동체를 쉽게 다 타락했다고, 거기엔 아무런 해방의 가능성도 없다고 단언하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 자체일 뿐이다. 현대의 수도원 같은 공동체라고 해서 화폐, 돈 자체가 없는 곳은 아니지만, 분명 엄격한 계율 아래에서 사유재산 자체가 없다시피 하고 오로지 신의 이름으로 약자를 위한 봉사에 힘쓰는 신부님과 수녀님 종교인들은 여전히,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런 종교단체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종로의 조계사처럼, 삼성의 비리를 폭로하려는 전 간부나 정권의 노동탄압을 막으려는 노동조합 회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하려 찾는 신성하고 현실 권력에 불가침적인 해방의 공간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자본주의가 아닌 해방의 공간을 찾으려고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떠났던 벤야민과, 한명의 전문가로서 뛰어난 약효를 입증한 만드라고라 마스터인데도 수도원을 향했다가 도피하고 방황하던 청춘, 웹툰 덴마의 나오미수녀에 대한 이야기다. 이 둘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는 도피와 삶의 행복의 사유-이미지에 대해 한번 고민해볼 수 있으리라.
-벤야민은 사유가 이미지와 만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지가 가진 구체성, 즉 실제 생활들, 눈에 보이는 것들, 만지고 있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유 이미지가 학문이나 철학의 영역을 외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삶 속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피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각적 자유, 사유 이미지, 이미지 사유이자 변증법적 이미지입니다. 메트로폴리스, 대도시에서는 이러한 이미지 사유가 구체적으로 총체화되어 나타납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근대성의 자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인데, 그 경제 논리가 아무리 첨예하고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구체적 육체성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성을 담지하고 있을 때에만 근본적으로 행동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고 김진영 선생님의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310p 중에서 인용.
2.
나와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다른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지도 모른다. 수도원 같은 폐쇄된 작은 공동체가 이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지 오래고, 막스 베버같은 사람이 말한 것처럼 탈주술화가 진행된 근대 이후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무슨 큰 상관이 있느냐고. 철학적 사상적으로 봐도 우리는 이미 데카르트와 칸트 이후에 살고 있고 19세기의 마지막에 니체가 선언했듯이 신은 죽었다고 봐야 되는 게 아니냐고, 지금 시대에 종교가 무슨 큰 현실적인 영향력이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기존 종교의 유일신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현대인들은 종교로부터 멀어졌을까. 그렇다면 수도원같은 오래된 신의 성전에 대해 다루기 전에 지금 우리 시대의 신흥 유사종교, 영원한 경제성장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지난 글에서 말한 유시민/진중권과 웹툰-덴마라는 새해 첫날의 두 폐허를 목격한지도 벌써 세달 째, 이제 내가 사는 서울 홍대동의 날씨는 분명 겨울이 지나갔고 정말이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가정통신문처럼 진부한 말이지만 개나리와 벚꽃이 슬슬 기지개를 켜려고 한다. 허나 이런 계절의 순환과는 달리 매서운 코로나 사태는 종식은 커녕 글로벌하게 점점 장기화될 조짐이다. 세계경제의 침체는 확실시되고 선진국들의 예상 경제성장률은 거의 다 마이너스를 찍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믿고 있다. 지금이 이렇게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결국 주가는 다 회복하고 경제는 다시 성장하리라는, 끝없는 성장신화라는 유사종교를. 도대체 이 근거없는 믿음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한상원의 저서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을 참고해서, 천년도 더 전에 기독교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신국론(413-426)에서 이런 끝없는 성장에 대한 믿음의 뿌리를 찾을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한때 로마 제국은 지금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의 뿌리였고 거대한 영광 그 자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많은 고난 끝에 이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받았고 이천년뒤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심지어 세계의 달력과 시계는 모두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로 시간을 세고 있으며 21세기 근대화된 국가 중에 사실상 예외는 없다. 허나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 이 로마의 국교는 심각한 위협에 시달렸다. 이교도이자 야만족으로 불렀던 서고트족의 군사적 침입과 패배로 로마는 엄청나게 흔들렸고 기독교가 말하는 신의 구원에도 당연히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역사철학의 창시자 또는 역사철학 일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존 그리스 철학의 원형적 시간관-즉 사계절이 순환하듯이 세계는 끝없이 반복된다는 시간에 대한 관점을 벗어난다.
그는 역사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시간은 무한하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설정한대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마지막엔 최후의 심판과 구원이 기다린다는 직선적(선형적)시간관을 전개한다. 이 최후의 종말, 심판 또는 구원이 예정되어 있기에 지금 현실의 어떤 고통도 사실 언젠가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미래의 영광과 구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현재의 비극을 견뎌낼 수 있는 근거로 작동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기에 이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몸으로 받아들인다. 허나 이는 어쩌면 언젠가 경제가, 내 주식은 언젠가는 오를 거고 내 살림살이가 좋아질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버틸 수밖에 없는 21세기 우리네 대다수의 삶과 구조적으로 과연 무엇이 다른 걸까.
3.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분명히 깨닫고 있다. 서른이 넘은 내 세대가 직접 겪어본 것만 하더라도 97년의 IMF구제금융 사태, 2008년의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공황, 그리고 2020년의 코로나로 인한 세계경제 침체까지. 영원한 경제성장이란 없으며 10년 정도 주기로 세계적인 불황,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것을 과연 누가 경험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경제성장이라는 오래된(?) 믿음은 자신의 옷을 바꿔 입을 뿐 끝없이 현재 세계의 무대에서 퇴장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주가 폭락 사태를 대다수 개인들, 이른바 개미들이 스스로 국난을 극복하자며 동학 농민 운동을 패러디하여 ‘동학 개미 운동’을 펼치는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연극을 펼치는 중이다. 지금의 천도교인 동학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바로잡자며 백년 전에 펼친 그 운동을 이제 주식시장에서 다시 반복해보자는 이 우스꽝스러움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불황이 있음에도 여전히 경제성장이라는 불멸의 종교를 믿는 신도들을 보며 겨우 재작년에 겪은 전국민의 휩쓸린 비트코인 폭등과 폭락 대란이 떠오르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이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고 전해지는 희극과 비극에 대한 명언을 다시금 되새겨볼 즈음이 아닐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그리고 이 ‘영원한 경제성장’이라는 근거없는 사이비 종교스러운 언어처럼 지난 10년 사이 가장 그 의미 내지 뉘앙스가 변해버린 말로는 뭐가 있을까. 수많은 후보군이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2030세대에서는 아마 ‘청춘’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에 문학 교과서에서 ‘청춘 예찬’이라는 글의 주요 주제를 파악하는, 아니 외우는 병든 실험용 쥐 같았던 수험생들은, 대학생이 되어 서울대 소비자학 교수 김난도가 백만권 넘게 판매한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을 읽고서 한번 더 힘을 내봤지만, 당연히 그 책을 읽는 95퍼센트 이상은 서울대생이 아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김난도 그의 행적과 젊은 세대에 대한 사회적 냉대에 실망한 수많은 리얼 청춘들의 반항 내지 저항은, 유병재라는 코미디언의 말 한마디로 종결된 듯하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나오미수녀의 고난과 도피는 그야말로 이런 우리 세대의 청춘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스케치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또한 그러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난 글에서 말한 벤야민의 사유-이미지의 실제적 사례를 수집하고 산책하고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재구성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칸트의 명언을 패러디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감히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감히 재구성해보라, 너 자신만의 감각을 표현할 용기를 가져라!
1927년 1월 30일. 모스크바 일기.
여기 베를린에 와서 비로소 분명해진 모스크바에 대한 몇가지를 더 적는다. (1월 29일부터의 일기는 2월 5일 베를린에서 쓰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사람에게 베를린은 하나의 죽은 도시다. 거리의 사람들은 황량할 정도로 개별화되어 있고 한 명 한 명은 다른 사람들과 너무 떨어진 채 큰 거리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다. 동물원 역에서 그루네발트로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지나야 했던 거리들은 마치 닦고 문질러 씻은 듯 지나치게 깨끗하고 편안해 보였다. 도시와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그들의 정신적 사태를 반영한다. 이 도시에서 얻게되는 새로운 시각은 의심할 바 없이 러시아 체류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비록 러시아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의식하면서 유럽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걸 배우게 된다. 그것이 분별력 있는 유럽인이 러시아에서 첫 번째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러시아 체류는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 방문자들에게 정밀한 시금석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요구된다. 평균에서 벗어나 있거나 개인적인 사람,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체제에 덜 적합한 사람일수록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는 손쉽게 더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상황에 더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유럽인들은 별 어려움 없이 다가서는 추상적 사유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될 것이다. … 모스크바는 다른 대도시에서 저항하기 힘든 멜랑콜리를 퍼뜨리곤 하는 교회 종소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 이것 또한 모스크바에서 돌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인식되고 그리워지는 것 중 하나다. (257-25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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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웹툰 덴마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를 따라가보자. 덴마의 주 무대인 드넓은 제8우주의 행성 중 하나인 위노바, 한 작은 수도원의 막내로 보이는 나오미 수녀는 그야말로 군대의 이등병처럼 중노동에 하루종일 시달리는 아픈 청춘이다. 혼자서 수십명의 환자 간병에 청소에 빨래에 음식까지… 하루에 하나만 해도 사실 충분히 피로에 지칠 수십명분의 가사 노동인데 이 많은 노동을 나오미 수녀는 모두 떠맡고 있고, 심지어 이 와중에 같이 일하는 수녀들 사이에서도 나오미 수녀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이전에 나오미 수녀의 건의대로 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사회의 낮은 존재, 약자인 동네의 노숙자, 걸인들을 수도원에서 보살피게 되자, 기존 동네 신자들의 수도원에 대한 평판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우주 액션 활극이자 현실에 대한 풍자극, 블랙코미디인 덴마에서 이런 수도원이 나오는 걸까. 이 가난한 수녀들의 수도원에 대해서 우리는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에서 한상원의 언급을 한번 살펴보고 해석해볼 수 있을 듯하다.
기독교 전통은 이렇듯 공통의 정신적 가치뿐 아니라 물질적 재화의 공동 분배 역시 공동선의 원리로서 강조해왔다. <사도행전>에서는 초기 기독교 신자 공동체에서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한상원, 『앙겔루스 노부스의 시선』, 85p)
반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가 이러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이념에서 벗어나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회 전체를 지적, 이데올로기적으로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질적으로도 지배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주의와 부패는 10세기 클뤼니 수도원을 필두로 하여 교회의 혁신을 추구하는 수도원 운동과 직면한다. … (86p)
수도원 운동은 제도화되고 권력화된 바티칸이 상실해버린 사도 바울의 공동선 이념을 복원하고자 시도했다. 그 시작점은 성직자들이 청렴한 삶을 살고, 수도원 내에서 자율적, 자족적인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면서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따. 수도원 운동의 교회 개혁 중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교회의 재산 소유와 상속(당시 성직자들 중에는 교회법을 어기고 자녀를 낳은 사람들이 많았다)에 관한 것이었다. 교회가 어디까지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하는 신학적 논의가 펼쳐지면서 이러한 논쟁은 다소 정치적 성격마저 갖게 되었다. (87p)
현실 풍자적 요소가 다분한 덴마의 우주에서는 태모신교라는 종교가 굉장히 큰 세력을 쥐고서 실버퀵이라는 자체 회사를 통해 우주의 물류를 장악하고 있다. 물류, 유통을 장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아마존이 지금 미국인들의 삶을 장악하고 쿠팡이 당일배송으로 한국인의 편리함을 장악하고 있듯이 경제의 대단히 큰 부분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태모신교에 비교해 마치 만드라고라 에피소드에 나오는 고엘 종교회와 나오미수녀의 선행은 초기 기독교 수도원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렇게 헌신하면서 당연히 기존 지역사회의 헌금이나 십일조도 줄었으리라. 게다가 수도원 토지의 소송에서도 져버려서 신의 성전을 용역 깡패가 노골적으로 폭력을 쓰며 쳐들어오고 협박을 일삼는다. 이렇게 나오미 수녀는 안밖으로 압박을 받으며 삶에 지쳐가는 중에, 병환으로 누워 있는 원장 수녀님에게 잘 들리지 않는 작은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려고 결심한다… 깡패가 얼릉 이 수도원에서 떠나라고 협박하며 그녀의 몸에 붙여놓은 빨간색 재산 철거통지서를 만지면서.
재산권의 정당한 법적 행사라는 신성한 권리를 내세워서 종교라는 이전의 신성을 폭력으로 짓밟고, 심지어 생일날 수녀를 때리고 철거집행 통지서를 수녀의 몸에 붙이는 이 장면은 정말이지 인상적인 양영순의 연출이다. 세계 역사에서도 기독교는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유일신의 논리였지만, 지금 21세기엔 누가보아도 기독교보다 자본주의가 더 전세계적으로 우세한 유일한 신성의 논리가 아닐까. 물론 이렇게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보는 것은 벤야민적인 시선의 해석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벤야민이라면 오히려 20세기 자본주의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고, 정신적인 종교와 물질적인 자본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의 알레고리, 우화야말로 마치 수천년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신 포도의 이솝 우화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고 말해줄 테니까. 여튼 나오미 수녀는 더이상 이런 고통과 억압을 견디다 못해, 마침내 도피를 결심한다. 딱히 목적지도 없이 지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지 괜찮다는 마음으로 떠난 나오미수녀. 허나 떠난 곳에서도 부랑자에게 가방을 소매치기 당하는 등 수난은 계속된다. 허나 수녀는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른다. 유대인 말살정책을 펼치던 나치를 피해 이역만리 미국으로 향하기 위해, 나치가 득세하는 지금의 유럽을 피하기 위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던 벤야민도 마치 이런 심경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녀가 도착한 에벤에셀에 대한 자칫 놓치기 쉬운 복선을 한 독자의 매우 친절한 베스트댓글이 탁 하고 잡아준다. 나오미 수녀가 정처없이 떠나서 도착한 지역 에벤에셀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를 베댓처럼 나오미 수녀의 선행, 만드라고라 마스터로서 살아오고 베풀어온 그녀의 업이 이 먼 도시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풀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을 더해보자면, 나오미수녀는 그저 별 목적없이 그저 지금 여기, 고통스런 현재의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조차도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수녀를 인도한 것이고, 덕분에 나오미는 그동안 고생한 것의 보답을 받게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어쩌면 칼뱅의 예정설처럼, 나오미의 이 돌발행동마저도 신의 입장에선 다 예견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전에 나오미 수녀가 키워냈던 위노바 행성의 특산물인 건강식품 만드라고라. 이 식물은 가장 많은 애정을 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며 그 형상대로 꽃이 피는 신기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건 위에 나온대로 수도원에서 그 중노동을 나오미수녀가 감당하기 이전엔 농부로서 애정을 가지고 만드라고라를 키워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단순히 나오미수녀가 일반인 이상의, 앞선 야엘로드 에피소드의 야엘처럼 엄청난 고통과 억압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초인에 가까운 존재인 걸까?? 아니면 야엘같은 초인이 아니라도, 벤야민의 표현을 살짝 빌려서 행복에 가까워지는 ‘메시아가 열어놓은 희미한 작은 문’ 은 존재할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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