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시간, 향기 [시가 필요한 시간]
열세 번째 시간, 향기
마리횬
요즘 부쩍 거리의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붙잡고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꽃의 향기가 참 좋죠. 향수를 뿌려야만 향기를 가질 수 있는 인간과는 달리, 꽃은 스스로 향기를 내뿜는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인간이 뿌린 향수는 아무리 짙은 향수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향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꽃은 피어 있는 동안 심지어는 말라서까지 그 향기를 간직하고 사니까,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셈이죠.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향기. 이 향기가 꽃에게는 있는 이유가 뭘까? 오늘 소개해 드리는 시를 읽으며 한 번 생각 해 보시죠.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이해인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고운 자리에
꽃처럼 순하고 어여쁜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꽃 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꿀벌과 나비와 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꽃이 좋아 밤낮으로
꽃을 만지는 이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 날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열매를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이해인 시인은 시인이자 수녀님이시죠.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시에서는 ‘꽃마음’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시인이 우리에게 가지길 원하는 이 ‘꽃마음’이 무엇일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시인은 꽃에게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겸허한 태도를 엿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화려한 꽃이라도, 또 어느 담벼락의 볼품없는 꽃이라 하더라도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법이 없죠.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겸손하게 자라나고, 그리고 때가 되면 활짝 피어 납니다.
꽃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활짝 핀 꽃 속에는 하늘과 태양, 비와 바람의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꽃 한 송이가 피기 위해서는 뜨거운 태양빛도 받아야 하고, 거센 빗줄기도 속절없이 맞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더위와 추위, 외로움, 또 바람 불 때의 아픔.. 꽃이 피어 나려면 그 모든 것을 오롯이 견뎌내야만 하죠.
뿐만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손길도 있습니다. 농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꽃을 기르고 키우며 정성을 다 했던 사람들의 어루만짐의 시간들도 한 송이의 꽃 속에 들어 있겠죠.
그 긴 시간들을 감내했기 때문에 지금의 꽃이 있는 것일 텐데, 활짝 핀 꽃송이만 봐서는 그런 모든 시간들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들의 이야기가 꽃 속에 감춰져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결코 쉽게 피는 꽃은 없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기다림의 꽃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 날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다림의 꽃마음을 우리에게도 가지고 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쉬운 인생이란 없잖아요. 꽃이 그러했듯 우리도 향기로운 삶으로 피어나려면, 견뎌내야 할 것들을 견디고, 겪어야 할 연단을 겪으며, 피어날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실, 열매가 열리려면 먼저 꽃이 져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잘 아는 상식이죠. 시인은 그 부분까지도 고찰해냅니다.
열매를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시인이 보아낸 또 하나의 꽃마음은 열매를 위해서 나를 희생할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져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매년 곱게 빛나는 꽃의 마음, 주어진 삶의 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겸손과 만족의 꽃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겠죠.
이 시에서 말하는 꽃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마음을 가지고자 매 순간 노력한다면 그러한 삶이 정말 향기 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는 이문세의 <꽃들이 피고 지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어>라는 곡입니다. 마이너 코드와 메이저 코드가 번갈아 진행되는 것이, 마치 평탄치만은 않은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 위로 흐르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마치 어려움 속에서도 피어나고야 마는 아름다운 꽃처럼, 굴곡진 우리의 인생 속에도 분명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봄날에 참 어울리는 곡입니다. 시와 노래와 함께 오늘도 향기로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문세 – 꽃들이 피고 지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어
주소: https://youtu.be/VumtfvtThtc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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