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시간, 인내 [시가 필요한 시간]
네 번째 시간, 인내
마리횬
지난 시간에 달에 대한 시와 별에 대한 시를 읽었었는데, 지난 한 주 동안 얼만큼 밤하늘의 별과 달을 챙겨 보셨나요? 시가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아마 읽을수록 뭔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읽는 건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몇 줄 정도의 시인데, 그 시 한편이 주는 힘이 어마어마할 때가 있죠. 저도 그걸 가끔 느끼곤 해요.
저는 ‘얼마나 유명한 시인이 쓴 시인가’ 하는 것보다는, 저 스스로 먼저 공감이 되는 시들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런 시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죠. 누군가에게 소개하기 이전에 제가 먼저 ‘아 좋다’라고 느껴야, 그것에 관해서 글을 쓸 때 저도 더 감정을 실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각자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을 텐데, 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들, 사소한 일상들을 바탕으로 쓴 시를 선호하는 편인 것 같아요. 일상 속에 그냥 지나쳐버렸던 어떤 작은 것들이 시인의 눈을 통과하면 얼마나 값진 것으로 변화 되는지를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오늘 ‘인내’라는 주제로 소개해 드릴 시 역시, 어떤 작고 소소한 것에 대한 시인데요, ‘담쟁이’에 관한 시 두 편을 가져 왔습니다. 담쟁이 넝쿨 아시죠? 벽을 타고 오르고 벽면을 다 덮으면서 피는 담쟁이.
그 담쟁이와 인내가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하시죠? 첫 번째로 들려드릴 시는,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 덩굴의 독법’이라는 시입니다. 눈 앞에 담쟁이 넝쿨로 가득한 푸른 벽이 있다고 상상하시면서 시를 들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담쟁이 덩굴의 독법
나혜경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 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 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졸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나혜경 시인의 시 ‘담쟁이 덩굴의 독법’ 들어 보았는데요, 담쟁이가 피어 오르는 것을, 담쟁이가 벽 구석 구석 한 땀 한 땀 읽어가는 것처럼 표현을 했죠. 미세하게 한 잎 한 잎 벽을 타고 자라나는 담쟁이 덩굴의 모습을 보고 시인은 마치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담쟁이를 보면서도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를 듣고 나니까 그렇게 노력하며 자라나는 담장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냥 ‘읽는다’라고 하지 않고, ‘지문이 닳도록’ 읽는다고 하고, 또 ‘아픈 독법으로’, ‘기어 오른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뭔가 애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담쟁이의 모습을 읽어내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있습니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든다’라는 표현도, 사실은 초록색 잎에 가을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붉은 단풍이 드는걸 묘사하고 있는 건데, 그걸 ‘피멍이 든다’고 표현을 했어요. 벽을 오르기 위해서 인내하며 노력하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푸른 손 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서 책을 덮어야겠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모습, 이번에 다 성공하지 못했어도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서 인내하고 참아내는 그런 모습이 보이죠. 다음해 새 봄이 오면 또 다시 맨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야 할 테고, 어쩌면 또다시 다 읽어내지 못한 채로 시들 테지만, 그래도 봄이 되면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올라가는 담쟁이의 모습. 그 모습에서 인내가 느껴지시나요?
어떻게 보면, 인간은 담쟁이보다 더 많은걸 가지고서도 조금만 힘들면 쉽게 포기해버리는데.. 이 시를 통해서 나약한 인간들에게 담쟁이가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 상황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분들 있다면, 이 시 들으시고 조금 더 힘 내시기 바랍니다.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 봄’이 올 테니까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제이슨 므라즈의 <I Won’t Give Up>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너무 유명한 곡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고백의 가사이기도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우리의 ‘인생’을 놓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린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많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보겠다’라고 고백하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나혜경 시인의 시 속의 다짐과도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두 번째로 준비한 담쟁이 시는 도종환 시인의 시인데요, ‘담쟁이’라는 제목의 시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시인이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서 학교에서 해직된 후 무직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시기,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힘들고 막막했던 시절에 쓰여진 시로 알려져 있어요. 당시에 도종환 시인은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여러 선생님들과 모여서 논의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해결책도 보이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때에 우연히 창문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창 밖의 옆 건물 벽에 담쟁이 잎이 가득 붙어 있는 게 보인 것이죠. 그 벽을 보면서, ‘저 벽에는 물 한 방울 마실 곳도 없고, 뿌리를 내릴 흙도 없는데, 처음부터 저런 담벼락에서 살도록 던져진 담쟁이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시인도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에 힘들어하고 있는데, 담쟁이는 애초부터 그런 척박한 환경에 살도록 던져진 거니까, 어떻게 보면 담쟁이가 더 불쌍하다고도 볼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시인은 불쌍한 눈으로 담쟁이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비옥한 땅과 숲에서 자라는 다른 식물들에 비하면, 담쟁이는 자라는 속도도 느리고 처한 환경도 훨씬 더 척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서두르지 않는 모습, 인내하며 여럿이 함께 힘을 내어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시인의 눈은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런 담쟁이를 보면서, ‘와.. 저런 상황에서도 담쟁이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담쟁이 잎들과 손 잡고 함께 벽을 기어올라가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 시인은, 가지고 있던 회의 서류 뒷면에 자신의 생각을 시로 써 나갔다고 해요. 그렇게 해서 쓰여진 시가 바로 이 ‘담쟁이’입니다. 그럼, 한번 시를 읽어 볼까요?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이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함께 손잡고 올라간다.
푸른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저것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네, 도종환 시인의 시 ‘담쟁이’ 읽어 보았습니다. 이 시는 아까 읽었던 나혜경 시인의 시와는 또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담쟁이를 보고, 같은 인내와 끈기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시인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동이 또 다르죠. 앞서 읽었던 나혜경 시인의 ‘담쟁이 덩굴의 독법’이, 어떤 한 사람의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를 말해주고 있었다면, 두 번째로 읽은 도종환 시인의 시는 ‘함께’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나도 이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것을 ‘벽’이라고, ‘절망의 벽’이라고 말하며 주저앉아 있지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르잖아요? 때로는 여러 말보다도 함께 손 잡아주고, 말없이 이끌어줄 때, 그것이 누군가에게 더 위로가 되는 법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혹 힘든 시기에 놓여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뭔가 다 포기해야만 할 것 같은 절망에 빠져 있는 분들 계시다면, 이 시와 함께 위로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 한 방울 없고 뿌리 내릴 흙도 전혀 없는 벽에서도 담쟁이는 푸르게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힘 내세요!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 <93 Million miles>라는 곡 가져 왔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아들아 살면서 어두워 보일 때가 있을 테지만, 빛이 없는 것도 때론 필요한 법이란다. 단지 이것만 기억하렴,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넌 언제든지 집에 돌아올 수 있단다. 모든 길이 위험한 비탈이어도 거기엔 언제나 네가 의지할 손이 있단다. 이것만 기억하렴, 네가 어디에 가든지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길이 가파르게만 보이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의지할 손이 있다는 말, 기억하시고 힘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필자 마리횬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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