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㊲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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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3 수호신과 영웅들에 관한 것(386a-391e)

                * 용기(386a-389a)

                * 정직과 절제, 경건(389b-391e)

 

[389b-d]

*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에서 수호신과 영웅들을 다루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덕목으로 용기를 이야기 한 후에 정직ἀλήθεια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거짓말ψεῦδος을 할 이유 자체가 없는 신과 달리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통치자들이 나라의 이익 또는 시민들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합당해도, 그 밖의 사람들의 경우 누구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389b) 일반 개인ἰδιώτης들이 통치자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환자가 의사ἰατρός를 상대로, 신체 단련 수련생이 체육 담당자παιδοτρίβης를 상대로, 선원이 선장κυβερνήτης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과 똑같다.(389c)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를 붙잡으면 전문가οἳ δημιοεργοὶ이건, 예언자μάντις이건, 의사이건, 목수이건 벌을 줘야 한다. 그들은 마치 배를 전복하듯 나라를 전복하고 파괴할 그러한 관행ἐπιτήδευμα을 들여오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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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가 청소년들을 위한 시가 교육 단계에서 거론하는 덕목들은 기초적인 수준에서 장차 수호자들이 갖추어야할 덕목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아직 수호자를 선발하기 이전 단계이므로 최소한 시민이자 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 즉 용기와 절제가 먼저 다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용기에 이어 절제를 다루기 전에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용기와 절제 외에 정직도 별도의 덕으로 추가하려는 것일까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별도의 논의로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그곳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자.

* 아무려나 이 부분은 시작부터 현대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오늘날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경악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내용 즉 ‘통치자는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또 거짓말 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통치자에게만 허용된다’는 도발적인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의의 전후 맥락에 상관없이 통치 권력자와 거짓말이라는 주제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그 내용만 따로 떼어져 20세기 포퍼(K. Popper)를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플라톤 정치철학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폭로하는 핵심 근거로 자주 인용 되어 왔다. 사실 자유주의가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현대의 독자들이 이 부분을 접하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어쩌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적 정치권력이 저질러온 수많은 거짓과 위선, 폭압에 대한 뼈저린 역사적 경험 위에서 소수 정치권력에 대한 다수의 견제와 의심을 토대로 성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둘러싼 그러한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서, 일단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통치자와 거짓말에 대한 플라톤의 주장만 들여다보자면, 플라톤이 제1권 이후 시종일관 내건 주장들과 비교해서 특별히 도발적이라거나 새롭다고 할 만한 내용은 없다. 플라톤은 줄곧 통치술을 일반적인 전문 기술에 상응하는 것 즉 정치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을 동일한 성격의 앎으로 등치시켜왔는데,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이곳에서의 주장 또한 내용적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제1권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를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의 관계 즉 전문기술자와 그 기술 대상의 관계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계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자는 기술 대상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그 나라의 통치자들ἄρχων τῆς πόλεως(389b)’이란 말 가운데 ‘통치자들’은 비록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더라도 맥락상 제1권에서 언급된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간취할 수 있고, ‘그 나라’ 역시 그러한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나라 즉 앞으로 제기될 정의로운 나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통치자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현대의 독자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위와 같은 플라톤의 기본 설정을 배제하거나 간과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거짓말은 기본적으로 나쁘다. 플라톤도 당연히 그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누구를 막론하고 현실의 삶에서 불가피하게 거짓말이 필요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사실 거짓말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군인이 적을 속이기 위해, 의사가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다못해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일상의 다반사이고 또 그런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부당하다고 문제 삼는 사람도 없다. 제1권에서 언급된 미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말을 용인하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특히나 거짓말의 용인 수준과 관련하여 나랏일과 관련하여 통치자가 행하는 거짓말과 그 밖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상의 선한 거짓말을 결코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만큼 통치자의 경우는 거짓말의 해악을 분별해내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잣대가 무엇이고 그 엄격성의 객관적 근거를 누가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플라톤은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사람들 모두 관련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를 내세우듯이,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도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즉 최상의 통치 전문가를 그 잣대로 내세운다. 요컨대 통치자의 거짓말이 초래하는 위험성이 위중하고 중차대한 그 만큼 아무나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통치의 기술과 도덕, 지성의 전 영역에서 철저히 훈련된 고도의 전문가 즉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자격을 가진 자에 한해서만 거짓말의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독극물의 경우 그것이 위험한 그 만큼 최고의 독약 전문가에 한해 취급이 인가되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최소한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 기술과 객관적 보편성 내지 정치 전문가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나랏일과 관련하여 거짓말이 요구될 경우, 권력의 자의적 독단을 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다수의 합의에 의해 정해진 법과 제도에 따라 검증되고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플라톤은 정치야말로 가장 중대한 영역인 만큼 그 어느 영역에서보다 최고의 정치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근세 이래 자유주의자들은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예외적으로 전문가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플라톤이 가장 정치에 비전문가라고 폄하하고 있는 대중에게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이곳에서 통치자의 거짓말과 관련한 플라톤의 주장은 정치의 기술 즉 통치술과 일반 전문 기술을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 자신의 기본 전제에서 나온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정치철학이 그의 지식철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인식 능력을 토대로 성립한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정치적 지식의 객관성과 그것의 구현이 철학자라는 사람을 통해서 담보되고 관철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역사 이래 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가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백안시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근본적으로 지향하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정치의 지성화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정치철학을 인치인가 법치인가의 잣대로 양자택일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 온전한 이해 방식도 아니고 적합한 논의 방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말년의 저작 <법률>에 이르러서도 하나같이 정치의 지성화를 목표로 삼아 <국가>에서 강조한 인치의 측면에 더해 법치를 함께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치와 관련해서도 1인의 철학자 대신 ‘야간위원회’hoi nyktōr syllegomenoi, nykterinos syllogos(<법률> 908a, 909a, 968a)라는 다수의 철학자 집단에 최고의 정치적 결정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치이건 덕치이건 간에 플라톤 정치 철학적 지향과 목표가 본질적으로 정치의 지성화에 있는 한, 그의 제안들은 정치철학 일반에서는 물론 구조적으로 늘 포퓰리즘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의 입장에서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찰해보아야 할 철학적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곳 논의 부분의 주제는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통치자와 일반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 정직이 왜 중요하고 귀한가에 대한 문제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직의 문제로 돌아가 일반 개인들이 정직하지 않았을 때 나라가 어떠한 위험에 처하고 그에 따른 처벌이 왜 마땅한지를 언급한 연후, 바로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389d]

*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에게 왜 절제σωφροσύνη가 요구되는지 어떤 면에서 대중에게 절제가 가장 중대한지를 묻는 방식으로 아래와 같이 절제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즉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은 통치자들에 대해 순종하는 것ὑπήκοος 그 반면 주색πότος καὶ Ἀφροδίσιος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ἡδονή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ἄρχων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시가에서 그런 모습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을 훌륭한καλός 사람들이라고 언급하고 그와 관련된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해가면서 바람직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해가며 하나하나 비평을 가한다.

 

[389d-391d]

*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을 내용적으로 순서에 따라 분류하면 아래와 같다. (인용 사례의 구체적 내용들과 전거는 텍스트와 주석 참고) 1) 디오메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순종 2) 아킬레우스(389e) – 지휘관에 대한 불손 3) 시인(389e) – 통치자에 대해 함부로 말함νεανίευμα 4) 에우륄로코스((390a-b) – 식욕을 인내καρτερία하지 못함(참지 못함) 5)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 성욕을τὴν τῶν ἀφροδισίων ἐπιθυμίαν 참지 못함 6) 오뒷세우스 – 분노를 참지 못함 7)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 재물욕φιλοχρήματος을 참지 못함 8) 아킬레우스(391a-c) – 신에 대한 불손ἀπειθής과 오만ὑπερηφανία 9)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 -무서운 겁탈 10) 기타 신의 아들, 영웅들의 무섭고 불경한δεινὰ καὶ ἀσεβῆ 짓들(39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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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에서 절제를 다루고 있는 이 부분의 논의를 살피기 전에, 앞서 언급한 대로 왜 소크라테스가 절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불쑥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끌어들였을까, 그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했듯이 이곳 정직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바로 뒤에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직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음미해보자. 앞서 소크라테스는 정직을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 후 바로 통치자 이외에 누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의 초점은 전후 문맥상 통치자의 거짓말 권한 여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라와 일반 개인들 모두에게서 정직이 왜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마치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처럼 환자가 정직하지 않으면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것처럼 통치자와 사인들의 관계에서도 사인들이 정직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통치자들이 일반 개인들의 이익에 종사하는 전문 통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인 한, 사인들은 자신이 처한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허위 진술, 허위 보고는 생사의 문제를 오가는 질병과 항해, 전쟁 영역에서 죽음과 불행과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즉 정직은 통치자와 사인들 간의 참된 관계를 성립시키는 필수 조건이자 나라와 개인의 안전과 질서를 담보하는 선결 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통치자와 사인들의 참된 관계는 의사와 환자, 선장과 선원, 지휘관과 병사의 참된 관계가 그래야 하듯이 구체적으로 통치자들에 대한 사인들의 순종 즉 지배와 피지배관계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해서 순종이 사인들의 예속과 희생이라고 오해되어선 안 된다. ‘정직’으로 옮긴 ἀλήθεια(alētheia)는 여기서는 거짓말과 대비하여 그렇게 옮겼지만, 그 말은 ‘정직’(frankness)의 뜻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진리’, ‘진실’, ‘참됨’이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서로 다른 여럿의 관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화가 이루어지려면, 그리고 모두가 받아들이는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조화에 참여하는 여러 구성 요소들이, 마치 도가 도답고 미가 미답고 솔이 솔다워야 도미솔 화음이 이루어지듯, 모두가 다 서로에게 진실해야 하고 자기다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순종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이익이 통치자를 통해 구현된다는 앎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참여와 합의 그리고 질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순종하는 근거로서 참된 앎에 통치자 역시 순종해야 한다는 점에서 순종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 이전에 참된 앎과 그것에 따르는 구성 요소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정직에 이어 절제를 다루면서 곧바로 절제의 가장 중대한 면면의 하나로 무엇보다도 통치자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정직에 대한 논의는 이어지는 절제에 대한 논의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관점은 이곳의 논의와 나중에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용기와 절제에 대한 논의를 지나치게 일대 일로 대응시키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정직에 대한 논의는 거짓말을 일삼는 시인들에 대한 경고를 담은 별도의 논의, 즉 나라에서 거짓말은 통치자 이외에 허용될 수 없음을 밝히는 방식으로 특별할 것 없는 일반 개인으로서 시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환기시키려는 의도를 담은 일종의 삽입일 수도 있다.

* 아무려나 이제 소크라테스는 시인들이 시가를 지으면서 영웅들과 관련하여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용기에 이어 절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통치자에 대한 순종으로 설명함과 동시에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된 쾌락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다시피 이곳에서의 절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행태 위주로 매우 구체적이다. 이것은 절제에 대한 이곳에서의 논의가 앞서 용기의 경우가 그랬듯이 나중 본격적으로 다루어질 보편적인 규정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논의의 예비적 성격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 앞서 정직에 대한 논의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절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구성요소 또는 개인의 내적 구성 요소들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절제는 강해 초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원래 군사 용어에서 나왔다. 그리스 육군의 기본 전술은 창과 방패를 들고 견고한 대오를 유지하며 전진하는 팔랑크스(phalax) 전법이다. 이 전술은 단순히 병사 각자의 개인적 능력만 가지고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아무리 상대적으로 강한 병사가 있더라도 대오를 벗어나 혼자 전진하려 들면 밀집대형은 흐트러져 패배에 직면할 수 있다. 각 병사는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되 밀집대형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병사와의 관계 내지 전체 대오를 늘 염두에 두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며 전체 대오 유지를 위해 시시각각 들려오는 지휘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군인이라면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원칙이자. 지휘관과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존중하고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인 합의이다.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말하는 절제 즉 통치자에 대한 순종은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앎과 그것을 구현하는 자발적 실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중에 본격적으로 정의(定義) 차원에서 절제를 다루면서 그러한 바람직한 관계의 구현으로서 절제를 ‘질서’κόσμος 인 동시에 ‘쾌락과 욕망의 억제ἐγκράτεια’로 표현(430e)하기도 하고 ‘강한 소리, 약한 소리, 중간 소리의 협화음συμφωνίᾳ, 화성ἁρμονίᾳ’(430e, 432a)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그리고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절제를 주색이나 먹는 것과 관련한 쾌락에 대해서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들로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개인의 내적 관계에서 관철되어야 할 바람직한 지배와 피지배관계를 담고 있는 말이다. 즉 개인 차원에서 절제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유혹을 자신 안에 있는 다른 힘으로 그것을 제압하는 것 즉 지배를 관철시켜 그 유혹을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플라톤은 이와 관련해서도 나중에 본격적으로 절제를 언급하면서 절제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κρείττω αὑτοῦ’이라고 말한 후 그것을 ‘혼과 관련해서 인간 자신 안에서 한결 나은 것τὸ βέλτιον과 한결 못한 것τὸ χεῖρον이 있어서 성향상φύσει 한결 나은 부분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430e-431a). 즉 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건 개인적인 차원에서건 어느 구성요소가 어느 구성요소를 지배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즉 일종의 지배관계에 대한 합의ὁμόνοια’(432a-b)인 것이다. 아무려나 절제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대 그리스 사회가 늘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오면서 그것의 극복을 위한 전사 공동체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일단 여기서 절제에 대한 논의는 젊은이들에 대한 시가 교육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기존 시가에서 영웅들을 무절제한 사람으로 잘못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실린 영웅들의 무절제한 행태들은 나중에 절제가 무엇인지를 다루 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부분의 절제에 대한 논의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추후 다루어질 정의(定義) 차원에서의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을 갖는다 할 것이다. 우선 이곳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웅들의 무절제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크게 통치자에 대해 순종하지 않는 행태들과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로 나누어진다. 특히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는 행태들은 장차 수호자들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유혹의 종류들 다시 말해 플라톤이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쾌락의 실체들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불순종과 무절제와 관련된 구체적 행태들을 소크라테스가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신화 속 내용과 사례들에 대응시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 1) 디오메데스(389e)와 아킬레우스(389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지휘관에 순종하지 않거나 불손한 행위를 담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절제가 한결 나은 것에 대한 한결 못한 것들의 순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불순종과 불손은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 젊은이들과 수호자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무절제 행태들이다. 2) 에우륄로코스((390a-b), 제우스, 아레스와 아프로디테(390c), 오뒷세우스(390d), 헤시오도스, 아킬레우스(390e)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절제하기 힘든 인류 공통의 유혹들을 담고 있다. 그 첫째는 생물학적 욕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식욕과 성욕이고 사회적 욕망 차원에서 형성된 것으로 분노와 재물에 대한 욕망이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분노와 재물욕 모두 개인 내면에 자리한 ‘한결 못한 혼에 대한 한결 나은 혼의 지배’가 관철되지 못한 상태 즉 바람직한 혼의 내적 관계가 전도된 상태에서 나오는 무절제한 행태들이다. 그리고 3) 아킬레우스(391a-c), 테세우스와 페이리투스(391c-d) 관련 이야기 : 이 이야기들은 불손과 오만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다룬 불순종과 상통하는 것이지만 앞서의 불순종이 사람에 대한 불순종인데 비해 여기서의 불순종은 신에 대한 불손과 오만으로서의 무절제라고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직이 절제와 직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경건 또한 절제와 직결 되어 있다. 경건 또한 신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기타 이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부분 몇 가지를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1) 390b에서 ‘자제(自制)’로 옮겨진 ἐγκράτειαν(enkrateia)는 여기서는 절제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가면 enkrateia가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외적인 강제와 두려움에 의해 억지로 참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서 여기서 참된 앎에 기대 자발적으로 참는 것으로서 절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2) 391a에서 플라톤은 호메로스에 대한 비난을 일부 유예하고 있는데 이것은 플라톤이 기존 신화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전적인 부정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391c에서 ‘자신 속에 두 가지 상반된 병폐ἐναντίος νόσημα로 재욕에 따른 옹졸함ἀνελευθερία과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함ὑπερηφανία이 거론되고 있는데 옹졸함과 거만함이 갖는 상반성이 우리말 역어로는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옹졸함에 해당하는 원어가 예속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재물에 대한 옹졸함은 재물에 대한 예속을 뜻하고 신들 및 인간들에 대한 거만은 신들과 인간들에 대한 방종과 오만을 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상반성이 보다 더 잘 이해가 된다. 한결 나은 것의 한결 못한 것에 대한 지배관계가 관철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 둘은 동일하게 심적 동요상태ταραχή 즉 무절제에 해당한다.

 

[391e]

* 이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관련한 사례들을 마무리 하면서 시인들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들이 나쁜 일들을 생기게 하며 영웅들도 보통 사람들 보다 조금도 나을βελτίων 것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들은 앞서 말했듯이 경건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으며οὔθ᾽ ὅσια ταῦτα οὔτε ἀληθῆ 그것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쁜데 대해 관대συγγνώμη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사악함πονηρία에 대한 무신경εὐχέρεια이 생기지 않도록 그런 이야기들은 말하지도 들려주지도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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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웅들과 관련된 무절제한 사례들은 모두 시가에 실린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 부분 역시 기본적으로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시인들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시인들이 그려낸 신과 영웅들의 무절제한 모습은 그 자체로 거짓말이기도 하거니와 내용적으로 젊은이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사악함에 대한 무신경을 생기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그런 신화는 짓는 것도 말하는 것도 들려주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을 들려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통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을 들려주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규범도 함께 논의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곳에서도 시가 비판과 더불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절제의 기본적인 내용도 함께 드러나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곳 논의 역시 절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적 논의의 성격 또한 함께 갖고 있다.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1-1-4 인간들에 관한 것(386a-391e)

 

[392a]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그 내용적 규범을 정하는ὁρίζω 것과 관련하여 신들과 관련한 논의에 이어 영웅들과 관련한 논의까지 모두 마무리 되었다고 선언한 후, 이제 인간ἄνθρωπος들과 관련한 논의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인간들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시가를 통해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와 관련한 규범을 세울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관련하여 시인들이 잘못 말하고 있는 내용은 아테이만토스 형제가 소크라테스에게 이미 토론의 근본 주제 답변을 요구했던 것들이다. 즉 그 내용은 ‘부정의한 자들ἄδικοι은 다수가 행복한εὐδαίμονες 반면 정의로운 사람들δίκαιοι 은 다수가 비참하고ἄθλιοι 또한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들키지 않는 한, 이득이 되나λυσιτελεῖ 정의는 남에게 좋은 것ἀγαθόν이되 자신에게는 손해ζημία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에 관한 문제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의에 관한 모든 논의가 마무리된 다음에나 제대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이므로 합의는 그 때로 미루고 시가 교육과 관련하여 무엇을 말할 것인가ἅ λεκτέον의 문제는 이것으로 끝내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이제 논의는 시가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이어 시가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ὡς λεκτέον에 대한 문제 즉 이야기 투λέξις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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