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㉖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㉖
*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대안의 구축을 요구하기 위해 트라쉬마코스가 내건 부정의한 현실 그대로를 그 실질적인 내용의 측면에서 실감나게 되살려 낸다. 논의를 시작하면서 정의가 세 가지 ‘좋은 것’τὸ ἀγαθόν, to agathon들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 역시 소크라테스적 정의의 본질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른 한편 당대의 아테네 현실이 그러한 소크라테스적 정의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려는 사전 포석의 성격을 갖고 있다.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엄밀론에 입각한 개념적인 차원에서 부정의가 갖는 그 자체로서의 한계에 대한 논리적 논파가 아니다.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의 통치자가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트라쉬마코스의 양치기 기술이 엄밀한 의미의 양치기 기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트라쉬마코스의 지혜가 능가 불가능한 엄밀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는 이유로 각각 거부되고 논파되었지만, 트라쉬마코스의 혼 속에서 작용하며 끊임없이 부정의를 생산하는 힘(dynamis, 351e, 358b)들은 결코 그러한 이유만으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부정의는 엄밀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제멋대로의 이기적 욕망을 등에 업고 우리의 피폐한 현실을 지배한다. 오히려 일상적 부정의의 양태들의 경우 대부분 논리적으로 어설프고 애매하며 얼마간은 합리적이고 얼마간은 불합리한 것들이 그 근간을 이룬다. 현실은 기본적으로 반대적인 것들이 엉켜있는 무규정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결국 자신이 펼친 논증 방식이 갖는 한계를 받아들인다. 제2권에 들어와 소크라테스와 대화자 모두가 이제 목표로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의 논리적 규정 차원에서의 정의만이 아니다. 그에 못지않은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현실 차원에서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부정의한 자들의 혼속에서 그 자체로서 현존하며 최대의 작용력을 발휘하는 실질적인 부정의에 대한 혁파이자 그것을 담보하는 실질적인 정의론의 구축이다. 이에 따라 글라우콘은 현실 차원에서 부정의한 자들의 혼속에서 하나같이 정의와 정반대의 힘으로 작용하는 그 자체로서의 실질적인 부정의 즉 현실에서의 부정의의 극단치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전면적 혁파를 요구한다. 그 극단적 부정의의 현존이 정의 자체에 의해 그 자체로 부정되는 것이야말로 곧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형상적 기술에다 붙였던(342a. ‘기술 자체’ἐν αὐτῇ τῇ τέχνῃ, ‘의술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 ‘그 자체’αὐτὴ라는 말이 이제 제2권에서는 글라우콘에 의해 현상계의 영역 즉 현실에서 성립 가능한 정의와 부정의의 양 극단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358b. ‘그 각각(정의와 부정의)이 혼 안에 깃들임으로써 그 자체로서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τί τ᾽ ἔστιν ἑκάτερον καὶ τίνα ἔχει δύναμιν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ἐνὸν ἐν τῇ ψυχῇ, 367d. ‘그 자체로 그것을 지니고 있는 자’ὃ αὐτὴ δι᾽ αὑτὴν τὸν ἔχοντα) 이제 플라톤의 기획에 따라 제1권의 엄밀론이 마무리되고 글라우콘을 통해 제2권의 현실론이 개시되면서 부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논파의 장은 물론 정의에 대한 실질적인 구축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 그러나 글라우콘이 제시한 부정의 최대 극단치는 비록 현실의 부정의를 토대로 한 것으로서 그것에 대한 혁명적 대안으로서 소크라테스적 정의관의 극명성을 드러내는 잣대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트라쉬마코스가 내건 부정의한 현실의 실상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부정의는 부정의 찬양론자들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부정의의 경우들보다 어쩌면 겉으로는 정의 찬양론을 표방하면서 실제적으로는 하나같이 부정의한 경우들이 더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부정의의 실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아데이만토스는 동생 글라우콘의 문제제기에 이어 현실에서 펼쳐질 수 있는 다양한 부정의의 사례들을 당대 아테네 현실을 토대로 다각적으로 펼쳐낸다. 그야말로 두 형제를 통해 현실의 부정의 양상들 모두가, 소크라테스가 물리치고 극복해야할 대상이자 새로운 정의론의 구축을 위한 터파기의 대상들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이 왜 혁명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는 그의 정의론이 엄밀한 규정 차원에서 정의가 갖는 전면적 보편성뿐만 아니라 현실 차원에서 이와 같은 부정의가 노정하는 실질적 전면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당대 아테네의 현실상으로서 앞서 분류한 것들 가운데 <C. 비주류 신비주의 밀의 종교 생활 영역>에서의 부정의의 실상에 대해서는 앞서 예고한 대로 좀 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363c와 364d에서 언급되고 있는 무사이오스와 그의 아들은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교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인물들이다. 무사이오스는 오르페우스의 제자 또는 동료로, 그의 아들 에우몰포스(Eumolpos)는 엘레우시스 비의(秘儀, τελετή)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리스의 종교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신화를 통해 전승된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앙이다. 그런데 7세기 이후 점차 다소 이질적인 신비주의적 전통이 아테네로 유입되면서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아테네의 피폐한 현실을 배경으로 다양한 신앙 양태들이 특히 민간 신앙 영역에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 못지않은 영향력을 갖기에 이른다. 오르페우스교와 엘레우시스 비의는 그러한 신비주의 전통의 신앙 양태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들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이 두 종교 전통 모두 올림포스 종교에서는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은 수난과 부활, 이승과 저승, 영혼과 육체의 분리, 혼의 불멸에 대한 상념과 믿음을 신조의 근본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 물론 올림포스 종교에서도 디오뉘소스는 주어진 운명을 감당하면서도 두 번이나 다시 태어나 마침내 신적 영원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온갖 수난을 이겨낸 상징적인 사람으로서 아테네인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상징으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그 구원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적 영원성이고 이른바 이승과 저승의 분리 그리고 이승에서의 행위에 대한 저승에서의 인과응보에 대한 관념이나 혼의 불멸에 대한 상념은 그렇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전쟁을 치루며 영웅적인 삶을 살고 영예로운 기억 속에서 영원성을 획득하는 일부의 귀족들을 제외하면, 소박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 만큼 사후 세계와 혼의 불멸에 대한 소망은 점차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육체적 고통을 운명으로 안고 살아간 트라케 지방 광산노예들의 경우, 디오뉘소스처럼 운명을 잘 감당하여 신적 지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 죽은 후에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본능수준의 열망을 반영한 지고의 믿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디오뉘소스 신앙은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 라우리온 지방에서 은광이 발견된 이후 트라케 사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디오뉘소스 신앙에 기반한 오르페우스교가 민간 신앙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특히 오르페우스교에서 디오뉘소스는 올림포스 전통에서의 디오뉘소스와 달리 근동의 영향을 받아 자그레우스 영혼의 현신으로 일컬어지면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수난과 부활의 상징으로서 크게 추앙을 받았다. 무엇보다 오르페우스교는 디오뉘소스의 수난과 부활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과 관련하여 혼의 불멸과 정화, 저승에서의 인과응보,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을 근본 신조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 올림포스 종교에서의 디오뉘소스 신앙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미 오르페우스부터가 저승에 갔다 이승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 오르페우스교가 전하는 자그레우스 신화에 따르면 디오뉘소스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제우스가 디오뉘소스에게 자신과 같은 지배자의 지위를 부여하려 하자 티탄족이 그것을 시기하여 디오뉘소스를 찢어 삼켰다고 한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제우스가 티탄족을 번개로 태워 죽였고, 채 삼켜 지지 않은 디오뉘소스의 심장으로 디오뉘소스를 다시 되살려 낸다. 그리고 인간은 그 때 티탄의 몸이 타버려 남긴 재로부터 생겨났다. 이에 따라 인간은 디오뉘소스의 몸에서 나온 재로 인하여 신적인 영혼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티탄의 몸에서 나온 재로 인하여 육체를 갖게 되면서 끊임없이 육체라는 티탄적 굴레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 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비밀스런 입교의식을 통해 자기 정화를 수행해야 하며 그 정화가 온전히 완성되어 순전한 혼으로서 별로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정화의 정도에 따라 죽은 다음 인과응보의 대가를 치루고 다시 또 윤회전생을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르페우스교는 올림포스 종교의 디오뉘소스 신앙에 바탕을 두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전통 올림포스 신앙에는 없었던 영육의 분리와 혼의 불멸, 윤회전생에 대한 믿음을 아테네에 뿌리내리게 한 근본 배경이 되면서 플라톤의 철학은 물론 훗날 신의 아들이 겪는 수난과 부활, 저승에서의 심판과 혼의 불멸과 관련하여 기독교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주요 사상적 흐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물론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오르페우스교를 보다 합리적인 차원에서 계승하고 개혁했다고 평가되는 피타고라스 교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의 비밀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감정적인 체험들과 광란적 행위들에 대해 늘 비판적이었던데 반해 오르페우스교의 정화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감정적 요소들 대신 이성을 통한 정신의 고양을 정화의 근본 바탕으로 발전시킨 피타고라스 교단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크게 동감을 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르페우스교는 플라톤이 우려한 대로 기원전 5세기말 피폐한 아테네 현실을 극복하는데 기여하기보다는 이곳에서(364e-365a) 언급되고 있듯이 물질주의에 편승하여 입교 의식(비의秘儀, τελετή)을 기복 신앙과 세속적 서원과 면죄의 방편으로 이용함으로써 아테네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 엘레우시스 신앙 역시 비록 오르페우스교와 같은 교단의 성격이 아니라 지모신(地母神) 데메테르를 모시는 정기적인 제의의 성격을 가지면서 수확과 생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 신앙의 근저에는 저승으로 끌려갔음에도 이승과 저승을 정기적으로 오고 가는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에 대한 믿음과 하데스로 납치된 이후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다 엘레우시스에서 비의를 통해 켈레우스 왕의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려고 했던 데메테르의 비의에 대한 믿음이 근본 신조로 자리 잡고 있다. 요컨대 엘레우시스 비의 역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페르세포네적 삶에 대한 소망과 불사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민간 영역에서 제의와 기복신앙의 형태로 아테네에 뿌리내렸지만 오르페우스교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5세기말 아테네의 현실을 피폐화하는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여기에서 플라톤에 의해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1-3-2. 젊은이들이 직면하게 될 번민과 갈등[365b-366b]
*아데이만토스는 이상과 같이 언급한 후, ‘이 모든 언급을 젊은이들νέων이 듣고 마치 날아서 옮겨 앉듯 스치고 이것들을 근거로 자기가 어떠한 사람으로 되어 어떻게 살아감으로써 인생을 가장 훌륭하게 완주하게πορεύω 될 것인지를 능히 결론 내릴 수 있는συλλογίσασθαι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에 관해 서술하기 시작한다. 아테네 젊은이들 모두 마치 핀다로스가 말한 것처럼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자문자답 즉 스스로 묻고서 스스로 대답할 법하다는 것이다.
그 자문자답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자문 1> ‘높은 성벽τεῖχος으로 오르기 위해 정정당당해야 할까 아니면 부정한σκολιός 속임수ἀπάτη를 써서라도 성벽에 올라 성채 안에서 안전하게 일생을 보낼까?’περιφράξας διαβιῶ[365b]
<자답 1> 사람들은 실제로는 정의롭지만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면 아무런 이익도 없고 고역과 손해만 있다고 하지만 현자들이 일러주듯 ‘보이는 것(평판)τὸ δοκεῖν이 진실을 제압하고 행복을 좌우하니 보이는 것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다. 앞쪽과 외양은 훌륭함의 음영화σκιαγραφία로 빙 둘러 그려놓되 뒤로는 가장 지혜로운 아르킬로코스의 이악하고 교활한 여우를 끌고 다녀야만 한다. [365c]
<자문 2> 어떤 이는 나쁘면서도 언제까지나 남의 눈을 피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고 말한다.[365c]
<자답 2> 큰일 치고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정치적 결사συνωμοσία나 당파ἑταιρεία를 결성할 수도 있다. 설득의 교사에게 대중연설δημηγορική과 법정변론δικανική의 지혜를 배워 말로 설득하거나 폭력βιά을 행사하면 욕심을 부리고서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365d]
<자문 3> 어떤 이는 신들의 눈을 피한다거나 신들에게 폭력을 쓴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365d]
<자답 3>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들의 눈을 피하는데 마음 쓸 이유가 없다. 신들이 존재한다면 관습들τῶν νόμων 그리고 시인ποιητής들이 일러준 대로 신들은 제물과 서원, 봉납물에 의해 마음이 동하므로 그것들로 신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면 된다. 이들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믿지 않거나 해야만 하는데 만약 믿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부정의를 저질러야 하며 그런 짓으로 재물을 얻어 공물로 바쳐야만 한다. 정의로울 경우 신들한테 벌을 받지 않을 뿐이지만, 부정의는 갖가지 이득을 가져다준다. 도가 지나친 짓을 하고ὑπερβαίνοντες 잘못을 저질러도ἁμαρτάνοντες 탄원을 하여 신들의 마음을 움직여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면 된다.[365d-e]
<자문 4> 어떤 이는 이승ἐνθάδε에서 부정의하면 저승Ἅιδης에서 자신 아니면 자손들이 벌을 받는다고 말한다.[366a]
<자답 4> 입교의식과 사면해 주는 신들이 크게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강대한 나라들이 주장하는 바이고 신들의 자손인 시인들, 예언자들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36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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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자문자답은 당대 아테네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민과 갈등의 내용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마치 날아서 옮겨 앉듯 이것을 근거로 …결론 내릴 수 있는’은 꿀벌들이 빠른 움직임으로 꽃가루들을 수집하여 꿀로 만들어 내는 것에서 착안한 표현으로서 젊은이들이 갖는 높은 수준의 지적 흡입력과 감수성을 표현한 말이다. ‘결론을 내리다’로 옮긴 συλλογίζομαι는 여러 전제들을 토대로 결론을 내리는 추론행위를 나타내는 말로 오늘날 삼단논법(syllogism)의 어원이 되는 말이다.
* 위의 젊은이의 자문자답은 사회진출을 앞둔 당대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심적 갈등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오늘날 사회진출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일반 젊은이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비록 장래에 관한 문제는 고금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의 공통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의 젊은이들은 명문 가문 내지 귀족 계급에 속하는 젊은이들로서 당대 일반적인 경향이 그랬고 청년 플라톤도 그랬듯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정계 입문을 앞둔 젊은이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고사하고 다만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그 생존 자체를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되는 젊은이들은 장차 폴리스의 미래를 좌지우지하게 될 명문가 자제들로서 정계 입문을 목전에 두고 장차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세상 권세와 평판의 문제를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는 자들이다. * 어떤 사람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세상권세와 평판에 대한 이곳에서의 젊은이들의 고민과 유혹을 공생애를 앞두고 예수가 광야에서 맞이하고 있는 시험과 비교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 누구를 막론하고 지도자로 세상에 나설 사람이라면 세상 권세와 재물, 평판의 문제는 그 스스로 넘어서야할 가장 큰 시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자답 1>에서 현자들οἱ σοφοί은 4세기말 시인들의 선조격에 해당하는 시모니데스 등을 가리킨다. 365c에 인용된 ‘보이는 것이 진실을 제압하며’ 또한 시모니데스의 말이다.(단편 598 Campbell) 음영화σκιαγραφία는 음영을 부각시켜 사물을 표현하는 일종의 스케치화로서 이곳에서는 가식과 환영의 의미를 갖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여 지고 있다.
* <자문 1>에서 성벽으로 옮긴 τεῖχος는 성채의 의미도 갖고 있다. 높은 성벽은 말 그대로 높은 지위와 권력을 의미한다.
* <자답 2>는 당대 젊은이들이 얼마나 소피스트들의 영향 하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얼마나 연설을 잘 하느냐와 어느 권력가에게 줄을 서느냐는 당대 출세를 꿈꾸는 명문가 청년들의 최우선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설득이 안 되면 음해성 소송을 걸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일 또한 기원전 5세기 말 아테네 현실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정치적 결사와 당파, 대중연설과 법정변론이 옳고 그름의 잣대가 되어 있는 현실은 오늘날의 부정한 정치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자답 3>은 이미 무신론적 사고가 아테네 현실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젊은이들에게 신들은 더 이상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관습과 시인들이 지어낸 존재들이다. 그러한 한 종교는 물신주의에 기초한 세속적 서원과 기복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 양쪽 다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어느 쪽도 믿지 않거나 해야 한다는 것은 시인과 관습들 모두 내용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은 한 통속의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면 부정의를 저질러야 한다’는 말 또한 당대 시인과 관습들이 얼마나 현실 부정의의 토대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 <자문 4>, <자답 4> 역시 당대 종교가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최고 강대국 사회에서 얼마나 물신주의, 기복주의에 물들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른바 일부 신들이(제우스, 디오뉘소스, 헤카테, 데메테르 등) ‘사면해주는 신들’로 따로 지정되어 불리게 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이다. 앞서도 살폈듯이 저승에서의 인과응보 사상은 전통 올림포스 종교에서 보다는 이른바 비주류 전통으로서 신비주의 오르페우스교가 아테네에 자리 잡으면서 광범위하게 유포된 사상이다. 예언자들προφῆται에는 국가가 신전사제로 임명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민간 일반에서 시인들에 대한 앎을 내세워 예언자로 자처하며 금전과 물품을 대가로 서원을 풀어주며 생계를 유지하던 수많은 탁발승들 등 사이비 사제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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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데이만토스는 기원전 5세기 말 당대 아테네의 사회 현실 곳곳에 편만해있는 정의의 전도 현상과 사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후에 그러한 당대 현실에 대한 젊은이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당대 현실이 처한 심각성을 총체적으로 다시 종합 정리 평가하고 있다. 당대 현실이 가져다주는 위기 국면이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것임에도 아테이만토스가 유독 젊은이들의 생각을 전면에 내세워 논의를 총론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데는 다분히 플라톤의 의도가 숨어 있다할 것이다. 요컨대 아테네의 정의의 전도현상이 아테네가 맞이한 절체절명의 위기국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 아테네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의 위기를 의미하고 또 장차 아테네의 위기가 극복되어야 한다면 그 또한 그 누구보다 젊은이들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젊은이들은 장차 사회 지도자급 역할을 수행해야 할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논파하고 규정에서나 실질적 힘에서나 정의를 바로 세우려면 그 무엇보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주장들로부터 격리시키고 왜 그들과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왜 그렇게 살면 안 되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토스가 보기에, 현실은 소크라테스의 기대와 정반대로 젊은이들 대부분이 트라쉬마코스 부류가 주장하는 생각들과 처세관에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새로운 정의론의 구축을 요구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입장에서는 당대 젊은이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을 소크라테스가 답변해야할 안티테제로 있는 그대로 극명하게 제시하는 것이고, 소크라테스로서는 그 무엇보다 그러한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의와 정의로운 삶에 대한 참된 앎을 일깨우고 그러한 앎을 평생을 통해 견지해나갈 수 있는 굳건한 방편과 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해내는 것이었다.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의 문제제기가 마무리된 후에 소크라테스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요구에 대한 답변으로 문자의 비유를 통해 정의론을 새롭게 구축하면서 다름 아닌 수호자 교육 즉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젊은이들을 철학자로 키워내는 교육 프로그램과 그러한 철학자들에 의한 정치체제의 구축이야말로 플라톤이 종국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정의론의 요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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