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치[퍼농유]
5. 순치(馴致)
길들임이란 좋은 것이기도 하며 또 사악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 것이나 반면은 있다. 어린왕자가 여우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을 때 여우가 말하려는 것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사이가 좋아진다는 것이고 익숙해진다는 것이며 떨어져 지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길들여지기를 원한다. 날 길들여줘. 날 사랑해줘. 나에게 익숙한 사람이 되어줘. 그것이 편하고 안정된 것이다. 길들임을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순치(馴致)이다. 이 말은 <주역> 곤(坤)괘 초효 「상전」에 나온다.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르니, 음(陰)이 처음 응결한 것이다. 그 도(道)를 따라 점차적으로 이르러서(순치) 단단한 얼음이 된 것이다.”(象曰, 履霜堅冰, 陰始凝也, 馴致其道, 至堅冰也.)
여기서 순치는 서리가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얼음이 되는 과정을 말한다. 많은 유학자들은 순치라는 용어를 자연적 원리와 순서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사용해 왔다. 배움이던 사람과의 관계이던 다스림이던 모든 영역은 순치해야만 했다.
송대 성리학자인 정이천은 그래서 “도로써 순치해야지 강압적인 폭력으로 해서는 안 된다.”(蓋以道馴致, 不以暴爲之也.)는 말을 한다. 순치란 자연적 원리와 순서에 따라서 길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배움도 사랑도 정치도 강압적인 폭력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와 순서에 따라 점차적으로 길들이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때 의미를 얻는다. 이 자연의 원리와 순서를 무시하고 고원한 이상을 꿈꾼다는 것은 자기기만적 폭력이다.
그러나 순치의 어원적 의미는 좀 섬뜩하다. 순(馴)이란 길들이는 것이지만 정확히 말을 길들인다는 의미이다.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는 “말은 먼저 길들인 뒤에 양마(良馬)를 따진다.”(馬先馴而後求良)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잘 달리는 야생마일지라도 좋은 말일 수 없다. 먼저 잘 길들인 뒤에 순치시킨 뒤에 좋은 말이 된다. 양마(良馬)이다.
그렇다면 사람도 길들인 뒤에야 양순(良順)하고 선량(善良)한 사람이 된다. 양순하고 선량한 사람은 자연적인 자질과 품성이 아니라 길들여진 뒤에 따질 수 있는 인위적 결과일 뿐이다. 순치되고 길들여질 때 선량하고 양순한 사람이 된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쇠로 만든 우리’(Iron Cages)이라는 비유를 들면서 관료제의 문제점을 분석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사회가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보상과 희망 때문에 고정된 제도 속에 스스로를 속박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료제의 문제다. 순치되는 것이다. 근대 이후 자본과 국가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순치시키지 않는다. 생리(生理)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길들이는 것이다. 길들여진 우리는 관료제 사회를 편안하고 안정되게 생각한다. 결국 길들여진 사람들은 스스로 순치되기를 원한다. 날 사랑해줘! 제발!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되게 말들어줘! <장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연못에 사는 꿩은 열 걸음 만에 한 입 쪼아 먹으며, 백 걸음 만에 한 모금 마시지만 우리에 갇혀 길들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잘 먹고 잘 살테지만 새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食, 不蘄畜乎樊中. 神雖王, 不善也.)
우리는 ‘우리’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구시대를 마감하는 이때 구태의연한 관료제 우리에서 벗어나야할 때이다. 이제 우리에서 벗어나 야생의 자신을 찾아야 할 터이다. 순치되지 않은 야생마의 근성을 회복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원하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가 되고 싶다. 야생의 근성을 잃지 않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우리를 세워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를 길들여줄 사랑을 원한다. 사랑은 우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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