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판결문의 정치와 세월호의 정치 [더 맑스]
판결문의 정치와 세월호의 정치
김종곤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경. 박근혜의 탄핵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숨죽이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어 내려가는 판결문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일상적이지 않은 법률용어와 법률적 논리로 인해 결론을 예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의 ‘그러나’가 반복되면서 손에 땀이 흐르고, 조급한 마음이 들어 ‘그래서 결론이 뭔데?’라는 혼잣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피청구인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라는 간결한 문장이 읽혀지는 그 순간에야, 박수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통신을 통해 기쁨의 순간을 나눴다.
그랬다. 기뻤다. 스스로에게, 또 추운 겨울날 광장을 함께 메웠던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축하한다고 인사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이 날 만큼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지인들과 함께 축배를 드는 것이 투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성스러운 의식처럼 보였다.
그런데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을 즈음, 복기되는 내용이 있었다. 판결문을 들으면서 의아했고, 실망했고, 가슴 아팠고, 화났던 내용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이 난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말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 재난상황이 발생하였다고 하여 피청구인이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까지 바로 발생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 그런데 성실의 개념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성실한 직책수행의무와 같은 추상적 의무규정의 위반을 이유로 탄핵소추를 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요컨대, 재난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첫째,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위법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고 둘째, 박근혜의 대응이 성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더라도 ‘성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법리적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 탄핵을 물을 수 있는 사안에 해당하지 않는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문을 포함해 판결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에게 “직접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야 하는 등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위의무”가 세월호 참사 당시 발생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우리는 누구도 대통령이 재난상황 발생 시 현장으로 달려가 장비를 착용하고 직접 구조 활동을 하는 직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박근혜에게 따져 묻는 내용 역시 ‘왜 당신은 바로 팽목항으로 달려가 해경과 잠수부를 비롯한 인력들과 함께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냐?’가 아니다. 우리가 묻는 것은 대통령은 행정부의 최고권한자로서 국가 재난상황 발생 시 구난과 구조를 위해 국가의 재원이 원활하게 동원될 수 있도록 지휘감독을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상식적’이면서도 ‘법률적’인 의무에 대해서이다. 그것은 판결 전문(2016헌나1 대통령 박근혜 탄핵)에서도 인용하고 있듯이 우리 헌법 제10조와 판례(헌재 2008. 12. 26. 2008헌마419등 참조)가 확인하는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 의무를 다했는지 안했는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에 따라 실제로 이정미 재판관은 “피청구인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신체의 안전 보호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권한을 행사하고 직책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부담합니다.”라고 앞서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점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는지 그 행적을 따라가면서 검토하는 것이다. 박근혜가 성실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뭐라도’ 했는지를 묻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판결문 낭독에는 이러한 검토 내용은 없었다. 전문의 < 피청구인의 대응> 부분을 보더라도 대통령 측 주장만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열거하고 있을 뿐 그 주장이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한 판단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아주 기초적인 논리적 판단조차 수행하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의심이 든다. 더구나 전문에는 전원 구조 오보가 정정된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 50분 경 국가안보실은 “구조가 순조롭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학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방송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오후 5시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할 때까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어떠한 지휘감독을 했는지를 이들의 주장과 대조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조차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논리가 실종되어 있다.
재판관 김이수와 이진성의 보충의견(소수의견)을 보면 세월호 관련 내용이 파면사유에서 누락된 것이 더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헌법상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의무를 위반하였”다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읽었던 종합결론과 다르게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당시를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중대하고 급박한 위험이 가해지거나 가해질 가능성이 있는 국가 위기 상황에 해당함이 명백”하다고 보면서 그와 동시에 “피청구인은 상황을 신속히 인식하고 시의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국민의 생명, 신체를 보호할 구체적인 작위의무를 부담하게” 됨을 인정하고 있다. 즉, 헌법 제66조 제2항 및 제3항, 제69조(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 헌법 제34조 제6항(국가의 재해 예방과 국민보호), 국가공무원법 제56조(모든 공무원은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러한 판단은 어떻게 나왔는가? 이들(김이수, 이진성 재판관)은 박근혜 측의 주장에 대해 “위기상황의 인식”, “피청구인의 대처”로 항목을 나누어 살피고 있다. 간략하게 핵심 판단 내용만 전하자면 당일 박근혜가 집무실에 출근하였으면 오전에 이미 상황을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오보 때문에 대응이 늦었다는 박근혜 측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당일 박근혜의 지시라 해봤자 원론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지시 내용은 사실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명백한 성실의무 위반이자 작위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들 보충의견은 ①(전제)성실한 직책 수행의무 위반=탄핵사유 → ②(사실관계)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 성실/작위 의무 위반이라는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①, ②에 따라 탄핵사유로서의 부합성에 대한 판단, 즉 최종 결론은 ③‘탄핵사유가 된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의 결론은 너무나도 엉뚱하게도 “이 사유만으로는 파면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출처 : 프레시안 ⓒ사진공동취재단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5672)
도대체 이러한 판결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종합판결도 보충의견도 처음부터 세월호 참사는 파면 사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처럼 논리 없음과 모순을 감행하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날 박근혜의 탄핵사유 중 가장 핵심이 ‘기업의 자율성 침해’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에 대한 사안은 파면사유에 해당할 만큼 (판결문에서 반복하고 있는) “중대한” 사안이 아닌 반면 기업의 자율성 침해는 파면사유에 해당하는 “중대한 법 위반 행위”이라는 것이다. ‘성실’이라는 용어를 추상적이고 상대적이라고 말했던 판결문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보다 기업의 돈벌이가 더 ‘중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1990년 헌법재판소는 사유재산과 시장경제원리를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하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판결문이 치명적인 논리적 오류를 만들어내면서까지, ‘중대한’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부정하였던 것은 바로 시민들의 ‘정치’였다는 것이다. 광장의 시민들은 국민의 생명권 보장을 위한 대통령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국가를 요구하였지만 판결문은 그것이 한낱 분노에 찬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책임을 묻기 위한 ‘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안정적인 시장경제질서의 회복이 너희가 아우성치는 생명보다 더 중대하다고 보면서 이제 그만 광장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판결문은 우리의 시간을 광장의 촛불이 등장하기 이전으로 돌려놓고 있다. 대통령의 자리에 박근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들여놓는 것 외에 달라진 것이 없는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한 말은 이 상황에서 너무나도 적합해 보인다. “헌법은 변혁의 열망을 지속적으로 수용하는 한에서 헌법으로 기능하는 것이고, 국민의 열망을 배제하고 기성질서를 고착화하는 한에서는 치안법이다.(자크 랑시에르 지음/진태원 옮김, 불화, 도서출판 길, 2015, 51쪽 이하.) 판결문은 헌법을 치안법으로 대체하고 있다.
광장을 통해 나온 변혁의 열망이 ‘판결문의 정치’ 속에서 용해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세월호 참사 관련 내용을 판결문 전면에 배치한 의도가 ‘대통령 파면’이라는 고기를 던져주면 시민들은 자신들의 논리 없음과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뻐하면서 그 고기를 즐길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재판관 안창호는 보충의견에서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장 24절)’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지만 이 구절을 다시 판결문에 돌리고 싶다. 판결문은 이 구절에 따르고 있는가?
그래서 나는 이 판결문에 불복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불복’이 보수단체가 말하듯 박근혜의 탄핵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 불복은 ‘자본주의 시장질서가 그 무엇보다 중대하다’는 점을 인정하며 ‘분노도 열정도 없이(sine ira et studio)’ 살아가라는 판결문의 ‘말씀’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또 죽게 내버려두거나 죽게 만드는 세상에 나 자신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던져놓게 되기 때문이다. 1072일 만에 물위로 인양된 세월호와 마주할 면목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판결문의 정치’에 맞서 국가폭력과 자본, 제왕적인 권력정치에 맞서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 ‘세월호의 정치’를 맞세우고 싶다. 그러한 정치가 승리가 하였을 때에만 오로지 축배를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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