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3
2. 조짐
여명기의 구닥다리 영화들 중에서 네 작품은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은 전후의 중요한 영화적 주제들을 앞질러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 중 세 편은 가공의 피조물들로 가득한 환상 세계를 비춰주었다. 이 세계는 당시의 진보적인 독일 영화 이론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당대의 많은 작가들은 영화인들이 현존하는 대상을 만들기보다는 순전한 상상의 산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특수한 잠재력을 입증해줄 것이라고 격려하였다. 헤르만 해프커-전쟁이 평화라는 해악으로부터 구원될 것이라고 찬양하던 바로 그 사람-는 영화 시인들에게 실재하는 것과 비실재적인 것을 섞어보라고 조언 하였다. 전쟁광들은 환상 동화를 좋아했다. 이는 진정 독일적인 현상이었다. 부르주아 탐미주의자였다가 나중에 마르크스 사상가로 변모한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도 마찬가지로 1913년에 쓴 글에서 영화란 환상 동화 및 몽상과 같은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당시 루카치의 교설을 실천에 옮긴 최초의 인물은 파울 베게너(Paul Wegener)였다. 그는 동아시아인의 얼굴을 지닌 라인하르트 극단의 배우로서 어떤 기이한 환상이 그를 사로잡곤 한다고 말하던 이였다. 그는 이러한 환상들을 은막에 재현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그것을 진정한 혁신을 이루었던 영화 속에서 실현시켰다. 이런 환상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법칙이 아닌 다른 세계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영역으로 쓸어담겨졌다. 이 환상들은 오직 영화만이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사건들을 제공하였다. 베게너는 <달나라 여행 A Trip to the Moon>과 <사탄의 즐거운 장난 The Merry Frolics of Satan> 등의 영화를 만든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던 것과 같은 동일한 영화적 열정에 의해 고무되었다. 이 정감 넘치는 프랑스 예술가가 발랄한 마술로 아이같은 영혼을 지닌 모든 이들을 매혹시킨 반면에, 이 독일 배우는 인간 본성의 악마적 힘을 소환하는 사악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베게너는 일찍이 1913년 <프라하의 대학생 Der Student von Prag>으로 영화를 시작하였다. 이 영화는 오래된 전설을 활용하여 만든 개척적 작품이다. 베게너와 협력하여 대본을 쓴 한스 하인츠 에베르스(Hans Heinz Ewers)는 진정한 영화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좋은 영화적 소재가 되는 엄청난 흥분과 성욕을 잘 드러낼 줄 알았다. 이런 상상력-그는 1933년 호르스트 베셀(Horst Wessel)에 관한 관제 영화 대본을 쓴 사람으로서 나치의 타고난 협력자였다. 그런 면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상상력은 그를 실제 사건과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경험으로 가득한 [현실] 영역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겠다-을 지녔음에도 사악한 작가가 될 수 있었을 만큼 그는 운이 좋았다.
호프만(E. T. A. Hoffmann)의 작품, 파우스트의 전설 그리고 포우(E. A. Poe)의 단편 「윌리엄 윌슨 William Wilson」에서 빌려온 요소를 가지고 에베르스는 우리에게 가난한 학생 볼드윈을 선사하였다. 그는 수상한 마법사 스카피넬리와 계약을 한 인물이다. 사탄의 화신인 이 마법사는 볼드윈에게 유익해 보이는 환상과 무궁무진한 부를 주기로 약속한다. 볼드윈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기에게 준다면 말이다. 이 영화에는 마법사가 면경에 비친 상을 불러내어 그림자를 독립적 인격으로 만들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영화적 발상이었다. 계약 조항에 따르면 볼드윈은 아름다운 여자 백작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어 있다. 그 결과 그녀는 볼드윈을 공식적 구혼자로 바꾼다. 결투는 불가피했다. 여자 백작의 아버지가 이전 구혼자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요구하자, 뛰어난 펜싱선수로 이름나있던 이 학생은 그가 목숨을 부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스카피넬리의 교묘한 술책으로 인해 제 시간에 결투 장소에 가지 못하던 볼드윈이 서둘러 약속 장소로 나간 사이에, 그의 그림자 인격이 볼드윈은 대신하여 불쌍한 구혼자를 죽여 버린다. 볼드윈은 신망을 잃게 된다. 그는 자기의 무고함을 여자 백작에게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예 회복의 모든 시도는 그의 쌍둥이 덕분에 무정하게도 좌절된다. 확실히 이 쌍둥이는 볼드윈의 몸에 살던 두 영혼 중 하나가 투사된 것이다. 악마적 유혹에 무릎 꿇도록 만든 그의 욕심 많은 자아는 진짜 자아 행세를 하면서 볼드윈이 저버린 또 다른 자아를 파멸시키는 일에 착수한다. 절박해진 이 학생은 결국 다락방에서 그를 총으로 쏘아버린다. 망령을 향해 쏜 총알은 오히려 그를 죽인다. 이윽고 스카피넬리가 방에 들어오고 그는 계약서를 찢어버린다. 종잇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볼드윈의 시체가 그 위를 덮는다.
<프라하의 대학생>의 영화적 참신성은 당대인들의 마음을 휘저어놓은 듯하다. 어느 비평가는 이 영화를 리베라(Ribera)의 그림에 비견하면서 칭찬했지만 1926년 즈음에 리바이벌된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들은 이 리바이벌 작품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럽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 영화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아쉽게도 요지는 의심할 여지없이 부적절한 줄거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조야한 카메라 워크 때문이라는 데에 있다. 비록 영미권의 팬들은 독일만이 지닌 토착적 원천으로 인해 매혹당한 듯이 보여 독일인의 이목을 끌긴 했지만 말이다.
<프라하의 대학생>은 독일 영화의 강박적 테마, 즉 자아의 토대에 대한 깊숙하고도 두려움 가득한 관심을 은막에 옮긴 것이었다. 베게너의 영화는 볼드윈이 분리된 자기의 거울상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특수한 유형의 분열된 인격을 상징화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볼드윈은 자기의 이중성을 알아채지 못한 채, 그가 적의 손아귀에 잡혀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의 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이것은 일군의 의미들로 둘러싸인 오래된 모티프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중세적 카스트 제도로 운영되고 있는 독일에 대해 중간 계급이 실제에서 경험하고 있는 바를 몽환적 분위기로 개작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제국 체제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반발은 커져갔다. 이것은 절대주의에 준하는 프러시아 체제, 군부의 전횡 그리고 황제의 얼빠진 행태에 대한 일반의 분개와 뒤섞여 노동자들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적대감을 간혹 약화시켰다. “두개의 독일”이라는 표현 문구는 지배층과 중간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특히 후자가 몹시 분노하는 차이를 드러내는 데에 맞춤하다. 이러한 이중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제국 정부는 자유주의자들조차 수용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경제적 정치적 원칙을 옹호하였다. 양심적으로 볼 때 부르주아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지배계급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을 시인해야만 했다. 그들은 두 개의 독일을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공포담인 <프라하의 대학생>을 개인 심리학적 케이스로 다룬다는 결정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모든 외적 행위는 볼드윈의 영혼 속에서 발생한 사건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이다. 볼드윈은 그가 속한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사회적 현실의 요구가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환상 영역 속에 자리하는 것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그를 가장 잘 묘사하는 방법이란 없다. 바로 이 점이 전후 독일 영화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주제들을 편애한 경향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을 제공해준다. 볼드윈의 내적 삶에 속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난해한 의미는 모든 독일 중간계급의 애매한 사회적 상태에 대해 그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딜레마에 관련된 것으로서 그들의 심대한 혐오감을 반영한다. 그들은 관념 혹은 심리적 경험을 경제‧사회적 원인에서 찾아내는 사회주의자들의 방식을 기피하였다. 그들의 태도는 자율적 개인이라는 이상주의적 개념을 토대로 하면서 실제적 이해관계와 완벽하게 조화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의 유물론적 사유를 용인하는 것은 이러한 이해관계를 잠식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과장함으로써 사회주의적 해석을 본능적으로 회피하였다. 이런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외적 표리부동을 내적 이중성으로 여기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특권 상실을 수반하는 그러한 심리적 복잡성을 선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혼의 심연으로 물러나는 것이 자신들을 사회 현실의 파국적 타개라는 비극에서 과연 구원해줄 것인가라고 의심하는 듯 보였다. 볼드윈의 자살은 결국 독일 중간계급의 불길한 예감을 반영하고 있다.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