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 [시대와 철학] – 다시 초심으로!!
2010년 6월 10일 웹진 창간 발기인 선언문(다시 꺼내보며 초심으로)
‘(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2010년 6월 10일)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철학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의 지배적 권세와의 관계방식을 반성하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이 고전적으로 조용한 사유의 정원을 소요하거나 현대적으로 각종 하청업을 수행하는 데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처지에 서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신의 여유를 시대의 문제를 비켜가는 피신처로 삼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기 생존의 절박함에 추동되어 외래사조의 청부업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철학은 자기상실과 세계상실의 불행 속에 있다. 그러나 생의 위기를 사유하지 않는 곳에, 극복 의지가 없는 곳에 철학의 위기가 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유입과 군부독재의 등장에 저항한 광주항쟁은 진정한 자유와 연대의 삶에 대한 동경이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증명하였다. 고통이 피워낸 이 문제의식은 수많은 청년들을 도래하는 해방에 자신과 인류의 삶의 의미를 걸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학계의 일부 소장학자들은 철학을 ‘시대의 진정한 혼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활동’으로 규정하고「한국철학사상연구회」(1989)를 창립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해방 전후의 우리의 스승들이 지난한 위기에 선 한국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생의 열정과 사색을 80년대의 정치 경제적 현실의 문맥에서 계승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의 사상의 교사들은 3.1운동의 자유와 연대의 정신을 계승하여, 신성한 가치의 조명 아래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현실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이 추상적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현실로 돌아오고자 하는 실천적 지성을 철학의 포부이자 양심으로 간주했다.
서양학술의 유입에 따라 자연사에 대한 우주적 이해와 현대 엄밀 과학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역사적 인생이 겪는 억압적 고통의 해결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이 참여적 지성의 전통은 현실의 주요문제를 간과하는 지성은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려는 자존심과 자기의식을 저버린 비루한 정신이라는 것을 자각시켜 왔다.
유성의 머리 위에 태양이 빛난 이래, 머뭇거리던 생명체가 최초의 결단으로 눈을 뜬 이후, 인류 혁명사는 자유의 사상만이 인간을 세계와 화해하게 하는 것임을 감격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 자유야말로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의 총괄적 변화를 위해 전진하는 고단한 시간의 삶을 기쁨으로 인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난 날 수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서 만인의 자유를 위해 민중 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소수자들의 정치 경제적 과두제를 전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의 등장, 문민정권 이후의 신자유주의 공세, 의회 민주제의 형식적 정상화 및 정보 문화산업의 일상화, 생존 경쟁 이데올로기의 선전 등은 민주의 이름으로 부르주아 독재를 공고하게 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과학적 유물론 철학의 교조주의적이고 사회 공학적인 성격이 자본주의의 통속적 유물론과 친화성이 있으며, 기계적 경직성을 갖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반성은 기존의 변증법이 갖고 있는 전체성의 원리가 개체성을 말살하는 억압의 원리라는 통념을 보급시키고, 무명의 평등한 개체들이 주권자라는 관념을 확산시켰다. 영상과 정보 상품의 폭발적 소비 흐름을 타고 개체들의 권력은 사회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광고판이나 말끔해진 공중 화장실에서도 떠다닐 수 있었다.
전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에 기반한 주체성도 죽었다는 표어로 유행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은 문화생활 양식으로 실증되는 것 같았다. 소외된 소수자를 포함한 개체들의 권리는 유연하게 된 사법부의 법제화에 의해 객관적으로 보장되는 듯했다. 이러한 상황은 참여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상품 정보화 조류와 명운을 함께했다. 이처럼 개체들의 권력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자본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갔다’. 그리고 그동안 무엇이 왔는가? 서양에서는 가장 흔한, 그래서 닳아빠진 자유 민주적 유물론이 ‘왔다’. 세계는 물건들과 그 관계들의 총체이다. 사회적 개체들은 그것에 의존해서만 자유롭게 존재한다. 이 얼마나 편리하고 내재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상인가? 그것은 초월적 종교와 예술과 진보주의도 그 앞에서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매혹되는 미끈한 속류 유물론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신나는 가상세계가 덤으로 주어졌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이것에 홀린 세계상을 세속적 유물론이라고 판단한 맑스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총체적 물질화와 정신의 전면적 자기소외는 현상적 실재가 가상이라는 고전적 관념을 가상도 실재라고 뒤집는 데에서 경쾌하게 완성된다.
그동안의 한국사회가 누린 민주적 세계상은 정보 상품의 홍수와 개체의 권리, 금융 증권의 생활화와 사적 공간의 법제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경제 권력에 매료되고 국가권력에 호소하는 반(反)주체적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철학은 변증법의 전체성의 원리와 주체성을 두려워하여, 자유 민주적 과두제가 갖는 전체성의 원리와 폭력성에 대한 관심과 탐구를 포기했다.
이러한 무관심은 기존의 자유 민주적 사고가 전체적 일원성과 개체적 다원성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서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 전통철학이 논변의 편리를 위해 동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범주에 갇혀 버리기로 작정해온 것과 맥을 같이할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사고는 변증법적인 전체성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현실에서 작동하는 독재적 전체성에 대한 탐구까지도 버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간의 민주화 운동에 의해 부분적으로 되찾은 개체성의 권위를 국가와 자본이라는 유서 깊은 전체성에 기대어 회복하고자 함으로써 급진적 주체성을 기각했다.
개체성과 전체성은 사이좋게 공존한다. 지상의 대부분의 나라는 전체성의 위력 하에 개체가 보호받고 배려되는 것을 민주주의라 칭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제는 사회공학자들이 되어 버린 정객들과 기업가들이 뚜렷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사랑받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는 이 시대의 여러 군주들이 의회 민주제에 의해 등장하고 그것 위에 군림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적 유물론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학문 영역은 신자유주의적 정치화와 이데올로기화라는 심각한 재난을 만나게 되었다.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거대한 메뚜기 떼가 전진하는 원리가 서로 지체하면 뒤에 오는 자에 의해 먹이가 되는 위험성에 따른 흥분이라면, 우리의 이성은 분명 곤충의 변태적 욕망을 동력으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의 잡지 『ⓔ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우리의 시대는 밖으로는 정치·경제·과학·문화의 영역이 제기하는 여러 철학적 문제에 대한 탐구와 해결을 요구하고 있으며, 안으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고 실현하는 주체성에 대한 모색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성은, 세상의 바닥과 구석에서 권력이 가한 모든 참사가 전해주는 말없는 자유의 충동을 삶의 진실로 수용할 때, 물질과 생명이 갈등하는 가운데 펼쳐져 있는 세계의 심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더욱 우리 내면의 양심으로 다가올 것이다.
세계에의 즐거운 몰입 대신 세계에 대한 탐구와 사색으로, 세계를 벗어나는 영혼 대신 현실을 새로운 미래로 생성시키는 주체성을 찾는 데에서 사유는 그 깊이와 폭을 갖게 될 것이다. 시대와 사유가 넘어지느냐, 아니면 일어서느냐는 바로 이 깊이와 폭의 창조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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